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박 꿈 접고 '레저' 향해 달린다?
  • 신호철 (eco@sisapress.com)
  • 승인 2003.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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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 경마장에 변화 바람…가족 나들이 늘고 기수 팬클럽도 생겨
"씨×, 뛰어라 새끼야!”
경기도 과천에 있는 서울경마공원 구관 2층 관람대. 김영준씨(43)가 흥분해서 고함을 지른다. 그는 10번 말과 5번 말이 함께 2위권 안에 들어온다는 데 5만원을 걸었다(복승식). 만약 그의 베팅이 적중하면 57배 배당(2백85만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음 반 바퀴에서 10번 말이 선두, 5번 말이 뒤를 이었다. 그의 가슴은 뛰었다. 그러나 결승선을 80m 앞두고 8번 말이 치고 나오더니 결국 8번과 10번이 1, 2위를 했다. 김씨는 5만원을 날렸다. 그는 “그래도 재미있었다. 오늘은 이걸로 끝이다”라고 말했다. 총배당액 30억원이 걸린 제3 경주였다.

도박 공화국 대한민국. 그 중에서도 경마는 가장 오래된 역사(81년)를 자랑한다. 그러나 올 들어 로또 복권이 발매된 데다 경기 불황마저 겹쳐 경마장 수익은 줄고 있다. 서울 경마공원의 상반기 매출은 3조1천2백75억원.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3.2%가 감소했다. 반면 관람객 수는 오히려 늘었다. 올해 상반기 입장객은 8백84만 명으로 지난해 상반기보다 27.8% 증가했다. 경마를 레저로 즐기는 팬이 늘어난 것일까? 경마장 풍경은 그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경기도 과천시 주암동 35만평 땅을 차지하고 있는 서울경마공원. 럭키빌(신관) 6층에 자리한 정장실은 경마장 안에서도 별세계다. 마치 특급 호텔에서 열린 투자설명회에 온 것처럼 하얀 천을 두른 깔끔한 원탁 위에 넥타이를 맨 신사들이 앉아 모니터를 보고 있다. 빔 프로젝터가 한쪽 벽을 비추며 대형 영상을 그려내고 있다. 창가 관람대 풍경은 마치 증권사 딜러룸을 방불케 한다. 고객 책상 위마다 컴퓨터 단말기가 있어서 시시각각으로 구매 현황과 출마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서울경마공원에는 아직 VIP실이라는 개념은 없다. 6층 정장실은 일견 VIP실과 비슷하지만 딱히 돈이 많이 있어야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다만 복장에 대한 검열은 엄격하다. 남자의 경우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지 않으면 웨이터 같은 직원이 다가와 나가라고 권한다. 이런 정장실이 생긴 것은 2002년 4월 경마장 신관이 개관하고 나서부터다.

주말마다 경마장에 ‘개근’하고 있다는 박 아무개씨(35)는 언제나 6층 정장실에서 경마를 즐기는 10년 경력 경마 애호가이다. 보험회사 대리인인 그는 허영만의 경마 만화 <오늘은 마요일> 주인공 마대리를 자신의 모델로 삼고 있었다. 그는 지난 6월 1천2백만원을 딴 적이 있는데 그동안 수백 만원을 잃기도 했다. “오늘은 운이 좋지 않군요.” 그는 아침 경주에서 4번 말을 복병으로 걸고, 1번과 7번, 8번 말을 붙여서 조합을 만들어 걸었는데(복승식) 모두 떨어졌다.

주말마다 경마장을 찾다 보니 박씨는 아직 결혼을 못했다. “경마의 매력은 베팅이 적중했을 때의 쾌감이다”라고 말하는 그는 한번 크게 돈을 잃어본 뒤 6개월간 경마를 끊고 컴퓨터 게임 <스타 크래프트>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다시 돈이 모이니까 경마장을 찾게 되었다. 나는 경마 신세대다. 요즘 경마장에 젊은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경마공원 구관 1층으로 내려가 보았다. 그 곳은 화려한 신관 정장실 분위기와는 딴판이다. 흔히 상상하는 경마장 모습 그대로였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복도 사이로 경마꾼들이 바닥에 예상지를 깔아놓고 모여 앉아 있다. 거의 다 40~50대 남성이다.

4번 경주가 끝나자 관람대에 있던 한 남자가 갑자기 “경마장 폭파시켜야 해!”라고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잃었냐고 묻자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는 다음 경주에도 돈을 걸겠다고 했다.
회사원 최낙석씨(37)는 “경마장의 재미는 돈버는 데 있다. 말 달리는 것도 보기는 좋지만 돈이 안 걸리면 무슨 재미로 하겠나”라고 말했다. 역시 서울에서 왔다는 회사원 차 아무개씨(34)는 “경마는 14마리 정도는 나와야 박진감이 있는데. 지금은 7∼8마리 경주가 태반이다. 이래서는 승부가 조작될 염려가 있다”라고 말했다. 김 아무개씨(60)는 “배당률이 더 높아야 한다. 지금은 마사회가 가져가는 몫이 너무 많다”라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개인당 마권 구매액 한도는 10만원이지만 여러 창구를 전전하며 수백만원대를 베팅하는 사람도 쉽게 볼 수 있다.

신·구관 관람대와 경주 트랙 사이에는 넓은 마당(야외 관람장)이 있다. 이곳 분위기는 실내와는 또 달랐다. 일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가족 관람객이 많이 왔다. 그들은 그라운드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마냥 누워 있다.

아이들을 포함해 친척 8명과 함께 왔다는 김일환씨(24)는 “1년에 서너 번 온다. 가족끼리 편하게 놀려고 찾았다. 넓고 시원하고, 말 뛰는 게 보기 좋고, 비용도 적게 든다”라고 말했다. 그들은 경주당 천원씩 걸고 있었다.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거니는 가족도 눈에 띄었다. 야외 관람장 관객 가운데 5명 중 1명꼴로 젊은 여성이다. 여성 관객은 한결같이 남자 친구 따라 처음 왔다고 했다. 경마장측에서는 가족 관람객을 배려해 트랙 안쪽 공원에 야외 어린이놀이터를, 신관 2층에는 실내 어린이놀이방을 설치해 두었다.

하지만 경마는 팬들에게조차 여전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구관 6층 마주(馬主) 전용실에서 우연히 유명 탤런트 ㅎ씨를 만났다. 그는 기자의 인터뷰 요청에 “이런 데 오는 게 소문 나서 좋을 거 없다”라며 자리를 피했다. 취재 도중 떳떳하게 이름을 밝히고 사진 촬영에 응하는 관객을 만나기는 극히 힘들었다. 일요일 12시. 경주를 쉬는 점심 시간에 경마장 구관 1층 세미나실에서는 <경마 중독 진단과 대처 방안>이라는 강연회가 열렸다. 20여 명이 모여 경마상담실 임상심리학자 이흥표 박사의 강연을 듣고 있었다. 이박사는 1시간 동안 경마 중독 증상의 특징과 치료법을 설명했다. 청중은 “제가 경마 중독인가요?” “요즘 경마에 빠진 것 같은데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이박사는 “경마로 큰돈을 벌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전에 잃은 돈을 만회해야 한다고 집착하는 사람, 생활의 중심에 경마가 있는 사람은 경마 중독자다”라고 규정했다.

이흥표 박사는 매년 50~60명에 달하는 경마 중독자들이 상담하러 찾아온다며, 경마장을 찾는 사람 가운데 30% 정도는 경마 중독자라고 말했다. 최근 그를 찾아온 한 중독자는 억대 빚을 내서 경마를 해 왔는데 결국 이혼→실직→신용불량자의 길을 걸었다고 설명했다.

경마가 끝난 뒤 경마장 관람석에 한 무리의 젊은이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문세영 기수 팬클럽’이라고 소개했다. 마침 팬클럽 정기모임일이었다. 2003년 1월 문을 연 이 모임 회원은 3백49명. 기수 팬클럽 결성은 올 들어 생겨난 붐이라고 한다. 이들은 경마장 근처 한 식당으로 향했다. 20명이 넘는 회원이 모여 경마 승부담과 베팅 비결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팬클럽 회장 윤영예씨(25)는 “예시장에 응원 플래카드를 걸고 꽃다발도 준다. 나쁜 말을 하는 사람도 우리가 막는다”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주변의 몰이해로 곤욕을 치른 적도 많았다고 한다. 경마 기수 팬클럽을 당당히 서포터즈로 인정받고 싶다는 그는 “경마장의 붉은 악마가 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저녁 7시께 팬클럽의 초청을 받은 문세영 기수가 식당에 들어서자 회원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다. 스물두 살인 문 기수는 댄스 그룹 가수 같은 미소년이었다. 별명이 어린 왕자라고 한다. 문 기수는 “예시장에서 기수인 나에게 욕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팬클럽 회원들이 응원을 해서 욕설이 묻혀버렸다. 팬들이 큰 힘이 된다”라고 말했다. 이 날 모임에 여성 기수인 박진희 기수(21)도 참석했다. 귀고리와 모자를 쓰고 나타난 박 기수도 연예인처럼 보였다. 여자 기수가 등장한 것은 2001년부터다.

팬클럽 회원 정윤석씨(37)는 “굳이 돈을 안 걸어도 경마는 재미있다. 이제 경마를 레저로 보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이들의 주장처럼 경마는 순수한 스포츠일까? 경마인들의 자발적 모임인 공정경마운동연합 장 룡 대표는 “도박으로 폄하할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직 레저라고 말할 수도 없다. 과도기다”라고 나름의 진단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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