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과 의사 모녀 살해범 이번에는 가려낼까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1999.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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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법의학회 학자들 증인 출석… 첫 ‘모델하우스 방화 실험’ 실시
95년 6월12일 서울 은평구 불광동의 한 아파트에서 발생한 치과의사 모녀 살해 사건은 사건 발생 3년 10개월이 지나도록 진범 공방이 계속되고 있다. 당시 치과의사 아내 최수희씨(31)와 한 살배기 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된 외과의사 이도행씨(36)는 재판 과정에서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경험을 해오다 현재는 운명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1심 재판부에서는 사형, 2심에서는 무죄, 그리고 지난해 11월에 있었던 대법원 판결에서는 유죄 취지 파기환송 판결(사건을 다시 재판하라고 고등법원에 되돌려보냄)이 선고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씨가 과연 진범인가를 둘러싸고 그를 기소한 검찰측과 변호인단이 4라운드째 치열한 공방을 펼치고 있다. 현재 공방의 내용은 직접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간접 증거만으로 사람을 사형에 처할 판결을 내릴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모아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간접 증거만으로 살인 사건 진범을 가려내려면 그런 증거들이 어떤 요건을 충족해야 하는가가 핵심 쟁점이다. 파기환송심 담당 재판부인 서울 고법 형사 5부(재판장 채영수 부장판사)도 사건의 민감성을 감안해 극도로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지난 4월20일 열린 속행 공판에서 재판부가 외국의 저명 법의학자들을 증인으로 신청하도록 허용하고, 실제 범행 현장인 아파트 구조를 재현해 불을 질러 보는 `‘모델하우스 화재 실험 감정’을 받아들인 것도 그 일환이다.

그러면 이씨는 과연 어떤 간접 증거들 때문에 사형까지 언도받았다가 무죄로 풀려난 뒤 다시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 재판 대상이 되었을까. 사건 당일은 때마침 이씨가 외과 의원을 개업하는 날이었다. 그날 오전 7시에 이씨가 집을 나선 뒤 8시 50분쯤 이 아파트 경비원은 이씨 집에서 연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경비원이 이씨 집 문을 따고 들어간 시간은 오전 9시10분께였는데, 안방 장롱의 옷가지가 타들어 가고 있었다. 욕조에서는 이씨의 아내인 치과의사 최씨와 딸이 숨진 채 엎드려 물에 잠겨 있었다. 끈으로 목이 졸려 숨진 시체였다.남편 이도행씨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죄

경비원은 즉시 경찰에 신고했고, 뒤이어 경찰 감식반이 현장에 달려와 최씨 모녀의 사망을 확인한 뒤 수사에 들어갔다. 시신을 욕조 물에서 건져 검안한 시각은 11시30분. 그 뒤 이 사건 수사는 검안 시간과 남편 이씨가 출근한 아침 7시를 기준으로 시작되었다. 사건 현장에 직접적인 범행 증거가 없었으므로 검경 수사진은 간접 증거와 정황 증거들을 집중 수집했다. 그 결과 용의자가 2명으로 압축되었다. 남편인 이씨와 인테리어업자 ㅈ씨였다. ㅈ씨는 숨진 최씨와 3년 전부터 불륜 관계를 맺고 사채 거래를 해온 사이였다. 그러나 ㅈ씨는 사건 당일 밤 같이 있던 여자 증인이 나타나 일찌감치 용의 선상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남편 이씨가 유력한 용의자로 그해 9월 구속 기소되었다.

수사진이 이씨를 범인으로 기소한 것은 여러 정황 증거와 국내 법의학자들의 견해에 따른 것이었다. 우선 이씨가 사건 전 아내와 시댁과의 불화 문제로 다투었고, 아내의 불륜까지 알아채자 이 날 새벽 4시 전후 아내와 딸아이를 살해해 욕조물에 담갔다는 것이다. 특히 의학적·과학적 전문 지식이 있는 이씨는 처자를 살해한 뒤, 혐의를 회피하려고 장롱 속 옷가지에 불을 놓아 서서히 타들어 가게 하는 방법으로 수사에 혼선을 유도했다는 점이 강조되었다. 이씨를 상대로 실시한 거짓말 탐지 실험에서 다섯 가지 중 네 가지에서 양성 반응이 나왔다는 점 역시 유죄의 증거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남편 이씨는 체포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범행을 자백하지 않고, 억울함을 호소해 왔다. 범행 도구·목격자·지문·혈흔 등과 같은 직접 증거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씨는 아내의 불륜도 기소 후 경찰 조사 과정에서 처음 알았다고 주장했다. 또 지능범으로서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 이씨가 화재를 냈다는 검찰측 주장에 대해, 변호인측은 제 3자가 불을 내 자기가 탈출할 시간을 버는 동시에 출근한 남편에게 혐의를 돌리려고 불을 질렀다고 맞섰다. 거짓말 탐지 시험도 경찰 수사 과정에서 살해 시각, 장소 등에 대해 강도 높은 조사를 받은 이씨가 진범 여부와 상관없이 선입견이 박혀 특정 질문에 이상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 변호인측 반대 논리였다.

그러나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되었다가 2심에서 무죄를 선고하게 된 가장 큰 간접 증거는 국내 법의학자들의 사망 시각 추정이었다. 검찰측이 참고인으로 의뢰한 대부분의 국내 법의학자들은 이씨가 집을 나간 오전 7시 이전에 최씨 모녀가 사망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사망 시각 추정에는 시반·시강과 위 음식물 소화 시간이 근거로 쓰였다.

시반이란 사망 후 시신에서 피가 아래로 몰려 생기는 반점이다. 국내 법의학자들은 최씨 시신 중 앞쪽 허벅지에 나타난 반점을 들어 양측성 시반이 생긴 것으로 판단했고, 이에 따르면 사망 시각은 새벽 4시 전후, 아무리 늦어도 7시 이전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1심은 이를 수용했지만 2심에서는 허벅지 시반이 팬티 끈 자국이라는 변호인측 의견을 받아들여 양측성 시반으로 보기 힘들다고 판시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법의학자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시를 내렸다.

최씨의 시신에 나타났다는 시강도 법의학자들이 사망 시각을 판정한 중요한 근거였다. 시강이란 시신이 딱딱하게 굳는 현상인데, 최씨는 그날 11시30분 감식팀이 관찰할 때 전신 강직이었다고 한다. 이는 사망 후 6~7시간이 흘렀다는 법의학자들의 소견이 나오게 되는 토대가 되었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최씨가 사망한 시각은 새벽 4시 전후가 되어 남편이 범인이라는 가정이 성립한다.

세계법의학회, 국내 법의학자 소견서 부정

그러나 변호인측은, 최씨 모녀의 시신이 따뜻한 욕조 물에 잠겨 있었다는 점을 무시한 채, 상온(18~20°)을 기준으로 잡은 시강과 사망 시각 추정은 큰 오류라고 반론을 폈다.

시신은 부근의 온도가 높을수록 강직이 빨리 온다는 최신 법의학 근거를 들어, 욕조물 온도가 최초 43도였고 검안시 32도였다면 최씨 시신은 사망 후 2시간 20분에서 4시간이 지난 상태라는 것이다. 이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최씨는 남편이 출근한 뒤 사망했다는 결론이 나온다. 2심 재판부의 무죄 판결에는 이런 견해가 크게 참작되었다.

위 음식물 상태 또한 검찰측은 숨진 최씨가 전날 밤 먹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변호인측은 최씨가 남편 출근 후 먹은 것이라는 주장으로 맞섰다.

결국 남편 최씨에게 사형에서 무죄까지 왔다갔다 하는 판결이 나오게 된 것은 법의학적 소견의 증명력 여부에 대한 1, 2심 재판부의 견해가 달랐던 점이 크게 작용했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간접 증거라도 종합적인 증명력을 고려할 때 유죄 증거가 될 수 있고, 사건 심리도 불충분하다’는 취지로 파기환송 판결을 내렸다.

이같은 상황에서 세계 법의학계 거두가 최근 유죄 판단의 근거인 국내 법의학자들의 감정 결과를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버나드 나이트 세계법의학회 회장은 이 사건 관련 증거와 소견서 등을 건네받은 뒤, 국내 법의학자들이 시체를 감정해 내놓은 시반·시강과 위 음식물 소화 정도에 따른 사망 시각 추정에 문제가 많다는 소견서를 보내왔다. 그는 변호인을 통해 낸 소견서에서 `‘증거에 의심할 여지가 없어야 하는 형사 사건에서 시반과 시강 및 위 음식물 내용 분석만으로 추정된 사망 시각을 유죄 증거로 단정하는 것은 현대 법의학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이해가 결여되어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세계법의학회에서는 스위스 로잔 대학 법의학교실 토머스 크롬페쳐 박사와 영국 스코틀랜드 런디 대학 법의학실 프라우드 교수를 국내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시키겠다고 제안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 대해 국내 법의학자들은 `‘사망 시각 추정을 두고 서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는 원론적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결국 치과의사 모녀 살해사건은 국내 법의학 수준과, 이를 통한 살인사건 범인 재판의 한계를 세계 무대에 올려놓게 되는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이씨측 변호인은 또 사건 당시 현장과 똑같은 모델하우스 방화 실험을 통해 증명력을 높이기로 하고, 한국 소방학회에 화재 실험을 의뢰했다. 국내 재판 사상 처음 도입되는 이 실험은 오는 6월에 실시될 예정이다. 이 실험을 통해 검찰측이 주장한 화재 발생 시각의 정밀성 여부가 검증될 것으로 보인다. 이씨가 범인이 아니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는 김형태 변호사는 “소매치기와 간통죄에서는 간접 정황 증거만으로 유죄를 선고하는 일이 더러 있지만, 살인 사건에서 그런 방식을 쓰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검증해 국내 사법제도와 인권에 중요한 교훈을 남길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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