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시의 ‘바다 주권 찾기’ 전쟁
  • 부산/박병출 (pbc@sisapress.com)
  • 승인 2000.06.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항만 자치제 도입 시기 놓고 해양수산부와 팽팽한 공방전
부산은 항구다. 그것도 우리나라 제1의 항도다. 그렇게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틀렸다. 부산은 동해 남부와 남해 동부의 드넓은 바다를 끼고 있지만, 항구는 단 한 평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항도 부산에 항구가 없다는 말은, 물론 아이러니컬한 표현이다. 1876년 개항한 부산항은 1911년 일제가 개발을 시작해 물양장 여덟 군데와 제1∼4부두, 중앙 부두 등을 건설했다. 광복 이후 우리 정부도 개축과 증설을 계속했고, 1980년대 들어 컨테이너 부두를 집중적으로 건설했다. 현재는 북항-남항-감천항-다대포항에 이르는 해안선 길이만도 2백2㎞, 항 내수 면적 2백43㎢에 달하는 아시아 대륙 관문항으로 성장했다. 컨테이너 물동량 기준으로 세계 5위에 해당하는 규모다.

‘제1 항도’ 부산에 ‘부산항’이 없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무역항에 대해 국유·국영 관리체제를 채택해, 건설과 관리를 해양수산부장관이 직접 맡고 있다. 남항의 경우는 무역항이 아닌 연안항에 속해 부산시가 관리하고 있는데, 그나마도 위임받은 권한이다.

이처럼 이름만 제1항도에 머물렀던 부산시가, ‘해양수도(海洋首都)’의 주인 자리를 되찾겠다고 나섰다. 항만관리공사(항만공사)를 설립해 부산항을 직접 운영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부산시는 지난 3월 항만공사설립기획단을 구성한 데 이어 관련 전문가들을 초청해 세 차례나 정책 포럼을 여는 등 분위기를 잡았고, 4월에는 청와대 경제수석과 해양수산부에 부산시 요구를 전달했다. 지난 5월에는 부산상공회의소의 대정부 건의에 이어 부산시의회도 대정부 건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등 민·관 합동으로 해양수산부를 압박하고 있다.

부산시가 해양수산부를 상대로 바다의 주권을 돌려달라고 요구하게 된 계기는, 공교롭게도 중앙 정부가 제공했다. IMF 사태 이후 행정 구조 조정과 관련해 1998년 10월부터 해양수산부 경영 진단을 실시한 기획예산처는 지난해 2월 ‘재정 상태가 양호한 부산·인천 항에 2001년부터 항만공사제를 도입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고무된 부산시는 같은해 5월 해양대학교 항만연구소와 부산발전연구원에 ‘부산항 자치 공사 도입 방안에 관한 연구’ 용역을 인천시와 공동으로 발주하고 항만정책자문위원회를 구성해 해외 사례 조사에 나서는 등 공사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사실 항만공사 설립은 부산의 오래된 숙원이었다. 전경련과 해양수산개발원도 1997년 정부에 ‘국제 경쟁력 강화를 위해 재정 자립도가 높은 항만부터 관리권을 지방에 이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건의했다. 해양수산부 역시 다음해 1월 국민의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부산항과 광양항에 항만자치공사 제도 도입을 통한 관리권 이양을 검토 중’이라고 보고했지만, 모두 건의나 검토에 그쳤다. 부산시가 발 빠르게 움직인 이면에는, 당시 경험에서 얻은 불신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한 해양수산부의 대응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양수산부는 부산시보다 4개월 늦은 지난해 9월 같은 내용의 연구 용역을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해양수산개발원과 행정자치부 산하 한국행정연구원에 공동 발주했다. 차이가 있다면, 항만공사가 설립되면 살림을 맡을 부산시가 설립후 운영 방안과 지역 경제 파급 효과 연구에 중점을 둔 것과 달리 해양수산부는 기본 형태·조직·재정 등 항만공사 모형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난 4월 나온 해양수산부 용역 중간 보고서는 부산시의 기대를 깡그리 무너뜨렸다. 용역기관들은 항만공사 설립을 3단계로 나누어 각 지방 해양청이 항만을 관리하는 현행 시스템을 보완 개선하는 준비 기간(단기), 중앙 정부 중심의 항만공사를 설립하는 도입기(중기)를 거쳐 장기적으로는 완전한 자치 항만공사로 전환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부산시 항만 관련 부서의 한 공무원은, 구조 조정으로 인해 밥그릇이 작아질 것을 의식한 해양수산부가 의도적으로 공사 설립을 늦추고 있다고 주장했다.

재정 자립도 연구 결과 엇갈려 시비

해양수산부 용역을 맡은 기관들이 ‘항만 자치제’가 시기 상조라고 주장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다. △행정·재정·기술 능력과 경험 부족으로 항만 관리 역량 미성숙 △독립적 항만공사 설립에 필요한 법(관련 법률 19개) 제·개정에 상당 기간 소요 △항만의 낮은 재정 자립도 등이다.

특히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은 재정 자립 문제이다. 해양수산부에 앞서 나온 부산시의 용역 연구 결과는, 국책 사업인 부산 신항 건설비와 해양종합공원 개발비를 제외하면 부산항은 2002년 재정 자립도가 119%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런데 해양수산부의 연구 용역 중간 보고서는 올해 부산항의 재정 자립도를 겨우 47.7%로 평가했다. 재정 자립이 가능한 시기는 2007년(자립도 103%)으로 잡혀 있다. 부산시와 시의회는 이같은 평가를 불신하며 산출 내역을 공개하라고 요구하는 등 보고서 내용을 수용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에 대해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해양수산부의 공식 입장이다. 이 달에 나올 최종 용역 결과물을 토대로 해양수산부 안을 마련한 후 기획예산처·행자부·총리실과 협의를 거쳐야 정부의 최종 안이 마련될 것이라는 정도이다. 그러나 해양수산부 관계자도 “부산항은 국내 컨테이너 화물의 85%를 처리하는 전국항이다. 부산에 있다고 해서 부산시가 항만관리권을 갖겠다는 건 위험한 발상이다. 국가 경제를 좌우하는 정부 조직을 전환하면서 학습 기간도 없이 일시에 바꾼다면 그에 따른 부작용과 문제점은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며 보고서 내용의 타당성만은 적극 인정했다.

해양수산부가 항만 자치제 전면 시행의 잣대로 삼는 것은 항만간 경쟁 체제이다. 광양항을 활성화해 부산항과 대등한 위치로 끌어올릴 때까지는 부산항을 ‘국가항’으로 관리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해양수산부는 부산시 입장에 동조하는 기획예산처와 행자부에 불만을 품고 있다. 다른 부처는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입장(기획예산처)과 구조 조정에 관심을 두지만(행자부), 해양수산부는 항만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고민한다는 것이다.

부산항은 지역 경제의 심장 역할을 하고 있다. <부산항 자치공사, 바로 시행되어야 합니다>라는 소책자를 발간해 대대적인 홍보에 나선 부산시의 ‘바다 자치’ 시도와 ‘부산항은 부산에 있는 전국항’이라는 해양수산부의 반박은 이 달 말 해양수산부의 연구 용역 최종 보고서가 나오면 더욱 뜨거워질 전망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