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향 장기수출신들 귀향 이루어질까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2000.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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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 출신 인사들, 남북 정상회담 앞두고 송환 기대감 높아
북 정상회담을 앞둔 데탕트 무드에서도 이른바 비전향 장기수 출신 인사 북한 송환 문제는 ‘뜨거운 감자’이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을 검토한다는 발언으로 물의를 빚은 이재정 민주당 정책위의장이 경질되었음에도 불구하고(49쪽 상자 기사 참조) 국내 종교·사회 운동단체를 중심으로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비전향 장기수 송환 추진위원회’(송환추진위)가 결성되어 송환 추진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남북문제 전문가들은 6월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비전향 장기수 출신 인사 중 일부가 송환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는 관측을 내놓고 있어 관심을 모으고 있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에 대통령도 긍정적”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할 가능성은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감지되기 시작했다. 송환추진위 권오헌 상임대표는 “지난해 12월 인권·민주화 운동단체들이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공식으로 대통령에게 비전향 장기수 출신 인사 송환을 제안했고, 대통령도 이때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라고 밝혔다. 권대표에 따르면, 지난 1월 박재규 통일부장관을 만난 자리에서도 ‘송환에 노력하겠다’는 원칙적인 답변을 받아냈다는 것이다. 때문에 송환추진위는 정부가 정상회담을 계기로 송환이라는 대세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라고 보고, 서명운동과 공청회 등 다각적인 국민 홍보 활동을 통해 송환 운동을 벌인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현재 송환추진위가 제 1순위로 꼽는 대상자는 1993년 송환 추진이 좌절되었던 김인서·김영태·함세환 씨 3명이다. 특히 김인서씨(74)의 경우 주위의 조력이 없이는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여서 가장 먼저 송환해야 할 인사로 거론된다. 광주기독병원에서 투병 중인 김인서씨는 “가고 싶다. 여동생과 딸들이 살고 있는 고향에서 자식들의 간호를 받으며 살고 싶다”라며 어느 때보다 송환 성사에 관심을 보였다. 북한에는 김씨의 여동생 김봉서씨(70)가 생존해 있고, 큰 딸 화심씨(54)는 평양 외국어대 강좌장으로, 작은 딸 정심씨(50)는 평양 유치원장으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특히 유엔 인권위원회와 미국 클린턴 대통령 부인 힐러리 여사에게까지 편지를 보내 송환을 탄원하고, 매년 제3국을 통해 편지와 의약품을 전달해 오는 등 부친 송환에 적극적이다.광주 빛고을탕제원에 거주하고 있는 김영태씨(70)도 외아들 김용재씨(51)가 북한에 생존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송환을 고대하고 있다. 아들과 손자들 사진을 액자에 넣어 소중히 간직하고 있는 김씨는 “전쟁 포로 신분으로 억울하게 감옥살이까지 했는데, 보상은 못해줄망정 나이 들어 자식들 곁에서 며느리가 해주는 밥이라도 먹게 해줘야 하지 않느냐”라며 하루빨리 고향에 돌아가기를 염원했다.

대전에서 날품팔이를 하며 혼자 살고 있는 함세환씨(69) 역시 간절하게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비전향 장기수 출신 인사이다. 이들 3명은 특히 전쟁 기간에 붙잡힌 ‘전쟁 포로’ 신분이기 때문에 하루빨리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광주시 북구 두암동 ‘통일의 집’에 함께 거주하고 있는 김동기(69) 리공순(67) 리경찬(66) 이재룡(57) 씨도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 송환이 이루어지기를 누구보다 고대하고 있다. 자신들을 ‘비전향 장기 구금 통일 인사’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김동기씨는 “이미 형을 다 마친 데다 국제법규상 원적지 송환 원칙에 따라 고향으로 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정상회담이 열리는 남북 화해 분위기에서 우리 문제가 풀린다면 이산가족 상봉 문제도 어렵지 않게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라며 조속한 송환을 요구했다. 32년을 복역한 리공순씨는 “1993년의 좌절 사례 등 과거의 경험을 생각할 때 낙관할 수도 없어 조마조마할 뿐이다”라며 송환에 대한 기대 속에서도 걱정스런 빛을 감추지 않았다.

장기수 출신 53명 북한 송환 기대

현재 국내에 생존해 있는 비전향 장기수 출신 인사는 모두 77명이다. 이 가운데 53명이 북한 송환을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가운데에는 운신하기 힘든 고령의 중환자가 많다. 최고령자인 이 종씨(91)를 비롯해 류한옥(88) 김석형(89) 김종호(88) 씨는 현재 거동조차 못하고 마냥 누워지내는 상태이다.

비전향 장기수 출신 인사 송환 문제는 그동안 남북 간에 긴장이 완화될 때마다 수면 위로 떠올랐다가 가라앉곤 했다. 특히 1993년 김영삼 정부 출범 뒤 이인모 노인 북한 송환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지면서 국내 인권·종교 단체들을 중심으로 김인서·김영태·함세환 씨 송환추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송환된 이인모 노인을 북한이 체제 홍보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여론이 들끓은 데다 1994년 남북 정상회담이 김일성 사망으로 무산되자 이들의 송환 문제도 물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이와 관련해 박건영 교수(가톨릭대·국제학부)는 “정부는 비전향 장기수와 납북 억류자를 교환한다는 상호주의 원칙을 되풀이하기에 앞서 우선 일관된 포용정책으로 북한에 먼저 베풀어야 한다. 이미 국내법으로도 형기를 다 치른 노인들을 붙잡아둔다는 것은 국제법으로나 인도주의 측면에서도 납득하기 힘들다”라고 말한다.

전향을 거부하고 30년 넘게 감옥 생활을 견뎌온 장기수 출신 인사들은 최근의 남북 정상회담 추이를 어느 때보다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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