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마 유치환 고향 뺏기’ 두 도시 전쟁
  • 박병출 ()
  • 승인 2000.11.23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광상품화 노린 통영·거제시, “시인 유 치환 출생지는 우리쪽” 추모사업 경쟁
수많은 예술인을 배출해 ‘예향(藝鄕)’으로 불리는 경남 통영시가 지난 2월 한 시인을 기리는 문학관을 건립하고 생가를 복원했다. 준공식에는 경향 각지의 문인들과 후손, 통영 시민 등 천명이 넘는 사람이 참석해 한국 시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그의 문학 세계를 회상했고 추모 음악회도 가졌다. 통영시와 맞붙은 거제시 역시 한 시인을 대상으로 추모사업을 펼치고 있다. 생가는 이미 복원했고, 현재 설계를 마친 문학관은 내년 말 준공할 계획이다.

그런데 통영시가 ‘통영에서 태어난’ 시인을, 거제시가 ‘거제에서 태어난’ 시인을 대상으로 펼치는 두 추모사업을 비교하면 재미있는 현상이 눈에 띈다. 우선 추진 시기가 겹치는 데다, 사업 규모도 비슷하다. 부지 면적은 통영 쪽이 넓고(통영시 1천3백여 평, 거제시 1천1백여 평), 소요 예산은 거제시가 더 많지만(통영시 11억8천만원, 거제시 14억4천만원), 이는 설계 면적의 차이 때문일 뿐 전체 규모나 사업 추진 배경은 대동소이하다. 주인공이 죽은 지 30년이 지나 이런 영예를 누리게 된 점, 그가 생전에 ‘생명파 시인’으로 불린 점은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똑같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업이 같은 시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이 그 주인공이다. 통영시와 거제시가 서로 자기 지역이 청마의 출생지라고 주장하며 예산을 쏟아 붓는 힘 겨루기에 나선 것이다.
1923년 친형인 극작가 동랑 유치진(1905∼1974)이 통영에서 펴낸 <토성>에 시를 싣기 시작해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 청마는 부산에서 교통 사고로 타계할 때까지 대표작 <깃발> <바위> 등 천여 편의 시를 남겼다. ‘허무를 극복하고 무한·영원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염원과 고뇌를 특유의 남성적이고 의지적인 시로 형상화했다’고 평가되는 그는,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시작으로 생전과 사후에 나온 열 두 권의 시집과 세 권의 산문집에서 출생지를 통영시라고 밝혔다.

이처럼 ‘분명한 사실’로 알려져 온 청마의 고향이 통영이 아니라 거제도라는 주장은, 1989년 5월 거제시 청년들로 구성된 둔덕면 조기회가 둔덕면 하둔리에 청마의 시비(詩碑)를 세우면서 처음 제기했다. 거제시 둔덕면은 청마의 선조들이 세거한 곳으로, 청마는 시비에 새겨진 시 <거제도 둔덕골>에 ‘아아 나도 나이 불혹에 가까웠거늘/슬플 줄도 모르는 이 골짜기 부조(父祖)의 하늘로 돌아와/일출이경(日出而耕)하고 어질게 살다 죽으리’라고 묘사했다. 둔덕면 조기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청마의 고향(출생지)이 거제도 둔덕면이라는 비문을 새기고, 시비 이름도 ‘청마 고향 시비’라고 지었다. 시비 제막식 경과 보고문에는 그 근거로 ‘1987년 8월 청마의 누이동생 치선씨께서 성묘차 둔덕면 방하리에 오셨을 때, 오빠는 둔덕면 방하에서 태어나서 세 살 때 충무(지금의 통영) 외가로 가셨다는 확증을 받았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

청마의 출생지를 둘러싼 논란은, <동랑 유치진 전집>(1993년, 서울예대 출판부)이 나온 이후 본격화했다. 전집 9권의 자서전 내용 중 ‘나는 1905년 말(음력 11월 19일) 경상남도 거제도 둔덕이라는 한촌에서 태어났다. 내가 다섯 살, 청마가 두 살 때 통영으로 이사했다’라는 부분이 불씨였다.

현재로서는 통영시가 보존하고 있는 동랑과 청마의 부친 유준수(1887∼1963)의 호적부가 두 사람의 출생지를 밝힐 유일한 단서이다. 호적부에는 융희 4년(서기 1910년) 1월21일 분가한 사실과 함께 통영군 통영면(현 통영시) 동부동 5통 16호가 최초 본적지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호적부에 동랑과 청마 형제의 출생지 관련 기록이 없어, 작성 당시의 정황으로 출생지를 추정할 수밖에 없다. 통영시는 거제도 둔덕 출신인 유준수가 데릴사위로 통영의 장인 집에 와 있다가 결혼해 동랑과 청마를 낳은 후 호적을 만들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거제시는 ‘유준수가 1904년께 고향에서 박순석의 딸 또수(又秀)와 결혼해 살다 통영으로 분가해 호주 신고를 한 날이 1910년 1월21일’이라고 주장한다.

통영시는 자기들 주장을 입증할 근거로 청마가 펴낸 저서들의 연보와 그가 생전에 쓴 글을 들고 있다. 청마는 1959년 펴낸 자작시 해설집 <구름에 그린다>에서 ‘…(태어)난 곳은 노도처럼 밀려 닿던 왜의 세력을 가장 먼저 느낄 수 있던 한반도의 남쪽 끝머리에 있는 통영’이라고 썼다. 거제시의 ‘증거’는 작고한 청마의 부인 권재순씨와 살아 있는 세 딸 등 유족들의 증언, 앞서 말한 동랑 유치진의 자서전이다.

양측의 반론은 만만치 않다. 통영시는 우선 1993년 발간된 <동랑 유치진 전집> 자서전이, 어떤 ‘목적’을 띠고 발간되었다는 의혹을 감추지 않는다. 동랑이 죽은 직후인 1975년 이미 자서전이 발간되었는데도 18년이나 지나서 또 다른 자서전을 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더구나 두 권 모두 동랑이 생전에 구술한 내용을 정리(집필)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전집의 자서전 집필자인 유민영 교수(단국대 국문과)가 역시 자신이 집필에 참여하고 서문에 청마 미망인의 서문까지 실어 통영 출신임을 밝힌 1975년판 자서전의 내용을 뒤엎었다는 것이다.

동랑은 1937년 <동아일보>에 실린 <나의 수업시대>라는 수필에서 ‘…명치 38년 그 해 연말에 나는 조선의 남쪽 통영이라는 데서 고고의 소리를 질렀다’라며 통영이 고향이라고 밝혔는데, 1975년판 자서전에도 같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통영문화재단이 통영 남망산 공원에 건립했던 동랑 유치진의 흉상이 그의 친일 행적을 문제 삼은 젊은이들의 요구로 철거되고, 같은 이유로 문화부의 ‘이달의 문화 인물’ 선정이 취소되는 등 고향에서 수모를 겪자 유족들이 두 형제의 고향을 거제도로 바꾸었다는 것이 통영 쪽의 주장이다.
‘거제가 1950년대 초까지 통영에 속해 고향을 통영이라고 밝혔던 두 사람이, 그 이후 새삼 수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두 사람의 고향이 통영으로 잘못 알려진 이유’라고 다소 궁색하게 반박해오던 거제시는, 최근 획기적인 자료를 발굴해 일대 반격에 나섰다. 청마의 부친 유준수의 장인인 박순석이, 여태껏 알려진 것처럼 ‘통영에서 대대로 살아온’ 것이 아니라 사위와 한동네인 거제도 둔덕면에 거주했다는 호적부 기록을 찾아낸 것이다. 이렇게 되면 ‘유준수가 데릴사위로 신혼 시절부터 통영의 처가에 와서 살았다’는 통영시의 주장은 설자리를 잃게 된다.

한 시인의 출생지가 자치단체 간의 극단적인 대립을 불러온 이유는 무엇일까. 고동주 통영시장은 지난 2월 청마문학관 개관식 인사말에서 “오늘 청마문학관 개관을 도화선으로 삼아 예향의 명성이 날로 그 빛을 더하고, 덩달아 지역 경제의 속살도 찌게 하도록 지혜와 힘을 모으자”라고 말했다.

거제시의 실무 책임자는 “통영은 청마가 살았던 생가(生家), 거제는 청마가 태어난 생가로 하면 되지, 두 가지 다 통영이 독식하겠다는 건 지나친 욕심이다”라고 말했다. 청마를 관광상품화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싸움이라는 것을 은연중 드러낸 말이다. 문단에서는 한 시인의 출생지가 문학사적 측면에서 규명되기보다 자치단체 간의 ‘고향 뺏기’ 싸움으로 흘러가는 현실이, 아직도 우리 문화가 관광 상품이 되기에는 수준 미달이라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