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새벽까지' 해운대에서 생긴 일
  • 부산·글 고재열/사진 윤무영 기자 ()
  • 승인 2003.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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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음·낭만·열정의 도가니 ‘해운대 24시’/하루 50만명이 ‘대량 소비·휴식’
여름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IMF 경제 위기 때보다 더 경기가 안 좋다는 요즘, 피서지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매일 50만명이 넘는 피서객이 몰리는 ‘국민 휴양지’ 해운대 해수욕장을 찾았다.

06:00 “이 문디 자슥아, 와 펩시콜라가 한국 회사고?” “캔에 태극마크 있다 아이가.” “빙신아, 태극마크만 있으문 다 한국 회사가. 8·15콜라가 한국 꺼다 임마야.” “웃기네, 함 내기 하까?” “하자, 내가 지문 저그 똥개한테 장가간데이.” “알았다. 이 여드름 난 돼지 자슥아.”

지난 8월1일 아침, 두 남자의 말싸움이 해운대의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말싸움의 주인공은 5일 후 검정고시 시험을 치를 이승훈군(19)과 임병환군(19). 시험을 앞두고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왔다는 이 둘은 밤 10시부터 지속된 입씨름을 8시간 동안 지속하고 있다고 했다.

삼라만상을 두고 말싸움을 벌인 이들은 줄무늬 티셔츠로 커플룩을 입고 있었다. 이변이 없는 한 이들의 ‘가난한 피서’는 튜브를 빌려 물놀이로 낮을 나고, 컵라면과 어묵으로 끼니를 때우고 해변에서 풍찬노숙하며 밤을 지새우는 코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만원짜리 바비큐 통닭이 황송한 이 ‘만담 소년’에 비해 살림살이가 넉넉한 집에서 태어난 ‘부산 오렌지’들이 즐기는 휴가는 호화롭다. 제트스키와 바나나보트를 즐기는 이들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식사를 하고, 해변 나이트클럽에서 여자를 만나 달맞이고개의 카페촌에서 근사한 데이트를 즐긴다.

09:00 “니 몇살이고? 이름이 뭐꼬? 엄마야랑 왔나?” 해운대 해변파출소 이현진 경장이 미아가 된 김규환군(5)을 달래며 묻고 있다. 성수기 해운대에서 발생하는 미아 사건은 하루 100건 이상. 해변파출소는 길 잃은 아이들의 아우성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그래서인지 해운대 해변파출소는 경찰들의 근무 기피 지역 1순위로 꼽히는 곳이다.

해운대라는 이름은 원래 신라 말기의 석학인 고운 최치원의 자 ‘해운’을 따서 지은 것이다.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던 최치원은 고즈넉한 분위기에 반해 이곳에서 여장을 풀고 정쟁에 지친 심신을 달랬다. 그러나 이제 해운대에서 이런 여유로운 휴식을 기대하기는 무리다. 여름 휴가철이면 줄잡아 하루 50만명이 넘는 피서객이 해운대를 찾기 때문이다.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산업 사회에 꼭 필요한 것은 ‘대량 휴식’이 가능한 휴양지인지도 모른다. 해운대는 이 대량 휴식에 안성맞춤인 곳이다. 50만명이면 국민 100명 중 1명이 해운대에 있는 셈. 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해수욕장 본부 건물에는 해변파출소와 해운대구청 임해봉사실을 비롯해 수상안전본부, 부산시 교육위원회 학생지도반, 부산검찰청 계도반, 소방서 구급대 등이 들어와 있다.

12:00 “와, 그 양반 주먹 죽이네. 코 날아가는 줄 알았심더.” 구청으로부터 노점상 단속을 하청받은 한 경비업체의 직원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노점상을 단속하다가 한 노점상에게 폭행당한 것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씀씀이’가 차이가 나듯, 힘 있는 자와 힘 없는 자의 ‘벌이’도 차이가 난다. 해운대구청이 단속을 강화하면서 힘 없는 노점상들은 양쪽 구석으로 밀려나 포장마차촌과 야시장을 차렸다. 그러나 목이 안 좋아 파리만 날리고 있다. 장사가 되는 튜브·파라솔·돗자리 대여업과 탈의실·샤워장은 전부 방귀깨나 뀐다는 단체에 넘어갔다.

해변의 이권은 ‘방귀 소리’의 크기에 따라 분배되었다. 탈의실·샤워장처럼 규모가 큰 이권은 자유총연맹·새마을운동본부·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청년회 등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관변 단체들이 ‘접수’했고, 튜브·파라솔·돗자리 대여업은 해병전우회·생활체육협의회 등 31개 단체 몫으로 돌아갔다.
15:00 “아저씨도 회개하라. 아줌마도 회개하라.” “무연이 인연이요, 인연이 무연이로다.” 백사장 주변에서 피서객을 향한 각 종교단체의 전도와 포교가 한창이다. 십자가를 앞세운 전도 행렬이 백사장을 가르고, 행인들 옆으로 동자승을 앞세운 시주 대열이 늘어서 있다. 압권은 낮술로 불콰해진 한 파계승. 잔디밭에서 웃통을 풀어젖힌 채 불법을 설파하고 있다.

종교 터널을 벗어나면 기다리는 것은 시민단체 터널. 인간성회복운동본부는 ‘범국민기본질서지키기 서명운동’을 받고 있고, 대한에이즈예방협회는 에이즈 예방에 힘쓰라며 1회용 휴지에 싼 콘돔을 나누어주고 있다. ‘의송 김두한 의원 동상건립모금운동본부’는 드라마 <야인시대> 조연들을 앞세워 모금하고 있다.
종교 터널과 시민단체 터널을 벗어난 피서객의 팔목을 붙잡는 마지막 스토커는 내레이터 모델. SK텔레콤·하나로통신·코로나맥주 등의 홍보를 위해 피서객을 붙든다. 늘씬한 내레이터 모델과의 짧은 데이트 후에는 짭짤한 사은품이 기다리고 있다. ‘롯데백화점 돗자리’와 ‘스피드 011 목욕수건’을 받은 피서객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걸어다니는 광고판으로 거듭나 백사장을 활보한다.

18:00 “다행이다. 오늘도 별일 없어서.” 해수욕장 본부 3층의 수상안전본부 구조대장 김상민 경사가 긴 한숨을 몰아쉰다. 수상구조요원 경력 20년인 김경사는 대원 42명을 이끌고 피서객의 안전을 지키고 있다. 올해는 특별히 일명 ‘미녀 3순경’이라 불리는 여경들이 구조대에 합류해 활기가 솟는다.

구조본부를 비롯해 관측소 13개와 제트스키요원·선상요원이 4중으로 감시하는 해운대 해변은 제법 안전한 편. 그러나 김경사는 갑자기 ‘이안류 현상’이 일어날까 봐 늘 조마조마하다. 물이 갑자기 바다 쪽으로 강하게 빠져나가는 이안류 현상이 일어나면 사람들이 바다 쪽으로 빨려나가기 때문이다.
베테랑 구조 요원인 김경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인공호흡. 제대로 인공호흡을 하고 나면 물에 빠진 사람의 소화되다 만 음식물을 받아 먹기 일쑤인데, 그러면 아무리 비위가 좋은 사람이라도 며칠 동안 밥을 못 먹는다는 것이다.

21:00 “한번 해보세요. 1주일 후면 말끔히 지워져요.” 수원대 서양화과에 다니는 김미경씨(21)가 헤나 문신을 새겨 보라고 권한다. 여름 해운대는 대학생 아르바이트생들의 보고다. 대학 입시보다 더 치열한 경쟁을 뚫고 구청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했다는 황지은씨(20·부경대학교 자연과학부)와 같은 아르바이트생 68명이 해수욕장 이곳저곳에서 땀을 흘리고 있다.

또래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일을 하지만 해변 각설이판에서 가위춤과 불쇼를 하는 이관욱씨(21)는 본업으로 일을 한다. 아버지를 이어 2대째 각설이판에서 일하는 그는 군대를 다녀와서도 이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전국각설이협회에 등록된 회원은 현재 3백여명. 그러나 1급 각설이패는 몇 팀 되지 않는다. 젊은 감각에 맞는 1급 각설이패를 이끄는 것이 그의 소박한 꿈이다.

24:00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성옥이, 생일 축하합니다.” 홍성옥씨(21)의 해변 ‘생일빵’(생일잔치)을 위해 친구 6명이 피에로 모자를 쓰고 동그랗게 모여 앉아 있다. 자정이 넘으면 해수욕장의 주인공은 가족 단위 피서객에서 청춘 남녀로 물갈이된다. 청춘 남녀가 모여든 해변에서 올해 눈에 띄는 현상은 여성 흡연자가 많아졌다는 것이다.

‘담배 피우는 해변의 여인’ 주변에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눈이 마주치면 엉거주춤 다가와 말을 거는 ‘발정 난 청춘’들이 있다. 홍씨 친구들에게도 여러 번 남자들이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번번이 퇴짜다. 오늘은 조용히 친구들끼리 밀린 얘기를 하기로 했다. 해운대는 넓고 남자는 많으니 남자가 아쉽지는 않다는 것이다.

03:00 위말 씨(28)와 그의 스리랑카 친구 7명이 둘러앉아 두고 온 가족과 고향에 대한 향수를 달래며 노래를 부르고 있다. 해운대는 외국인 휴양객 외에도 부산 일대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도 많이 찾는다. 위말 씨와 그의 친구들은 어렵게 휴가를 맞추었다. 휴가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 좋은 사장을 만난 덕분이다.

소녀들의 노랫소리가 잦아지고 소년들의 고함소리가 수그러들 무렵, 저 멀리 웨스턴조선비치호텔에서부터 주황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나타난다. 청소원들이다. 해운대에는 하루 평균 쓰레기가 10t 넘게 발생하는데 대부분 취객들이 버린 것이다. 이 쓰레기를 치우는 데 동원되는 청소원은 78명, 이들은 딸 아들뻘 취객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를 치우며 또다시 다가오는 해운대의 아침을 준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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