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업자로 떠도는 탈북자들의 항변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0.10.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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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실업률 45.7%… 의사 출신에게 도장 파는 기술 가르치기도
탈북자 ㄱ씨(39). 공식적인 그의 직업은 실업자이다. 러시아 벌목공 출신으로 1996년 국내에 들어온 이래 공장 노동자·공사판 막노동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2년 전부터 그냥 집에서 놀고 있다. 현재 그가 벌어들이는 공식 수입은 0원. 그렇지만 그는 22평 임대 아파트에 살면서 준중형급 승용차를 몬다.

비결은 각종 지원금. 먼저 정부로부터 받는 특별생계보조금이 매달 25만∼35만 원이다. 지난해 탈북자 정착 지원금이 대폭 상승(1인 가족 기준 2천9백만원)하면서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당한 1994∼1998년 입국 탈북자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신설한 보조금이다. 생활보호법에 따른 수당도 매달 10만원 가량 지급된다.

짭짤하기로는 교회에서 받는 지원금을 따를 수 없다. 서울 강북의 한 대형 교회는 탈북자 50명에게 월 평균 50만원씩을 지급하고 있다. 단 주일 예배와 교회 행사에 성실하게 참여한다는 조건이 따라붙는다. 평소 술과 담배를 즐기는 친구 ㅇ씨도 이 때문에 일요일만은 경건한 표정으로 교회에 간다. 남편·아내·아들이 각기 다른 교회에 다니는 탈북자 가족도 있다. 대부분의 교회가 가구 별로 지원금을 지급하기 때문이다. 어쩌다 생기는 강연회도 주요 수입원이다. 한번 강연하면 사례비가 10만∼20만 원이다.

탈북자 실업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보건복지부가 이번 국정감사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에 정착한 탈북자의 실업률은 30∼50%에 이른다(통일부의 최근 통계에서는 실업률이 45.7%로 집계되었다). 광복 이래 지난 6월 말까지 국내에 들어온 탈북자는 모두 1천2백4명. 이 중 사망자나 이민자를 제외하고 2000년 6월 말 현재 국내에 거주하는 탈북자는 9백86명에 이른다. 이 중 절반 가까이가 실업자인 셈이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소득도 당연히 형편없다. 통일부가 2년 전 실시한 설문 조사 결과를 보면, 국내 거주 탈북자 가운데 가구당 한 달 평균 소득이 100만원 이하인 경우가 80.8%에 이른다. 50만원 이하인 가구도 36%이다. 문제는 앞서 ㄱ씨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이들에게 음성 소득이 발생할 통로가 존재하며, 이에 따라 탈북자 가운데 생계가 절박할 정도의 극빈층은 극소수라는 사실이다.

‘빠져 나갈 구멍이 있는’ 이런 상황이 오히려 탈북자들의 자활 의지를 꺾을 수 있다고 허광일씨(46·‘통일을 준비하는 귀순자협회’ 회장)는 경고한다. 특별한 지식이나 기능이 없는 사람은 위험하고 더럽고 일이 고된 이른바 3D 사업장에 취업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도 새로 입국한 탈북자에게 이런 사업장을 소개하면 십중팔구 두 달도 지나지 않아 ‘때려치운다’는 것이 허씨의 말이다. 일하지 않아도 60만∼70만 원이 거저 생기는데 무엇 때문에 남한까지 와서 그런 힘든 일을 하느냐며 차라리 실업자의 길을 택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의식 구조만을 탓할 수 없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하류 계층 출신 탈북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다는 탈북자마저 취업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현실이다. 4년 전 탈북한 최영주씨(62)는 북한에서 유능한 내과의사였던 남편이 한국에 와 도장 파는 직업 훈련을 받아야 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만큼 함부로 자격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한국 정부가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북한 의사는 무생물을 다루느냐’는 것이 최씨의 항변이다.

1997년 탈북한 장인숙씨(59)도 자기 전문 지식을 썩히고 있다. 김일성 주체사상탑 설계에 참여하고 30개가 넘는 교량을 설계한 1급 토목기사 출신이건만 나이 많고 여성인 데다 컴퓨터에 서투른 그녀를 써 주는 곳은 없었다. 6년제 평양철도대학을 졸업한 그녀의 막내아들 또한 인력관리공단을 통해 경력을 인정받고 철도청에 입사를 지원했는데도 주어진 일자리라고는 보일러 견습공 임시직이 전부였다.

장씨는 큰아들 때문에 탈북을 결심한 경우이다. 1994년 고르바초프 옛 소련 대통령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러시아 유학을 떠났다가 행방불명된 큰아들이 통역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고서야 장씨는 아들이 탈북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아들을 보며 ‘대한민국이 기회의 땅이구나. 각오하면 성공할 수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갖고, 온 가족이 탈북할 결심을 다졌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와 보니 기회가 주어지기는커녕 한국 사람들이 조선족 내지 제3 세계 노동자를 대할 때와 똑같은 편견을 갖고 탈북자를 상대하더라는 것이다.
탈북자들은 이같은 편견에 치를 떤다. 자기들을 ‘이방인’‘이등 국민’‘귀찮은 존재’로 생각하는 한국 사람에 대한 반감으로 탈북자 또한 ‘한국 것들’‘이쪽 놈들’이라는 표현을 곧잘 쓴다. 러시아 벌목공 출신으로 1997년 입국한 신동혁씨(38)는, 인천 남동공단에서 트럭 기사로 일하다가 식사 영수증을 챙겨오지 않았다며 일당을 깎으려 드는 상급자와 한바탕 주먹질을 하고 회사를 그만두었다.

북한 사람이라고 어리숙하게 보고 더 야박하게 구는 것 같아 참을 수 없었다는 그는 “나도 북한에서 대학 교육까지 다 받은 사람인데 왜 나보다 잘나지도 못한 놈한테 고개를 수그리며 살아야 하는지, 피가 끓어오를 때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올 초 입국해 하나원(탈북자 교육 시설)에서 나온 지 3개월밖에 안된 장계옥씨(52)는 중국에서 만났을 때 그토록 거드름을 피우던 ‘한국인 사장님’들이 여기 와서 보니 대부분 빈털터리였다며, “없는 조선족일수록 북한에 들어와 거들먹거리듯이 없는 한국인일수록 중국에서 부자 행세를 하는 것 같다”라고 꼬집었다.

북한 사람들은 유달리 자존심이 세고 ‘욱’하는 성질이 있어 직장 생활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이상권 북한이탈주민후원회 대외협력부장의 설명이다. 더욱이 탈북·도피·한국 정착 과정에서 깊어진 피해 의식 때문에 회사 사정이 어려워 임금을 체불해도 ‘내가 북한 사람이어서 협잡을 한다(속인다)’고 지레 짐작한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탈북자 가운데 상당수는 자영업에 눈을 돌린다. 특히 지난해에는 정부가 시행한 ‘생계형 창업 특별보증 제도’에 힘입어 창업자가 더 많이 배출되었다(통일부는 10여 명이 이 제도의 혜택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윤인진 교수(고려대·사회학)가 자영업에 종사하는 탈북자 25명을 상대로 지난해 벌인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마땅한 직장을 찾기 힘들어(36%)’ 또는 ‘더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어(16%)’ 자영업에 뛰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남한 사람도 사업에 성공하기 어려운 판국에 탈북자가 성공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더욱이 이들이 선택한 업종은 북한 음식점이 압도적으로 많다. 지난해 5월 서울 상계동에서 북한 음식점을 차렸던 탈북자 이 아무개씨(31). 그는 MBC-TV의 인기 오락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 ‘신장개업’ 코너에 출연하면서 일반인에게도 얼굴이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텔레비전 출연 당시 추운 날씨에 북한강을 헤엄쳐 건너는 극기 훈련을 마다하지 않고, 임진각 너머를 향해 “돈 많이 벌어 통일되면 부모님 편히 모실게요”라며 절규하던 그의 모습은 시청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상호를 바꾸고 신장 개업을 한 첫날 1백26만원 매상을 올리고 어린애처럼 좋아했던 그는, 그러나 지금 외부와 연락을 끊은 채 잠적했다.

한국 사회에 적응하지 못해 한때 심각한 알코올 중독 상태까지 빠졌다가 심근경색 수술을 일곱 차례 받고 기적적으로 재활해 서울 수유리에 또 다른 북한 음식점을 열었던 남 아무개씨(42) 또한 연락이 닿지 않았다. 확인하니 식당은 몇 달 전부터 폐업 상태였다. 서울 영등포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또 다른 탈북자는 아예 국내에 있지 않았다. 한 민간 단체 관계자는, 그가 석 달 전 경영난을 못이겨 식당 문을 닫고 러시아로 건너가 무역상을 돕고 있다고 전했다.

김 용씨의 ‘모란각’이나 전철우씨의 ‘평양랭면’정도가 외형적으로 성공을 거두었을까. 남한 사람들이 초창기에 가졌던 호기심이 사라진 1990년대 중반 들어 북한 음식점은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다는 것이 윤인진 교수의 분석이다(그의 연구에 따르면 자영업에 종사하는 탈북자의 84%가 요식업에 종사하고 있다). 실제로 “남한 사람 입맛에 맞게 요리를 개량했는데도 ‘북한 음식은 맛이 없다’는 선입견을 갖고 북한 음식점을 기피하는 손님이 많다. 상호에 북한을 내세운 것을 지금은 후회한다”라는 것이 ‘함흥 신흥관’ 대표 한창권씨(39)의 말이다.

실업자가 사회의 정상적인 구성원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탈북자의 남한 사회 적응 문제가 한반도 통일에 시금석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정부와 학계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 명도 안되는 탈북자를 한국 사회가 끌어안지 못하고서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대량 난민 사태나 통일 뒤 수천만 명 수준에서 진행될 남북한 주민 간의 사회 통합을 어떻게 이룰 것이냐고 이기영 교수(부산대·사회복지학)는 반문한다. 이들이 연착륙하는 데 필수인 관건이 일자리이다.
‘열심히 살아가려는 탈북자에게 한국에서의 삶은 전쟁’이라고 잘라 말하는 허광일씨는 ‘돈’보다 ‘기회’를 달라고 호소한다. 정착금을 올렸다 내렸다, 다시 여기에 항의하면 수당을 신설하는 식의 편법으로 탈북자를 다루어 온 정부가 탈북자들이 ‘스스로 설 능력’을 결정적으로 퇴화시킨 주범이라는 것이다.

이기영 교수 또한 정착금을 지원하는 일시적인 방식보다는 취업 및 직업 훈련을 강화해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장기적인 방향으로 정부가 탈북자 정책을 전환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정부는 이같은 의견을 받아들여 탈북자의 사회 적응·자활 능력을 높이는 쪽으로 정책을 선회하고 있다. 올해부터 탈북자를 고용하는 업체에 탈북자 임금의 절반을 보조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자영업에 종사하는 탈북자를 육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힘을 얻고 있다. 역사적으로 자영업은 인종·민족·국적·종교 따위를 이유로 사회에서 불리한 위치에 놓인 소수자가 다수자의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며 사회경제적으로 신분 상승을 이루는 통로였다는 것이 윤인진 교수의 지적이다. 이를 위해 창업지원센터(가칭)를 설립하고, ‘다수가 나눠 먹기’보다는 ‘소수에 몰아 주기’ 식으로 창업 지원 자금을 전략적으로 운용함으로써 성공한 탈북 사업가 모델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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