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한 배 부수는 어선 감척 사업
  • 남해·사천·통영·부산 崔寧宰 기자 ()
  • 승인 2000.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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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실태 취재/낡은 배 다수 대상에서 빠져 ‘수산업 구조 조정’ 무색… 보상금 지급도 난맥
<시사저널>은 1999년 12월 말께 경남 남해군 창선면에 살고 있는 한 어민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편지 내용은 정부가 실시하는 어선 감척 사업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선 감척 사업은 해양수산부가 일정 수의 어선을 보상금을 지급하고 사들여 해체하거나 다른 용도로 활용하겠다는 사업이다. 이는 한·일 어업협정에 따라 조업 수역이 좁아들어 파산 지경에 이른 어민들을 구제하고, 조업 어선 수를 줄여 어업을 구조 조정하기 위해 실시하는 정책이다. 편지를 받은 취재진은 경남 남해군·사천시(옛 삼천포시)·통영시와 부산시 등 남해안 지역을 돌며 어선 감척 사업 실태를 점검했다. 이 지역은 한·일 어업 협정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이기도 하다.

경남 남해군 창선면에 사는 어민 이원수씨. 건조한 지 9년 된 41t 어선과, 5t짜리 어선을 운영하는 그는 남해군에서는 중산층에 속하던 사람이다. 그에게 위기가 닥친 것은 1997년 봄 한·일 어업 경쟁이 일어나면서부터이다. 이 때부터 그는 어려움을 겪기 시작해 한·일 어업협정이 발효된 1999년 1월22일 이후에는 아예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정부는 이씨 같은 어민을 구제하기 위해 1999년 9월7일 ‘한·일 어업 협정 체결에 따른 어업인 지원 및 수산업 발전 특별법’을 공포하고 보상 지원금을 지급하겠다고 밝혔다.

이 법안의 핵심은 어선 감척 사업이다. 조업 구역이 좁아든 바람에 넘쳐난 어선을 정부가 보상금을 주고 사들이겠다는 것이다. 이원수씨도 1999년 6월23일 남해군으로부터 자신이 운영하는 41t 어선이 감척 대상 후보에 올랐다는 통보를 받았다. 이후 그는 아예 조업을 하지 않고 배를 어항에 묶어 놓고 있었다. 어차피 고기잡이를 나가 보았자, 황금 어장에 들어가지 못해 기름값도 건지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주먹 구구식 행정으로 영세 어민만 울상

그런데 그의 41t 어선이 어느날 감척 대상에서 빠지고 말았다. 1997∼1998년 일본측 해역에서 조업했다는 무선 위치 보고 실적이 한 건도 없다는 이유였다. 보상금을 받아 수협에 진 빚을 갚으려던 그는 앞길이 막막해졌다. 일가친척이 모두 연대 보증을 섰기 때문에 파산 선고도 하지 못하는 처지에 빠졌다. 그같은 경우를 당한 사람은 한·일 어업협정으로 집중적인 피해를 본 삼천포와 통영에 더욱 많았다. 사천·통영 수협 관계자들은 이처럼 딱한 사정에 놓인 어민이 집과 식구를 버리고 야간 도주하는 사례가 많다고 밝혔다.

규모가 정해진 보상금을 분배하다 보면 이씨 같은 사례는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문제는 보상금 지원 대상이 된 어선이 대부분 건조한 지 5년도 안 되는 새 배라는 사실이다. 가장 먼저 교체해야 할 10년 넘은 낡은 배들은 대부분 감척 대상에서 빠졌다(36쪽 표 참조). 더욱 심각한 것은 새 배를 갖고 있는 선주는 비교적 경제 사정이 나은 유지급이고, 낡은 배를 가진 선주는 영세 어민이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남해군에서 감척 대상이 된 어선 23척은 한결같이 선령 5년 미만의 새 배였고, 선주는 예외 없이 유지급이었다. 낡은 배를 가진 영세 어민이 보상 대상이 된 경우는 남해군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같은 사정은 삼천포와 통영도 마찬가지였다.


한·일 어업협정으로 피해를 본 어민을 구제한다는 어선 감척 사업이 왜 이 지경으로 흘렀을까? 이는 해양수산부가 일본 해역에서 조업했다는 무선국 위치 보고 실적만으로 감척 어선을 골랐기 때문이다. 해양수산부 논리는 한·일 어업협정으로 피해를 본 어선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1997년 1월1일부터 어업협정이 체결되던 1999년 1월22일까지 만 2년 동안 해당 무선국에 조업 위치를 보고한 전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 실제로 일본쪽 배타적경제수역(EEZ)으로 지정된 지역에서 조업했더라도 이 기간에 무선국에 위치 보고를 하지 않은 어선은 무조건 감척 대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이원수씨처럼 실제로 일본쪽 해역에서 조업했으면서도 무선 보고를 하지 않은 배들은 의외로 많았다. 이들은 대부분 오래된 배를 가진 영세 선주였다. 이런 낡은 어선은 보험에 들지 않거나 정기 검사를 제때 받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가급적 같이 조업하는 다른 배에게 무선 위치 보고를 맡기거나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결국 정부 보상 대상에서 빠지는 화를 자초한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선 감척 사업이 본래 취지와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방치해서는 곤란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경남 통영시 근해통발수산업협동조합 관계자는 “어선 감척 사업은 전체 수산업을 구조 조정하고 현대화하는 차원에서 진행해야 하는 사업이다. 그런데 정부가 한·일 어업협정에 따른 보상 차원에서만 이 사업을 추진하다 보니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게 되었다”라며 ‘행정 편의주의’를 지적했다.

통영은 꽃게잡이 어선과 장어잡이 어선이 주종을 이루는 어항이다. 취재진이 찾은 12월29일은 꽃게잡이가 제철이었는데도 항구 가득 어선이 정박해 있었다. 나가 보았자 기름값도 못 건질 뿐 아니라, 감척 대상에 오른 어선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확인 결과 통영항에서도 감척 대상에 오른 배들은 어김없이 산뜻하게 페인트가 칠해진 새 배들이었다. 건조한 지 5년이 안된 이 배들은 40t 이상 규모의 성능 좋은 냉동선이었다. 이 어선들은 냉동 시설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짧게는 3∼4개월, 길게는 5∼6개월 정도 바다에 머무르며 조업할 수 있다. 이 배들은 12월쯤에 중국쪽 해역에서 꽃게를 잡아 냉동 보관하며 수온을 따라 이동하는 꽃게를 쫓는다. 그러다 봄철까지 일본 해역으로 이동하며 조업하는 수가 많다.

하지만 통영항에는 냉동 시설을 갖추지 못한 10년 이상된 노후 어선도 있었다. 이 어선들은 12월에 꽃게잡이를 나가더라도 냉동선처럼 일본 해역으로 가지는 못한다. 잡은 꽃게에 얼음을 채우더라도 장기간 보관하기에는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이 노후 어선은 한 달 안에 모항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래서 활꽃게를 잡는 노후 어선은 일본 해역에 들어갔다는 무선국 보고를 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과적으로 이 어선들은 감척 대상에서 빠지게 되었다.

건조한 지 5년도 안된 새 배를 부수는 것은 국가 자원 낭비이다. 이대로 감척 사업이 진행된다면 한국 연근해 어장에 떠 있는 한국 어선은 낡은 고물 배나 5t 전후의 소형 어선 일색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해양수산부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해양수산부는 감척 대상 배 가운데 새 어선은 활용할 방안을 마련했다. 특히 부산항을 모항으로 하는 대형 어선들을 어업 지도선이나 해군 작전용 등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도 쌍끌이·외끌이·트롤 어선 같은 100t이 넘는 경우뿐이었다. 100t 미만 어선 활용 방안은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정부의 서류 상으로는 여러 가지 활용 방안이 나와 있지만, 실제로 이 방안이 현실화할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감척 대상에 든 새 배 활용 방안도 묘연

감척 사업이 이처럼 엉뚱하게 흐르고 있다는 지적이 그동안 없었던 것도 아니다. 부산 대형기선저인망수협 관계자는 “우리 수협도 일본쪽 해역 출입 여부를 따지지 말고 통발·외끌이·쌍끌이·트롤 어업 등 한·일 어업협정으로 피해를 받는 어선 모두에게서 감척 신청을 받자고 건의했다. 만약 해양수산부가 확보한 예산보다 신청 물량이 너무 많으면 노후 선박부터 없애면 된다. 그러나 이는 반영되지 않았다. 정부가 새 배 활용 방안을 짜고 있다지만 현실성 측면에서는 의문스럽다”라고 말했다.

감척 대상 선정은 그렇다치고 약속된 보상금 지급이 차일피일 연기되고 있는 것도 문제였다. 정부가 보상금 지급을 마무리하겠다고 애초에 밝힌 시기는 지난해 7월이었다. 그러던 것이 9월30일로 연기되고 또 10월로, 11월로, 12월 말로 연기되었다.

보상금 지급이 늦어진 데 대해 해양수산부 배평암 차관보는 12월29일 부산 공동 어시장에서 어민들에게 설명회를 가졌다. 배차관보는 “당초에는 1천5백억원 정도 보상금을 지급할 방침이었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다시 조사해 보니 보상 규모가 3천5백억원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판단이 나왔다. 이처럼 보상 금액을 다시 계산하는 바람에 작업이 11월에야 끝났다. 또 보상 규모를 두고 기획예산처와 승강이를 벌이다 보니 이렇게 늦어졌다”라고 지연 사유를 밝혔다. 결국 이 기간에 발생한 금융 비용은 고스란히 어민 몫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보상금을 타기까지 절차가 복잡한 것도 문제였다. 현재 정부는 감척 대상으로 선정된 어민이 직접 배를 해체한 뒤 이를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해야만 보상금을 지급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이럴 경우 결국 올해 3∼4월로 보상금 지급이 연기될 수밖에 없다. 사천시 연승·유자망 선주 협회 회원 아무개씨는 “선박 해체 업체가 절대적으로 모자라 빠른 시일 안에 해체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라고 말했다.

어선 감척 사업은 곳곳이 구멍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주관 부서인 해양수산부가 눈높이를 현지 어민에 맞추지 않고 행정편의주의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정부 의도야 어떻든 이대로 사업이 진행된다면 한국 연근해 바다가 온통 낡은 어선과 조각배로 가득찰 가능성이 높다. 가뜩이나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한국 수산업. 적어도 정부가 이를 부채질하지는 않아야 한다는 것이 어민들의 지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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