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게임 끝없는 ‘권노갑 재판’
  • 고제규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1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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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전달 과정 등 증언 엇갈려…검찰·변호인단 ‘기 싸움’도 팽팽
10월28일 오후 4시 신라호텔. “담배를 싫어해 항상 ‘논 스모킹(non smok ing)’에만 앉어.” 자신의 결백을 강변하듯, 흰 수염을 기른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73)이 고함을 질렀다. 이익치 전 현대증권 회장(59)도 “분명히 여기(흡연석) 앉았다”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권씨에게서 저절로 전라도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날조여, 날조. 저것 좀 보소. 거짓말 하니 얼굴이 노래지네.”

현대로부터 비자금 2백억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권노갑씨 재판이 반환점을 돌았다. 10월31일 현재 다섯 차례에 걸쳐 1심 재판이 속개되면서, 검찰과 변호인단은 한치 양보 없는 승부를 벌이고 있다.

이 날 서울지법 황한식 부장판사 주재로 열린 현장 검증은 시작부터 뜨겁게 달아올랐다. 신라호텔 커피숍은 권씨가 2000년 총선 때 자주 드나들었던 곳. 검찰에 따르면, 권씨가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이익치씨를 만나 총선 자금을 요구했던 곳이 바로 이 호텔 파크뷰 커피숍이다. 하지만 권씨는 신라호텔에서 정몽헌 회장·이익치씨와 만난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권씨는 “만나지도 않았는데 현대로부터 2백억을 받는다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하다”라며 펄쩍 뛰었다.

현장 검증 실시는 권노갑씨측 변호인단이 꺼낸 히든 카드다. 지난 5월 진승현씨로부터 5천만원을 수수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의 항소심 재판 때, 권씨측은 현장 검증을 통해 불리한 전세를 한번에 뒤집었다. 권씨측은 이 날 현장 검증이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했다.

8월11일 저녁 7시 서울 서빙고동 신동아아파트.정몽헌 회장이 자살한 지 꼭 1주일째 되는 날이었다. 권노갑씨는 그림자처럼 따르는 비서 문성민씨와 자택 근처에서 막국수를 먹고 귀가했다. 집앞에 낯선 불청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검 중수부 수사관이라고 신분을 밝힌 이들은 “같이 좀 가야겠다”라고 말했다. 권노갑씨는 조승형 전 헌법재판관에게 전화를 걸어 법률 문제를 자문하고 임의 동행에 응했다. 이어 8월15일 권씨는 구속 수감되었다. 5년 이하 징역 또는 천만원 이하 벌금형에 해당하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알선 수재 혐의였다. 권씨가 현대의 대북 사업을 지원해 주기로 약속한 대가로 금품을 수수했다는 것이다.

7월26일 대검 중수부는 정몽헌 회장이 박지원씨에게 건넸다는 1백50억원 외에 ‘+α’ 진술을 확보했다. 2000년 1월 권노갑씨가 총선 자금을 요구해 3천만 달러를 김영완씨의 해외 계좌로 송금했고, 3월에 다시 2백억원을 현금으로 건넸다는 것이다. 정회장은 이같은 진술을 남기고 자살했다. 핵심 증언자가 사망하고, 또 다른 핵심 관련자 김영완씨가 미국으로 도주해 검찰 수사는 벽에 부닥쳤다. 검찰은 김영완씨 집 파출부부터 현대상선 최고위층까지 저인망 식으로 관련자를 소환해 진술을 받았다. 검찰은 권씨를 기소하며 자신만만해 했다.
10월14일 10시 서울지법 317호 법정.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변호인단의 반격이 심상치 않았다. 권씨측 변호인단은 진승현 게이트 재판 때 무죄 판결을 이끈 실력파이다(위 상자 기사 참조). 이들은 집요하게 검찰의 논거를 파고들었다.

검찰은 비자금 흐름을 정몽헌-김충식-전동수-김영완-권노갑으로 단정했다. 그러나 연결 사슬인 김영완이 도주해 김영완-권노갑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했다. 변호인단은 이곳을 약한 사슬로 여기고 공략했다.

이 날 돈 상자를 나른 장본인으로 지목된 정몽헌 회장의 중고등학교 동창 전동수씨가 재판정에 섰다. 그는 검찰측 증인으로 출석해 정회장의 지시로 돈이 든 상자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전씨는 당시 정황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2000년 3월께 사과 상자와 라면 상자 두 종류에 담긴 돈 상자를 다이너스티 차에 싣고, 이익치 회장이 알려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주차장에 갔다. 이회장이 미리 알려준 차량에 돈상자를 실어주자 40대 정장차림의 남자가 돈 상자를 싣고 갔다.”그의 증언대로라면 비자금이 현대에서 빠져 나간 것은 확실해졌다. 그러나 검찰 수사의 등식이 맞으려면 이 돈이 김영완씨측에 건네진 과정이 진술과 일치해야 한다. 같은 날 오후에 김영완씨의 운전 기사들이 법정에 섰다. 법원에서 즉석 대질이 있었지만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봉고차에서 돈 상자를 받았다. 상대는 2명이었다. 상자 종류는 사과 상자나 라면 상자가 아닌 정사각형 한 종류였다. 평창동 김영완 회장 지하 홈바로 옮겼다.” 김영완의 지시로 돈 상자를 나른 운전기사 김 아무개씨와 박 아무개씨는 이런 요지로 증언했다.

돈을 건넨 쪽은 다이너스티 차량으로 혼자 가서 주었다는데, 돈을 받은 쪽은 봉고차를 가지고 온 2명한테 받았다고 엇갈리게 증언했다. 검찰의 등식에 금이 간 것이다. 검찰은 김영완씨가 미국에서 보낸 진술서를 재판부에 제출했다. 권씨측 변호인단은 진술서에 동의하지 않았다. 법정에서 진술 조서를 부동의하면,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낮다. 대신 직접 법정에 나와 증언해야 한다.
검찰은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정몽헌씨의 진술서도 이 날 재판부에 제출했다. 이 진술서에 2백억원 외에도 비자금 3천만 달러(3백60억원)를 김영완씨가 알려준 해외 계좌에 송금했다는 진술이 담겨 있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이 진술서도 부동의했다. 진술서의 증거 효력을 인정할지 여부는 재판부 몫이다.

10월21일 오전 10시 서울지법 317호 법정. 증인으로 채택된 김충식·김영완 씨는 출석을 거부했고, 이익치씨만 출석했다. 이 날 변호인단은 이씨의 주장을 깨는 데 전력을 쏟았다. ‘주었다’ ‘안 받았다’는 공방이 반복된 이날 재판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결정적으로 이익치씨의 증언도 증거 효력이 있는지 의심받는다. 한국에서는 인정되지 않는 플리바겐(사전형량조정제도)을 했다고 의심받고 있기 때문이다. 플리바겐으로 얻은 진술은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가능성이 낮다. 김영완씨의 진술서에 따르면, 이익치씨는 비자금 전달을 주도했지만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여전히 참고인일 뿐이다. 초반 검찰 독주와 달리 재판이 진행되면서 주도권이 변호인측에 넘어가는 형국이다.

권노갑씨 재판은 당초 11월4일 결심 공판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재판은 11월 중순을 넘길 것으로 보인다. 변호인측은 40억원짜리 현장 검증을 제안했다. 실제로 40억원을 싣고 차량이 제대로 운행될 수 있는지를 직접 확인해보자는 것이다. 이런 현장 검증 과정 등을 거쳐 권노갑씨는 11월 중순쯤 유·무죄가 가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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