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간장.췌장 예치하는 ‘장기 은행 ’출범
  • 김 당 기자 ()
  • 승인 1999.03.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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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사자 장기 구득·분배 위한 ‘한국조직은행’ 출범
개봉 박두. K2B 혹은 KTB가 뜬다. 섣부른 상상은 금물. 밀레니엄 버그, 즉 컴퓨터의 2000년 인식 오류 문제를 지칭하는 Y2K의 사촌쯤 되는 골치 아픈 존재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오히려 어떤 치료법으로도 소생할 수 없는 말기 환자들에게 새 새명을 불어넣어주는 수호 천사이다.

K2B는 ‘한국뼈은행(Korea Bone Bank)’의 약칭이고, KTB는 ‘한국조직은행(Korea Tissue Bank)’의 약칭이다. 그 중 공식 명칭은 한국 조직 은행이다. 이 은행 조직의 뼈대가 시작 단계인 사람의 피부·연골·인대·혈관·판막 같은 신체 조직보다는 그동안 뼈 중심으로 운영되어 왔기 때문에 일명 뼈 은행이라고도 부르지만, 정식 명칭은 역시 한국조직은행이다. 오는 3월18일께 창립대회를 갖고 정식으로 출범한다. 그동안 개별 병원 차원에서 개설한 각막·골수 은행은 있었지만 조직 은행은 처음이다.

현대 의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장기 이식술은 어떠한 치료법으로도 소생할 수 없는 각종 말기 장기 질환자의 장기를 정상적인 장기로 대체하는 시술이다. 한국의 장기 이식술은 이미 선진국 못지 않은 수준에 도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의 장기 이식 시술 현황(69∼97년)을 보면, 69년에 처음 신장 이식 수술을 한 이후 97년 말 현재 1만5천 건이 채 안된다(33쪽 표 참조). 그나마 신장(57%)과 각막(41%) 시술이 대부분이고, 간장·신장·췌장 시술 사례는 모두 합쳐 2%도 되지 않는다. 그 중 88년에 처음 시작된 뇌사자의 장기 이식 사례는 모두 3백13건으로 역시 전체의 2.1% 수준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수요와 공급의 심각한 불균형이다. 해마다 대체 장기가 필요한 사람은 늘어나는데 장기를 기증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다. 유교 문화권의 오랜 관습과 장례 문화 탓이 크다. 즉 부모로부터 받은 몸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말에 따라 몸에 칼을 대는 것은 금기로 받아들여져 왔다.

법률적 제약 탓도 크다. 선진국과 달리 한국은 사고와 판단을 맡고 있는 대뇌피질은 물론 맥박·호흡 등 기본적인 생명 활동을 주관하는 뇌간(腦幹)까지 파괴되어 뇌의 모든 기능이 상실된 뇌사(腦死)를 법률적 사망으로 인정하지 않고 심장사(心臟死) 원칙을 고수해 왔다. 물론 앞에서 보았듯이, 그동안 뇌사자 장기 이식이 3백13건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언론에 미담으로 대서 특필되기도 했다. 그러나 법적으로 죄다 불법이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구문(舊聞)일 수 있다.시민운동과 의료계의 ‘뜻있는 만남’

그동안 민간 차원에서 장기 이식 운동을 주도해 온 기관·단체는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헌안봉사회·새생명나눔실천회·한국신장협회·한국골수은행협회 등이다. 그 중 장기 이식 운동을 가장 활발히 펼쳐온 대표적인 단체로는 91년 1월 발족한 재단법인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운동본부·본부장 박진탁 목사)가 꼽힌다. 99년 1월 말 현재 운동본부에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등록한 사람은 총 10만1천5백87명(표 참조). 8년 만에 장기 기증 희망 등록자가 10만명을 넘어섰다. 그 중 본인이 뇌사 상태에 빠졌을 경우 장기를 기증하겠다는 사람은 1만7천2백94명으로 전체의 17%이다. 95년 처음 ‘사랑의 뼈 은행’을 개설한 이 단체가 조직 은행을 개설하는 쪽으로 운동을 확대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부는 지난 2월8일 내년부터 시행할 ‘장기 등 이식에 관한 법률’(장기이식법)을 제정 공포했다. 뇌사 판정 기준을 규정하고 뇌사자의 장기 적출을 허용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이 법률은, 뇌사자가 생전에 장기 기증에 동의했거나, 반대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을 경우 가족이 동의하면 장기를 기증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또 이 법은 제17조에서 뇌사자의 사망 원인을 ‘뇌사자가 이 법에 의한 장기 등의 적출로 사망한 때에는 뇌사의 원인이 된 질병 또는 행위로 인하여 사망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했다. 뇌사가 형법 상의 사망으로는 인정되지 않고 있지만, 심장사 원칙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에서 뇌사자의 장기 적출을 합법화한 이 법이 제정됨으로써 장기 이식술의 발전과 보급을 막아온 걸림돌이 제거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조직 은행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 발족했다.

한국조직은행은 지금까지의 장기 이식을 반성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전제되어야 할 것은 지금까지 한국에서 이루어진 뇌사자의 장기 이식이 엄밀히 말해 모두 불법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나마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 ‘번호 타기’를 둘러싼 잡음도 끊이지 않았다. 뇌사 판정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장기가 공정하게 분배되었는지, 시술 결과는 만족할 만한지, 사전 검사에서부터 사후 추적·감시까지 철저히 선진국 조직 은행 운영 기준에 따라 우리도 해 보자는 것이다.” 의료 소송 전문 변호사로서 이 은행에 운영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최재천 변호사의 말이다.

조직 은행 개설은 의료계의 반성과 장기 이식술 발달이 가져온 결과이지만 시민운동과 의료계의 결합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운동본부 최승주 사무국장은 조직 은행 개설에 대해 “의사들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최초의 운동이라는 성격을 지닌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국장에 따르면, 한국조직은행은 95년 발족한 뼈 은행이 모태가 되었지만 그동안 의사(병원)들이 가져간 뼈가 어떻게 분배·이식되었는지 사후 감시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었다. 따라서 조직 은행은 운동본부가 장기와 조직의 구득·홍보·감시를 담당하고, 의료계가 장기와 조직의 채취·저장·처리·보관·분배를 담당하는 조직적인 결합 양태를 띠고 있다. 또 비의료인의 참여를 제도적으로 보장함으로써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는 한국적 모델을 창출하려고 한다.‘분배의 공정성’에 초점

미국의 경우, 공정한 장기 배분 및 이식을 위하여 이미 84년에 장기 이식법을 제정하고 보건복지부가 주관해 장기 구득 및 이식 네트워크(OPTN)를 조직했고, 그 이후 전국 규모의 비영리 민간 기관인 장기 이식정보센터(UNOS)와 협력하여 장기 공여자와 장기 이식술을 원하는 환자의 등록을 받아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에 따라 수술 서열을 정하는 거국적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장기 기증의 핵심은 분배의 공정성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한국에서는 장기 이식 수술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등록하는 기관이나 조직이 없다. 따라서 장기 이식 희망자는 각 병원에 개별적으로 등록하며, 장기 이식의 기준과 프로그램도 개별 병원 차원에 머무르고 있다. 이를테면 생체 신장 이식의 경우, 수혜자가 공여자를 물색한 후 함께 입원해 수술하기 때문에 병원은 수혜자 선정을 맡지 않고 있다. 따라서 한국조직은행 출범과 이 은행이 세운 운영 지침, 현재 병원 별로 장기이식센터 혹은 장기이식위원회(병원윤리위원회)를 조직하고 운영 지침을 마련해 장기 이식 업무와 연구 인재 양성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실정에 비추어, 국가가 공인한 수혜자 선정 기준과 지침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장기 수입 대체 효과도 예상

조직 은행 출범은 그동안 음성적으로 이루어져 온 장기 매매를 근절하고 외국인 장기 수입 대체 효과도 거둘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테면 그동안 운영해 온 뼈 은행의 경우, 수입한 뼈에 대한 정보가 없어 에이즈 감염 등 안전성에서 무방비 상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장기 이식 전문가들은 “전문의가 장기·조직을 직접 채취해 시술하는 것이 가장 안전할 뿐만 아니라 ‘우리 뼈’가 조직 적합성과 친화성이 더 뛰어나다”라고 말한다. 먹거리로 생성된 뼈와 살에 신토불이 원칙이 적용된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나 조직 은행이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많다.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기는 말처럼 쉽지 않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이 당면 과제이다. 통계에 따르면, 사망자 백명에 1명꼴로 뇌사자가 발생한다. 98년에 24만명이 사망했으니 뇌사자 2천4백명이 나온 셈이다. 그 중 질병에 감염되거나 손상되지 않은 장기·조직을 기증할 만한 사망자는 20% 정도인 4백80명이다.

의료 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있다. 따라서 뇌사보다는 대체 장기 개발이 윤리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이익이지만, 뇌사자들만 전부 ‘사랑’을 베풀어도 한국의 말기 장기 질환자 모두에게 새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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