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적 평가‘ 테풍… 가시방석에 앉은 교수들
  • 魯順同 기자 ()
  • 승인 2000.02.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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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평가제 도입 후 무더기 승진 탈락…2002년부터 계약임용제 전면 실시
“지난 가을에 출판한 책은 연구 업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전면적인 개정의 경우 저술 점수의 50%를 주겠다고 했으니, 업적으로 올려도 되겠군. 교육 점수는 어떨까. 과 엠티에 참석하면 0.5점. 두 번 갔으니 1점. 창의적인 교수법을 선보였다면 1점을 주겠다? 그것도 증빙 자료를 첨부하라는군.” 컴퓨터 앞에 앉아 이렇게 중얼거리던 김 아무개 교수. 착잡한 심정으로 지난해 발표한 논문을 떠올려본다. 이른바 국외 저명 학술지에 실린 논문은 없고, 국내 학술지에는 고작 한 편을 실었다. 자주 논문을 기고하는 지면이 있지만, 대학이 인정하는 학술지가 아니므로 업적에서 제외된다. 싹수 있는 후배들이 꾸리는 지면이라 애착이 가지만, 품을 줄이려면 별 수 없이 ‘공인 학회지’를 찾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다. 같은 학교 음대에 재직하고 있는 박 아무개 교수. 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교원 업적관리평가 규정을 훑어본다. ‘독창회 5점. 오페라 출연 3점. 단, 조연일 경우 1점.’ 웃음이 픽 나온다.

방학 막바지인 요즘, 대학 교수 대부분이 이런 자기 신고표를 작성하며 방학을 마무리짓고 있다. 처음 교수업적평가 규정을 보고는 이게 뭔가 싶었지만, 지난해 승진 실태를 보고는 마냥 비웃을 수만은 없는 형편이다. 지난해 사립 대학 가운데, 개혁에 적극적이라고 평가 받아온 연세대의 경우 승진 탈락률이 30%대를 넘었기 때문이다. 이화여대도 마찬가지다. 1998년 이전 80~90%에 이르던 승진율이 1999년 들어 1학기에 60% 남짓으로 떨어지더니 지난 학기에는 50%대로 뚝 떨어졌다. 예전 같으면 별 탈 없이 승진할 교수 가운데 절반이 탈락했다는 이야기다.

<교수신문>이 수집한 사례에 따르면 아주대 윤 아무개 교수는 강단에 선 지 3년 만에 부교수가 된 반면, 연봉제를 실시하고 있는 계명대 김 아무개 교수는 재직 15년 만에 급여를 깎이는 곡절을 겪었다. 교수업적평가가 도입된 뒤 나타난 신풍속이다. 이처럼 명암이 엇갈리는 것은, 많은 대학이 승진 심사에서 근무 연수, 연구 실적, 최소 논문 편수 등 기존 요건 외에 ‘승진 점수’ 항목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이는 교수업적평가의 주요 항목인 연구·교육·봉사 점수를 합산한 것으로, 말하자면 ‘연간 성적표’와 같은 것이다. 물론 일단 교수(전임강사 이상)가 된 이상 부교수·조교수·정교수 등급 체계가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1점, 2점짜리 촘촘한 잣대를 들고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근무 조건·연봉·연구비 모두 계약 대상

이같은 현상은, 태풍의 전조에 불과하다. 2002년부터 국·공립·사립 대학에서 계약임용제와 연봉제가 전면 실시되기 때문이다. 계약임용제는 기존 기간 임용제와 달리 대학과 교수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바꾸는 제도로 평가된다. 임용 기간뿐 아니라 근무 조건·연봉·연구비 지급 조건 등이 모두 계약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모든 대학이 실시해야 하지만, 모든 교수가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당분간 정년 보장 교수와 계약 임용 교수로 이원화할 전망이다).

계약임용제의 성패 여부는 교수업적평가의 신뢰도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따라 교육부와 각 대학은 객관적이고 신뢰도 높은 평가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교수들의 활동을 평가해 계량화하는 ‘교수 업적 평가제’를 실시하는 대학은 꾸준히 늘고 있다. 지난해 말 현재 1백28개 대학에서 실시되었다. 교육대학을 제외한 전체 대학의 72.3%에 이르는 수치다. 하지만 활용 폭은 대학에 따라 차이가 컸다. 평가 결과를 승진 재임용 등 인사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대학은 경북대 서울대 안동대 등 총 97 곳(54.8%)이며, 성과급에 반영하거나 연봉제 기초 자료로 이용하고 있는 곳은 계명대 아주대 한남대를 비롯 46 곳(26%)이다(1999년 교육부 국정 감사 제출 자료).

대학 개혁의 깃발이 오른 이래 교수 사회는 지독한 몸살을 앓고 있다. 경쟁력 부재를 증명하는 지표들이 속속 발표되고, 교수의 질을 따져 묻는 목소리들이 여간 거세지 않기 때문이다. 가장 자주 동원되는 잣대는 과학인용색인(SCI)에 포함되는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편수, 혹은 국가 경쟁력에 대한 대학의 기여도 등이다. 스위스 국제경영연구소(IMD)의 국가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대학의 국가 경제 기여도는 조사 대상 47개국 가운데 최하위다(한국교육개발원 수석연구위원 김영철씨 자료).

교수들을 닦달할 수밖에 없는 정황은 또 있다. 2003년부터는 대학 정원(전문대 포함)이 입학생을 넘어서는 공급 부족 사태가 예견되기 때문이다. 이는 수요 공급을 예측하지 못한 채 대학이 난립하도록 방치해온 교육부의 교육 정책 부재 탓이 크지만, 그 부담은 고스란히 대학에, 더 구체적으로는 교수에게 전가되고 있는 실정이다. 교육의 질은, 교수 인력의 질이 좌우한다는 전제가 암묵적으로 통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 경쟁력을 내세운 교육부의 대학 개혁 일변도는 거침이 없었다. 이에 대한 교수 사회의 반발은 지난해 가을 두뇌한국21에 대한 대규모 시위에서 드러난 바 있다. 교수 사회의 정서는 불안을 넘어서 분노로 치닫고 있다. 최근 들어 전선은 대학 내부로 옮겨졌다. 연세대와 서울대 교수들의 서명 파동이 그 예다. 5백 명이 넘는 교수들이 대학측(총장)을 성토하고 나섰다.

연세대는 기존 교수평의회와 별도로 ‘올바른 개혁을 원하는 교수들의 모임’을 꾸려 5개월째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들의 자괴감은 보기 민망할 지경이다. 교수들은 ‘교육부장관이 바뀔 때마다 앞장서서 추종하는 추태를 보임으로써 대학 사회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연세대의 경박성을 세간에 알리는 행위다’라고 자조하고 있다.

연세대에서 조교로 일하고 있는 김 아무개씨는, 이런 배경에는 연세대가 다른 어느 대학보다 교육부의 시책에 호응해 왔으나, 정작 두뇌한국21의 뚜껑을 열고 보니 참담할 정도로 실적이 저조했다는 점이 작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대학측이 교수들의 의견을 묵살한 채 남의 잔치에 들러리만 섰다는 정서가 팽배해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도 총장의 독단에 불만을 표하고 나섰다. 서명 이틀 만에 2백60 명이 넘는 교수가 서명에 동참했을 정도다. 이들은 일선 교수들이 의사 결정 과정에서 배제됨으로써 물정 모르는 시행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코노미스트>가 국제 학술지?

그동안 외부에서 대학을 바라보는 시각은 ‘철밥통’이라는 말에 잘 드러나 있다. 국제 경쟁력 강화니, 선진 교육의 질이니 하는 수사를 한꺼풀 벗겨내면 그 밑바닥에는 ‘한번 교수면 영원한 교수인 상황 탓에 대학이 굼뜨고 게을러졌다’는 시각이 자리잡고 있다. 실제 1년에 논문 한 편 쓰지 않고, 수십 년째 똑같은 강의 노트를 쓰는 교수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업에 필요한 인력을 배출하라는 식으로 몰아붙여서는 곤란하다고 지적한다.

대학을 평가하는 데 해외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은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 사립 대학의 경우, 사회과학 영역 평가에서 국내 학술지에 논문을 실었을 경우 점수는 120, 국제 학술지는 2등급일지라도 170이다. 교수들은 이같은 ‘신 사대주의’야말로 한국 인문학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몰상식이라고 말한다. 많은 대학이 정교수 요건으로 해외 학술지 논문 2편 게재를 내세우고 있는데, 이에 미달할 경우 승진 필요 점수가 추가로 올라가는 등 해외 평판에 가중치를 두고 있는 실정이다. 명문 사립 대학으로 꼽히는 한 대학은, 영국의 시사 잡지 <이코노미스트>를 최상위 국제 학술지로 올려놓아 교수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어차피 교수들의 활동을 점수로 재는 계량화가 대세가 된 마당에는 평가 척도를 공정하게 다듬는 것이 급선무이겠지만, 현재와 같은 촘촘한 잣대가 과연 대학의 질을 높이는 이상적인 방안이냐에 대해 회의를 표하는 목소리도 높다. 연구에만 전념해도 1년에 괜찮은 논문 하나 쓰기 어려운 마당에 논문 편수만 세고 있으니, 똑같은 내용을 재탕 삼탕 우려내는 쓰레기 논문이 난무한다는 것이다.

불만은 인문학뿐 아니다. 이화여대 석좌교수인 김 원 교수(정보 통신 전공)는 이공 계열 업적 평가라고 해서 SCI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나름으로 국제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기준을 참조하는 것은 이해하나 무차별적인 적용은 금물이다. 미국에서는 리스트뿐 아니라 학술지의 수준, 피인용도 등을 종합적으로 적용하는데 우리는 목록 자체를 절대적인 기준으로 떠받드는 형국이다.”

국내 대학을 평가하면서 외국의 잣대에 기대는 현상은, 단순히 국제 경쟁력이 화두가 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내에 척도로 삼을 만한 자료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교육부 산하 학술진흥재단은 1998년부터 등재 후보 학술지 목록을 작성하고 있지만 잣대로 삼기에는 한계가 많다. 우선 재단에 심사를 요청한 학술지만 대상으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목록 이외에 다른 척도가 미비한 상태다. 담당자인 한상덕 사무관은 “앞으로 피인용도 측정 등 조사 범위를 늘려갈 계획이지만, 교수 업적 평가의 잣대로 삼을 만큼 보완하려면 몇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평가 척도를 다듬는 것 못지 않게 계약임용제의 전제 조건으로 꼽히는 것이 ‘교수 시장’ 형성이다. 어차피 신분 보장보다는 공정한 경쟁이 화두로 등장한 형편이라면, 고용 시장이 더 유연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지표가 대학간 이동이다. 한국교육개발원 김재기 박사는, 모교 출신 교수 임용을 제한하는 교수 쿼터제(3분의 2를 넘을 수 없도록 규정)가 올해부터 시행되고 있지만, 그런 규제보다는 스카우트가 활성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보상 없는 채찍질만 난무할 경우, 유학파 교수들이 해외로 빠져 나가는 ‘변종 U턴’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우려에도 귀를 기울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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