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한국, 송두율의 ‘겨울 동화’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3.12.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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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에 갇힌 ‘자유로운 사상’, 건강 나빠져 고생…재판정은 진보·보수 경연장
“독일의 대문호 하인리히 하이네는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13년 만에 조국 독일을 다녀와 그 유명한 <독일, 겨울 동화>라는 장편 시를 남겼다. 내게도 그런 기회를 달라.”
지난해 12월16일, 피고인 송두율(60)이 재판정에서 남긴 말이다. 37년 만에 고국 땅을 밟은 그는 예정대로라면 독일로 돌아가 한국판 겨울동화를 집필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새해를 십오척 담장에 둘러싸인 1평 남짓한 공간에서 맞이했다.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유죄 판결’까지 받았다. 그가 11월15일자로 가족에게 보낸 편지 글귀처럼 ‘국정원과 검찰, 조중동·한나라당으로 이루어진 신성동맹이 펼친 여론 재판’에서 단죄를 받은 것이다. 무관심이 더 두렵다는 부인 정정희씨(62)의 말처럼, 그는 여론 재판 뒤 잊혀 갔다.

서울구치소 수인번호 65번(송두율)의 하루는 요가로 시작한다. 부인 정씨가 넣어준 요가 책을 보며 초보 수준이나마 자세를 잡는다. 고혈압에 시달려 외래 진료를 신청할 정도로 건강은 악화했다. 가족에게만 건강 상태를 알리고, 다른 면회객들에게는 내색하지 않는다.

담장 안에서 그는 대부분 책 읽고 글 쓰는 것으로 소일한다. 지인들이 책을 넣어주는데, 고등학교와 대학 선배인 김지하 시인은 자기가 그동안 쓴 책을 보내주기도 했다. 송씨가 최근에 읽은 책은 자기 처지를 대변하듯,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자서전인 <내가 살았다는 것을 나는 고백한다>이다. 부인 정정희씨와 둘째 아들 린이 매일 면회를 와 15분 동안 말벗이 되어준다. 독일대사관 직원도 1주일에 한 번씩 면회를 한다. 연말 연시 때는 특별 면회도 잦았다.

2003년 12월24일, 김수환 추기경이 그를 특별 면회했다. 김추기경의 면회는 보수 우익 성향이 강한 서강대 이사장 박 홍 신부가 적극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신부는 송교수 문제라면 누구보다 적극 나서 ‘송두율 교수 대책위원회’가 당황할 정도다. 대책위 한 관계자는 “박신부가 송두율 교수를 황장엽으로 만들겠다는 심산인지 본뜻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돕는다는 사람을 말릴 수도 없지 않느냐”라고 말했다. 재판은 매주 화요일마다 열린다. 송교수 재판이 열릴 때면 서울지방법원은 긴장감에 휩싸인다. 전투 경찰 버스가 법원 서문에 대기하고, 재판이 열리는 311호 법정 입구에서는 철저한 검색이 뒤따른다. 첫 재판 때 보수단체 인사가 가스총을 소지하고 입장한 뒤부터 검색이 까다로워졌다. 방청석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한다. 보수단체와 진보단체 인사들이 갈라 앉는다. 오른쪽에 보수단체 인사들이 앉으면, 왼쪽에는 진보단체 인사들이 포진한다.

서울지법 형사합의 24부 이대경 부장판사는 “박수와 야유를 자제해 달라. 소란을 피우면 재판장이 법에 천명한 권한을 행사하겠다”라는 경고로 재판을 시작한다. 하지만 공염불이 되기 일쑤다. 12월16일 송교수가 법정에 들어서며 방청객을 향해 손짓하자, 방청석에서도 손을 흔들며 화답했다. 보수단체 쪽에서 “손목을 비틀어버려”라는 고함이 나왔다. 법정이 싸늘해졌다. 급기야 오 아무개씨가 “여기가 노동당 법정이냐”라며 법정 모독 발언을 하자, 재판장이 그를 강제 퇴장시켰다.

송교수 혐의는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 구성, 잠입 탈출, 회합 통신 등이다. 여기에 황장엽씨 재판과 관련한 소송 사기 미수가 추가되어 있다. 그러나 재판의 핵심은 송교수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맞는지를 가리는 것이다.

검찰은 1991년 5월24일 김일성 주석을 면담한 이후 그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되었다며 ‘송두율=김철수=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본다. 반면 변호인단은 송교수가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지도, 임명되지도, 동의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활동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양쪽 다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뚜렷한 물증이 없다는 점이다. 2003년 12월23일 변호인단은 북한에 사실 조회를 해보자고 깜짝 카드를 꺼냈다. 통일부를 통해 북한 노동당에 송교수가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맞는지 직접 물어보자는 것이었다. 허를 찔린 검찰은 실효성이 없다고 반대했다.

“시대착오적 보안법에 맞춘 꿰맞추기 수사”

재판이 진행되면서 변호인단은 쟁점을 송교수의 친북 혐의가 아닌, 국가보안법으로 바꾸어 가고 있다. 시대착오적인 국가보안법에 따라 검찰이 꿰맞추기 수사를 했다는 것이다. 변호인다운 ‘송교수의 내재적 접근법이 임수경(1989) 박성희(1991) 황혜로(1999) 씨 등으로 하여금 잇단 방북 투쟁을 전개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는 공소장 대목은 억지 기소의 대표적 예라고 주장한다. 남북학술회의 개최가 북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는 검찰측 주장에 대해서도 송두율씨는 법정에서 새로운 주장을 폈다. 2003년 3월 평양에서 열린 6차 남북학술회의 때 국가정보원 요원이 남측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를 신청했는데, 북한이 이를 알고 거부했다. 하지만 그가 북한을 설득해 성사되었다는 것이다. 국가정보원 직원도 참석한 남북학술회의를 뒤늦게 문제 삼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느냐는 주장이다.

그러나 검찰은 단호하다. 실정법인 국가보안법을 위반했으니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미국에 망명한 동베를린 북한 대표부 김경필씨의 진술이 담긴 디스켓을 제출했고, 탈북자를 추가 증인으로 세울 복안이다.

현재 송두율 교수는 70여 명이나 되는 매머드급 변호인단으로부터 법률 지원을 받고 있다. 대책위에도 100여 개 시민·사회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하지만 변호인단이나 대책위나 시작은 초라했다. 1973년 송두율 교수가 노동당에 입당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처음에는 선뜻 동참을 주저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한데 묶은 것은 국가보안법이었다. 대책위는 송두율 교수 사건을 전화위복 삼아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에 불을 당길 방침이다.

유엔 인권위로부터 폐지 공고를 받은 국가보안법에 대해서는 해외에서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2003년 12월23일 세계적인 석학 하버마스는 ‘낡고, 법치 국가의 원리들과 합치하지 않는 국가보안법으로 그를 처벌할 경우 한국의 명성이 국제 여론에서 입게 될 손실을 헤아려야 한다’고 대책위에 탄원서를 보내왔다.

1평 남짓한 공간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에포크’(일시 정지) 시간을 보낸다는 송두율 교수. 한국 땅에 뿌리 내려 후학을 가르치고 싶었다는 그는, 겨울 감옥에서 하이네의 <독일, 겨울 동화> 한 구절을 중얼거릴지 모른다. ‘허식과 죄악이 전혀 없고 / 자유로운 사상과 욕구를 지닌 / 신세대가 성장한다 / 나는 그들에게 모든 것을 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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