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 명창들, 비리 몰러 나갔나
  • 나권일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3.10.07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창’ 조상현씨 사법 처리…DJ 정부 이후 금품 수수 악습 크게 늘어
1998년 11월, 전라남도 광주에서 광주국악대전이 열렸을 때 일이다. 당시 판소리 명창부에 도전했던 박 아무개씨(68·서울시 홍은동)는 40여년 동안 독학으로 소리 공부를 한 소리꾼이었다. 국악대회에 몇 차례 도전했지만 번번히 차점에 그친 박씨는 당대 명창 조상현씨(64·서울시 목동)를 찾아갔다. 당시 광주국극단 단장을 맡고 있던 조씨는 국악대회 때마다 심사위원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박씨는 단칸 셋방에 살던 처지였지만 1천만원을 어렵게 구해 조씨에게 건넸다. 조씨는 박씨에게 “상을 받도록 힘써보겠다”라고 약속했다. 박씨가 대통령상을 받는 것은 ‘떼어 놓은 당상’처럼 보였다. 하지만 고령인 박씨는 대회 당일 너무 긴장한 나머지 한두 대목에서 실수를 했다. 그래도 심사위원들은 박씨가 최고상인 대통령상 수상자라고 발표했다.

그런데 “내가 소리를 더 잘했다”라며 차점자인 주정심씨(52·광주시 계림동)가 항의하고 나섰다. 관객들도 주씨의 항의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씨가 창을 할 때 북채를 잡았던 고수 주 아무개씨가 대회 집행위원장이던 조상현씨를 찾아가 증거를 들이밀었다. “박씨가 두 차례나 가사를 반복하는 실수를 했고, 박자도 어긋났다”라며 녹음기에 기록된 박씨의 창 대목을 들려주었던 것. 심사위원들은 결국 판정을 번복했고, 우여곡절 끝에 박씨 대신 주정심씨가 대통령상을 받았다. 여기까지는 사필귀정처럼 보였다. 하지만 뒤끝이 개운치 못했다. 주씨가 상금으로 받은 1000만원권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고, 따로 천만원을 더 마련해 다음날 조상현씨 측근에게 2천만원을 사례비로 전달했던 것이다.

국악계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한 잡음 정도로 묻힐 뻔했던 이 사건은 5년 만에 전모가 드러났다. 국악계 내부에서 대통령상 수상에 실패한 뒤 실의에 빠져 있던 박씨 얘기가 나돌다가 급기야 수사기관에까지 흘러들어간 것이다.

수상자 바뀐 사례 ‘수두룩’

경찰이 수사에 나서자 주정심씨는 조상현씨에게 2천만원을 건넨 사실을 시인했다. 박씨도 천만원을 건넸다가 돌려받은 사실을 털어놓았다. 조상현씨는 지난 9월29일 배임 수재 혐의로 구속되었다. 하지만 정계·재계·법조계 유력 인사들과 친분이 두터운 조씨는 구속된 지 사흘 만에 보석금 3천만원을 내고 풀려났다.

전국 규모 국악 경연 대회에서 수상자가 뒤바뀐 사례는 여러 차례 있었다. 국악인들에 따르면, 2000년 ‘보성소리축제’ 때도 대통령상 수상을 두고 잡음이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 출전한 여성 소리꾼 성 아무개씨의 소리가 뛰어났는데도 심사위원들이 판정을 번복해 성씨 대신 국악인 정 아무개씨의 제자가 대통령상을 받았다. 전라남도 장흥·보성에서 열리는 국악대회를 좌지우지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국악인 정씨는 2000년 장흥에서 열린 국악대회 판소리 부문에서 4위 입상자를 1위로 끌어올려 국악대회의 권위와 명성을 한순간에 실추시켰다. 2000년과 2001년 ‘임방울국악제’에서는 25세와 34세인 젊은 소리꾼이 대통령상을 받아 국악인들조차 어리둥절하게 했다. 하지만 대회 때마다 일어났던 이해할 수 없는 수상 잡음은 금방 수그러들었다. 국악계 비리 사슬을 폭로하거나 사법기관에 고발하면 판소리계에서 발을 붙이기 어렵기 때문에 당사자들이 포기해 버렸던 것이다. 입상자들이 유력 심사위원에게 사례금을 건네는 것은 소리꾼 세계의 암묵적 관행이었던 셈이다. 국악계에 정통한 한 인사는 대통령상이나 국무총리상, 문화관광부장관상을 받은 뒤 사례금을 수수하는 국악계 관행이 유지되어 온 이유에 대해 한마디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는 말로 설명했다. 국악계 지도자나 대통령상을 받은 명창들로 구성된 심사위원들은 자신의 문하생들을 입상시켜 파벌을 형성하기 위해 순번제로 담합한다. 대회 때마다 사례금으로 거둔 3천만∼5천만 원은 집행위원장과 심사위원들이 일정 비율로 나누어 가진다. 사례금을 건네는 제자들도 이점이 있다. 명창이 되면 국악계에서 대접받을 수 있고, 특히 대통령상을 받고 국악 학원을 차리면 수강생들을 쉽게 모을 수 있어 돈벌이가 된다. 또 판소리계 거물들에게 돈을 쓰면 두고두고 자신의 울타리가 되어 준다.

명창대회 참가자들에 따르면, 판소리계의 금품 수수 관행은 특히 김대중 정부 때 극성을 부렸다. 지역마다 축제가 홍수를 이루면서 남도 지역만도 광주국악대전과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를 비롯해 임방울국악제·보성소리축제·진도남도민요경창대회·순천팔마고수대회·장흥전통가무악제전·해남고수대회 등 매년 대통령상 수상자가 8명이나 배출되었다. 지난해까지 전국에서 한 해에 20명이나 대통령상 수상자가 나올 정도였다(올해부터는 10명 수준으로 줄었다).

국악계의 한 인사는 이와 관련해 “대통령상이나 국무총리상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창을 할 정도면 상을 받을 수 있다. 유명 국악인의 젊은 제자들 가운데는 상을 받으려고 비서 노릇을 하거나 ‘시종’으로 부리는 것까지 참아내곤 한다”라고 말했다. 겉으로 보면, 국악 경연 대회가 판소리 중흥을 이끄는 듯했지만 실제 명창들의 세계는 내부에서 곪아 갔던 것이다.

3~4명 더 사법 처리될 듯

하지만 최근 수사기관이 사례금 수수 관행에 대해 ‘법대로’를 내세워 사법 처리하면서 판소리계 명창들뿐 아니라 국악계 전반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광주동부경찰서(서장 박현호)는 최근 5년 동안 대통령상 수상자를 배출한 전국 규모 국악대회에서 심사위원 일부와 대통령상 수상자가 돈을 주고받은 증거를 잡아냈다. 이에 따라 조상현씨 외에도 유명 국악인과 명창 3∼4명이 사법 처리될 것으로 보인다. 광주동부경찰서 수사2계장 안천순 경위는 “판소리는 세계문화유산 지정이 거론될 정도로 뛰어난 예술이다. 국악계의 자성을 유도하고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원칙대로 수사하겠다”라고 말했다.

경찰 수사를 지켜본 국악계 인사들은 금품 수수 관행은 근절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10월3일 전남 목포에서 열린 전국국악경연대회 기악부 심사를 위해 목포를 찾은 중앙대 강사 임경주씨는 “수상 뒤 밥 한끼 대접하는 정도야 이해할 수 있지만 사전에 돈을 받고 수상자를 결정하는 것은 벌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말했다. 느슨했던 국악대회 심사 분위기도 바뀌었다. 10월3일 목포 국악경연대회 기악 부문 심사를 맡았던 국악인 이생강씨나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이영희씨 등 유명 인사들은 예술고 학생들의 연주를 주의 깊게 들으며 공정한 심사에 골몰했다. 경찰이 내사에 들어간 뒤 열린 전주대사습놀이 대회 때는 심사위원이 매긴 점수 가운데 최고 점수와 최저 점수를 제외한 나머지 심사위원 평가 점수의 합계를 평가 점수로 매겨 공정성을 확보하려고 애썼다. 국악계의 자정 노력이 반짝 반성에 그칠지, 관행을 근절해 국악인들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을지는 이제 국악인들의 손에 달렸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