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칼럼] ''탈역사''로 넘어간 비전향 장기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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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0.09.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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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을 지어 한 사람 한 사람 판문점의 경계를 넘어가는 비전향 장기수 모습을 이곳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서 보았다. 특히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마지막으로 남녘땅 하늘을 바라보는 한 비전향 장기수의 얼굴에 비친, 민족 분단이 빚어낸 한 많은 삶의 흔적은 내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이들의 북송은 ‘사상의 자유’ 때문이 아니라 ‘인도적 차원’에서 고려된 결정이라고 김대통령은 밝혔다.

목숨과도 바꾸지 않은 그들의 ‘사상’, 바로 그 사상 때문에 그들이 얼마나 긴 세월을 고통 속에서 보냈는가를 생각할 때, 인도적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라는 데 우선 동감을 표하면서도 ‘사상’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 내내 내 머리 속을 감돌고 있다.

한자 문화권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사상 - 가령 유교 사상, 불교 사상, 봉건 사상 등 - 에 의미론적으로 가까운 말은 구미의 언어 중에도 많다. 가령 생각·사고·이념·주의·세계관이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구미에서는 모택동 사상 또는 주체 사상을 모택동주의나 김일성주의로 옮겨놓는다.

이와 같이 사상과 완전히 등치시킬 수 있는 단어를 구미 언어 생활 속에서 발견하기 힘든 이유를 나는 두 문화권의 차이점에서 찾는다. 첫째는, 사상이 개인 차원의 세계관이나 철학이 아니라 집단적인 공통성의 뿌리를 더 강조하고 있고, 둘째는, 사상은 단순한 이론 체계만이 아니라 실천적인 내용까지도 의미론적으로 포괄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분히 개인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구미 사회에서 많은 사회 성원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세계관이나 철학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사실 점점 어렵게 되었다. 또 관조적인 이론적 삶과 실천적 삶을 일찍부터 분리했던 그리스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서양와 달리 지행일치를 윤리적 삶의 근본 덕목으로 여겨온 유교 문화권에서 사상은 항상 실천의 의미를 강조해 왔다. 앎보다 행함이 더 어렵다는 이런 확신은 사상이 그저 앎의 폭과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무거운 함의를 요청하고 있다. 사상이 곧 신념이요 행동이라는 이런 해석은 이번 비전향 장기수를 북이 ‘신념의 강자’라고 부르는 데에서도 드러난다.

이와 달리 ‘사상이나 이념이 법 먹여 주느냐’라는 회의나 냉소적 분위기가 남쪽 사회에 만연했다는 소리를 필자는 종종 듣는다. 이런 분위기가 사실은 이곳 구미 사회를 지배한 지 오래 되었기에 특별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탈이념과 탈역사 시대에 어떤 이념이나 철학 또는 예술도 우리 삶의 의미를 밝혀줄 수 없고, 오로지 삶이 요구하는 물질적인 쾌적함이 문제인 ‘탈이념의 이념’만이 남아 있는 역사의 종점에 이미 도달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비전향 장기수 63명이 휴전선을 넘는 순간은 탈이념에서 이념으로, 탈역사에서 역사로 넘어가는 중요한 의미를 각인했다고 할 수 있다. 분단 속에서 반 세기 동안 구축된 경험 세계가 너무나 달라 결코 서로 소통할 수 없을 것이라는 일반적 우려와 달리, 비록 시작에 불과하지만 서로 관점을 바꾸어 보려는 노력은 분명히 확인되고 있다. 바로 이런 노력이 눈에 드러난 이번 비전향 장기수 북송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길을 재촉하는 촉매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사상의 무게가 무거운 세계와 사상의 무게가 너무 가벼운 두 세계가 균형을 잡는 데에 비전향 장기수 63명의 개인사가 담고 있는 우리 민족 현대사의 무게가 큰 역할을 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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