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자금 ‘혁명’이 필요한 이유
  • 최재천 (변호사, 법무법인 한강 대표) ()
  • 승인 2003.07.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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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 공화국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정치 자금 조달 창구로 ‘4인 협의회’를 운영했다. 이후락 비서실장·김형욱 중앙정보부장·김성곤 공화당재정위원장·장기영 부총리로 구성된 협의체였다. 돈에 목말라 했던 기업에 달러 차관이나 은행 대출을 해주면서 적게는 3%, 많게는 10%까지 리베이트를 뗐다. 또 정부 발주 공사를 맡은 기업들에서도 공사 대금 중 일정 비율을 거두어들였다.

1965년 경제단체가 주도해 제47회 임시국회에서 정치자금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은 1996년 12월까지 무려 아홉 차례나 새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런데도 법은 아직까지 허점투성이고 정치 자금의 속내는 투명하지 못하다. ‘굿모닝 게이트’가 여름 정국을 강타해 집권당 대표에게 사전 구속 영장까지 발부되는 현실이 바로 우리 정치 문화의 현주소다.
1976년 7월, 도쿄지검 특수부는 다나카 전 총리를 구속했다. 미국의 항공기 제작사인 록히드의 회계 담당자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이 재판이 한창이던 1988년 일본 열도는 또 한 차례 대형 정치 자금 비리로 요동했다. 일본 최대의 취업정보 제공 업체인 리크루트 그룹의 관련 회사 주식이 공개되기 전 정·관·재계 실력자들에게 싼값으로 건네졌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이 사건으로 다케시타 내각이 퇴진했고, 정계의 막후 실력자였던 나카소네 전 총리가 책임을 지고 자민당을 탈당하기까지 했다.

리크루트 사건은 자민당의 장기 집권과 정·관·재계 삼각동맹에 의한 정경 유착으로 얼룩진 일본 열도에 개혁 바람을 몰고 왔다. 일본 정치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정당 중심이 아닌 정치가 중심 체제이고, 정치권이 부패의 온상이 되어 왔는데 드디어 개혁의 칼날을 들이댄 것이다. 1994년 일본은 법을 개정해 정치 자금 기부의 흐름을 ‘정치가에서 당으로’ 전환시켰고, 개인에 대한 기부를 대폭 제한했다. 또한 파벌 사무소 등 정치단체에 대한 기부도 제한했다. 물론 지금 일본에 정치 자금 관련 비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름으로 리크루트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어 입법적 대안을 만드는 노력을 기울인 것은 분명하다.

선거법 위반에 대해서는 엄격하지만(물론 걸린 사람만 재수없다고 인식하고, 수사나 재판의 관대함이 논란이 되고는 있지만) 정치자금법 위반에는 관대한 것이 우리 나라다. 그러나 정치 개혁을 위해서는 불법 정치 자금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어야 한다. 또 지구당위원장이 아닌 넓은 의미의 정치인들에 대한 합법적 정치 자금 수수 절차도 확보되어야 한다. 동시에 미국처럼 불법으로 정치 자금을 기부한 기업이나 개인에 대해서는 처벌이 뒤따라야 한다. 굿모닝 게이트가 정치 자금 비리의 마지막 장이 될 수 있도록 대안을 만드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다. 하지만 정치 자금 수수의 직접 당사자인 국회의원들에게 알아서 정치자금법을 잘 만들어 보라고 맡겨두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지 늘 의심스럽다.

외환 위기를 겪은 뒤 기업의 투명성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정치에 외환 위기가 있을 리는 없다. 그렇다고 개인 차원에서의 낙선말고는 별다른 외부적 충격도 마땅치가 않다. 정치권 내부의 개혁에 기댈 수조차 없는 현실에서 개혁을 넘어선 혁명적인 조처가 필요한 시점이다. 다만 그 절차는 합법적이어야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진정 정치 개혁을 지향한다면 국가의 중대사에 이용하도록 헌법이 정해준 ‘국민 투표’를 통해서라도 과감하게 정치 자금 관련법 및 선거법 등을 획기적으로 개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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