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조계 ‘인생 역전’ 가차없네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12.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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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장’ 모신 이회창 인맥 ‘쪽박’…노무현 지지 민변 그룹은 ‘대박’
1966년 스물세 살 청년은 사법고시(6회)에 합격했다. 그는 군 법무관을 거쳐 1971년 판사로 임관했다. 첫 부임지는 대전지법. 판사들 은어로 별 볼일 없는 ‘향판(鄕判)’이었다. 하지만 통찰력 있는 법 해석으로 그는 이름을 날렸다. 1974년 그는 서울지법에 입성해 ‘경판(京判)’의 길을 걸었다. 그때부터 승진 가도가 열렸다. 1980년대 판사 배치표에서 그의 이름 뒤에는 늘 검은 표시가 붙어 있었다. 파견 근무를 나갔다는 의미였다. 파견 근무처는 대법원이나 사법연수원 등 꽃 보직으로 통하는 곳이었다. 동기들은 그를 ‘흑판(黑判)’이라 불렀고, 자신들은 ‘백판(白判)’이라 자조했다. 꽃보직을 의미하는 검은 표시. 이것은 대법관까지 승진이 보장된, 법원 내 진골들만이 가질 수 있는 훈장이었다.

흑판이라 불린 그가 바로 ‘차떼기 변호사’로 몰락한 서정우 변호사다. 1993년 그는 법복을 벗었다. 경제적인 이유였다. 변호사로 옷을 갈아입고도 그는 승승장구했다. 김성재 피살 사건·환란 사건 등 승률 제로인 사건을 맡아 승소했다. 이로써 그는 변호사업계 불패 신화로 통했다. 그는 대형 로펌을 설립하는 수완도 발휘했고, 2000년에는 대법관 후보로 다시 하마평에 올랐다.

하지만 지난 대통령 선거는 그의 법조 인생의 명암을 갈랐다. 이회창의 패배는 몰락의 시작이었다. 현대·LG 등 대기업에서 불법 대선 자금을 차떼기 등의 수법으로 받은 결과, 2003년 12월8일 흑판 출신 서정우 변호사는 쇠고랑을 찼다.

서변호사의 추락으로 법조계가 떠들썩하다. 지난 1년 동안 법조계 기상 변화는 ‘흑백 역전’으로 요약된다. 흑판이니 백판이니 하는 말 자체는 사라졌지만, 대선 이후 바뀐 법조계의 권력 기상도를 드러내는 데 이만큼 딱 들어맞는 말도 없을 듯하다.

대통령 선거 때 법조계만큼 후보를 두고 양분된 분야가 없었다. 이회창과 노무현. 법조인 출신 두 후보를 놓고 법조계는 합종연횡을 거듭했다. 이회창 후보 쪽은 KS (경기고-서울대) 법조인 주도로 세를 불려갔다. 흑판 대부분은 KS 출신이다. 경기고 법조회·가톨릭 법조회 등은 1997년 대선부터 이후보를 위해 뛰었다. 이세중 변호사·오성환 전 대법관·김덕주 전 대법원장·박우동 전 대법관 등 법조계 흑판 출신들이 이회창대세론을 설파했다. 2002년 12월12일 법무사를 포함해 법조인 6백50여명이 이회창 지지를 선언했다. 역대 대선에서 가장 규모가 큰 법조인 세몰이였다. 선거 막바지에는 법조계에서 신망이 높던 심재륜 변호사까지 나서 이후보 지지 연설을 했다.

서정우 변호사는 김정훈 변호사와 함께 이후보의 아킬레스건인 병풍 의혹을 방어했다. 이정락 변호사는 이후보 후원회인 부국팀을 이끌었다. 이후보가 대권만 잡았다면 한자리를 차지할 일등 공신들이었다.

하지만 패장을 모신 참모의 말로는 비참했다. 서정우 변호사에 이어 이정락 변호사 역시 출국 금지되어 검찰 수사를 앞두고 있다. 당내에서 ‘창심’과 통한 서청원 의원이 대표 경선에서 패하고 최병렬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당내 입지도 좁아졌다. ‘이회창의 추미애’로 영입한 나경원 변호사와 조윤선 변호사도 본업으로 돌아갔다. 김정훈 변호사만이 총선 출마를 서두르고 있다. 한나라당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는 심재륜 변호사는 정치와 담을 쌓겠다는 입장이다.
지난 1년간 이처럼 흑판이 몰락한 반면 백판은 떠올랐다. 원래 백판은 보통 판사를 일컫는데, 아예 판사 직을 마다한 자생적 백판 세력이 있다. 이들이 바로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이다. 이돈명·조준희·홍성우 변호사 등 민변 1세대는 군사 정부의 수하가 될 수 없다며 법복을 벗었다. 신진 세력 격인 강금실 변호사 역시 판사서열제를 성토하며 법복을 벗은 주인공이다. 자생적 백판 그룹인 민변은 몰락한 흑판과 비교해 화려하게 ‘떴다’.
대선 유세 때만 해도 백판은 흑판에 비해 활동이 초라했다. 노풍이 한창이던 2002년 4월 민변 중심 변호사들이 ‘노무현을 사랑하는 변호사 모임’(노변모)를 만들었다. 그러나 참여한 변호사는 40여명이 전부였다. 2002년 10월 노풍이 잦아들 때도 노무현으로 후보를 단일화하라고 주장하며 이돈명·최병모·임종인 변호사가 주도해 지지 선언을 이끌었다. 이 역시 1백50여명이 전부였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이 등장함으로써 민변은 수직 상승했다. 참여정부의 인재 풀이 되었다. 장관급에 강금실·고영구 변호사가 포진했고, 청와대에는 문재인·박주현·이석태·최은순·이용철 변호사가 들어갔다. 대북 송금 특검에도 송두환 민변 회장 출신이 임명되었다. 민변의 지원으로 개혁적인 박재승 변호사가 대한변협 회장으로 당선하기도 했다. 민변 전성 시대가 열린 셈이다.

내년 총선에도 민변 출신들은 대거 출사표를 던지겠다고 나섰다. 12월9일 민변 출신 42명이 열린우리당에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이 가운데 10명 이상이 총선에 나선다. 대표 격인 임종인 부회장(안산시 상록구 출마)은 “참여 속의 비판을 위해 출마하기로 뜻을 모았다. 노대통령의 임기는 내년 4월 총선 이후부터다. 더 이상 방관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민변, 영향력 커졌지만 독자 행보

비주류였던 백판이 주류로 떠올랐지만, 민변은 스스로 백판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최병모 민변 회장이 그런 경우다. 지난 6월 최회장은 고영구 국정원장과 식사를 하다가 고성을 주고받으며 말다툼을 벌인 바 있다. 테러방지법 제정을 두고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힌 것이다. 최회장은 민변 출신 국정원장이 어떻게 반인권적인 테러방지법 제정에 앞장설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이라크 파병 결정에 대해서도 최회장은 헌법 소원을 제기할 만큼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민변 출신으로 열린우리당에 입당한 변호사들의 행보 역시 독자적이다. 입당 후 이들은 부안 핵폐기장을 반대한다며 부안 주민들을 위해 무료 변론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법조계의 주류 교체가 수임 전쟁의 역전까지 불러 왔을까? 정답은 어림없다. 민변 소속 한 변호사는 “변호사 업계에서는 여전히 흑판 출신들이 큰손이다. 그들은 승소하는 길을 훤히 안다. 가만히 있어도 기업들이 큰 소송을 물고 온다”라고 말했다. 민변은 영향력이 수직 상승했지만 실속 면에서는 여전히 비주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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