‘성분명 처방’ 갈등 의료 대란 또 부를라
  • 차형석 (papapipi@sisapress.com)
  • 승인 2003.04.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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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 “정부가 강행하면 100% 파업한다”
'왕년의 투사’가 돌아왔다. 지난 3월14일 33대 의사협회장으로 선출된 김재정 당선자. 그는 2000년 의약분업 때 31대 의사협회장으로서 의료계 집단 휴·폐업을 주도한 인물이다. 김당선자는 이번 선거에서 신상진 현 회장 등 경쟁 후보 다섯 사람을 제치고 의료계의 수장으로 복귀했다. 총 선거인수 3만2천7백64명 가운데 1만3천9백77명이 투표했는데(투표율 43.8%), 김씨는 5천3백78표(득표율 38.5%)를 얻었다.

그의 재등장이 관심을 끄는 것은 노무현 정부와 의료계가 ‘코드가 안 맞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의사협회는 지난 대선에서 공식으로만 지지 선언을 안 했을 뿐이지 사실상 이회창 후보를 지지했다. 의사협회의 한 관계자는 “이회창 후보의 보건의료 정책이 의사들의 요구와 비슷해 전폭적으로 지지한 게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한 전공의는 “노후보를 지지한다고 하면 왕따당하는 분위기였다”라고 말했다. 선거 이후, 한 의사 사이트에는 ‘노무현 당선, 이제는 투쟁이다’라는 게시물이 올라오기도 했다.

의사들이 노후보에게 등을 돌린 결정적 계기는 2002년 12월 부산에서 열린 여약사대회였다. 이 자리에서 노무현 후보는 의약분업의 틀을 유지하면서 성분명 처방을 활성화하고 약대를 6년제로 바꾸는 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여기에 김화중 보건복지부장관의 최근 발언이 참여정부에 대한 의사들의 시선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김화중 장관은 국민 건강과 보험 재정 절감을 위해 성분명 처방과 대체 조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연거푸 밝혔다. 김장관은 약대 6년제와 처방전 2장 발행도 지켜져야 한다며 “반드시 소기의 목표를 이루겠다”라고 말했다.

성분명 처방은 의사가 성분명으로 처방하고 약사가 동일 성분과 동일 효능을 지닌 약 가운데 하나를 골라 조제해 주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소화성 궤양 치료제로 유명한 ‘잔탁’의 성분명은 ‘라니티딘’인데, 의사가 라니티딘을 처방하면 약사가 라니티딘 성분을 지닌 약품 가운데 생물학적 동등성(생동성) 시험을 거친 약을 골라 대체 제조하는 방식이다. 생동성 시험은 복제 의약품을 복용하게 한 후 혈중 약물 농도를 측정하는 시험이다. ‘오리지널 약’의 혈중 농도를 100으로 할 경우, ‘카피 약’의 혈중 농도가 80∼125% 정도이면 합격이다.

정부가 성분명 처방을 추진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열악한 보험 재정 때문이다. 고가약 처방을 줄여 약제비를 절감하자는 것이 성분명 처방을 추진하려는 가장 큰 목적이다. 오리지널 약과 카피 약은 가격차가 크다. 같은 라니티딘 성분이어도 ‘잔탁’이 5백6원인 반면, ‘판탁’이라는 약은 54원이다.

의사협회는 성분명 처방에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의사협회 주수호 대변인은 “성분명 처방을 의무화한 나라는 세계에 한 나라도 없다. 성분명 처방은 환자에게 맞는 약을 권하는 의사의 진료권과 처방권을 침해한다”라고 말했다. 의사협회에 따르면, 생동성 시험을 거쳤다 하더라도 품목간 약효 차이가 나타나 ㄱ약(125%)을 한 알 먹었던 사람은 같은 성분의 약일지라도 ㄴ약(80%)은 한 알 반을 먹어야 비슷한 약효가 발생한다. 의사협회는 심장약·당뇨약은 대체 조제를 할 경우 미량의 차이가 약화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을 높이기 때문에 국민 건강을 해친다고 주장한다.

의사협회는 처방전 2장 발행에 대해서도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현행 의료법에 따르면, 처방전은 2장 발행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장을 발행하는 의사를 처벌하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의사협회는 ‘1+α제도와 약사의 조제 내역서 발행’을 주장하고 있다. 환자가 원하는 경우 1장을 더 발행하겠으니, 약사들도 환자의 알 권리를 위해서라면 조제 내역서를 발매하라는 것이다.

약사와 시민단체의 시각은 이와는 다르다. 의사들이 생동성 시험을 거친 약에 대해 약효를 의심하는 것은 생트집이라는 것이다. 한 약사는 “의사에게 주는 제약회사의 리베이트가 없어질까 봐 성분명 처방을 반대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약사회 관계자는 “성분명 처방을 할 경우, 보험 재정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처방전을 들고 약을 찾아 약국을 전전해야 하는 환자들의 불편이 해소된다”라고 주장했다. 시민단체들은 환자들의 알 권리를 위해 처방전을 2장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성분명 처방’ 논란을 둘러싼 의·약·정의 샅바싸움은 이제 시작되었다. 한 의사는 “단언하건대, 성분명 처방을 정부가 강행하면 100% 파업한다”라고 말했다. 의사들이 의약분업 이후 수가 인하와 청구액 삭감 등으로 경제적 손실을 본 데다가, 의사들만 의약분업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성분명 처방’은 재파업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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