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나환자의 ‘실낙원’ 되는가
  • 나권일 기자 (nafree@sisapress.com)
  • 승인 1999.02.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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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인력 감축·예산 삭감으로 환자 간호 역부족… 마을 통폐합 방침에 시름 겹쳐
고흥 반도의 끝자락인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 녹동항에서 15분 간격으로 출발하는 철선을 타고 소록도에 이르면 ‘한센병은 낫는다’는 상징적인 문구가 쓰인 표지석이 방문객을 맞는다. 국립 소록도병원. 천형(天刑)의 병으로 불리던 나병 환자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소록도는 지금 국제통화기금(IMF)의 유탄을 맞은 뒤 환자와 간호 인력 모두가 힘겨운 삶을 꾸려 가고 있다. 정부 구조 조정에 따른 병원 인력 감축과 예산 삭감으로 환자들이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쓸쓸하게 죽어 가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부터 1월 중순까지 두 달 사이에만도 36명이 사망했다(40쪽 상자 기사 참조).

소록도병원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소록도 구북리. 구북리는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이 가장 먼저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한 유서 깊은 지역이다. IMF 사태가 터진 뒤 49명이 옹기종기 서로의 아픔을 달래며 살던 이 마을에도 큰 변화가 밀려왔다. 우선 마을 환자들을 돌보던 간호사와 간호 조무사가 줄었다. 구북리를 담당하던 간호사는 이웃 남생리 마을 간호사까지 겸직하게 되었고, 2명이던 간호조무사도 1명으로 줄었다. 구북리 진료소 간호사 이미란씨(33)는 “외딴 집들이 많기 때문에 오토바이로 이동한다. 그나마 비가 오면 오토바이도 탈 수 없는 처지다. 이동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서 혼자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다”라고 말했다.붕대 지급 줄어 광목천으로 대용

간호조무사 김추미씨(28)의 주된 업무는 환자들의 수발을 드는 것이다. 매주 수요일이나 목요일에는 이발을 해 주거나 손톱·발톱을 깎아 주고 목욕을 시켜 주는 일을 한다. 소록도병원의 간호조무사는 투약이나 치료 외에 이불이나 옷 수선 같은 생활 보조 활동을 겸한다. 때문에 혼자서 49명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지난해 소록도병원 전체 예산 96억여 원 가운데 진료비로 할당된 액수는 겨우 3억4천여만원. 그만큼 환자들에게 지급되던 의약품에도 차질이 생겼다. 일부 의약품은 제약회사의 재고품을 기증받아 치료하는 것이 소록도병원의 현실이다. 이번 겨울에는 감기 환자가 갑자기 늘어나는 바람에 감기약이 부족해 애를 먹었다. IMF 이후 의료 장비 가격이 오르면서 붕대도 과거에 2개가 지급되었다면 지금은 1개만 지급되고 있는 실정이다. 구북리 사람들은 지금도 광목천으로 붕대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썩어들어 가거나 감각이 없는 상처 부위를 감싼 붕대를 풀어 뜨거운 물에 삶아 다시 사용한다. 피고름이 묻어 있는 압박 붕대나 거즈를 재활용해야 하는 환자들의 불편은 크다.

간호 인력이나 의약품 부족도 큰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마을의 시설 관리나 보수를 담당하는 인력이 줄어 마을이 황폐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83년 동안의 자취를 유물처럼 간직하고 있는 소록도에는 50년 이상 된 낡은 건물이 5백80여 동으로 섬 전체 건물의 절반이 넘는다. 때문에 섬 곳곳에는 비어 있는 돈사나 축사, 버려진 집들이 많다. 방문객이나 섬 경관을 위해서는 낡은 시설들을 보수하거나 해체해야 하지만 관리 인력이 부족해 엄두를 못내고 있다. 고장 난 구복리 마을 목욕탕도 열흘이 지나도록 방치해 두고 있는 실정이다.

병원 인력이 줄어든 만큼 자원 봉사자들이 그 틈을 메워야 하지만 그도 여의치 않다. 소록도에는 지난 한해 동안 자원 봉사자 3천84명이 다녀갔다. 주로 환자들의 집 청소를 하고, 나무와 잡초를 베거나 환자를 목욕시키는 것이 자원 봉사자들의 일이다. 구북리에서 2주일 동안 자원 봉사를 했다는 박영석군(충북대 의과대학 4학년)은 “봉사를 하러 왔는데 오히려 배우고 나간다. 마을 주민들의 따뜻한 정이 인상적이었다”라고 말했다.

마을의 황폐화도 문제지만, 현재 구북리 사람들의 가장 큰 걱정은 수십년 동안 정들었던 마을을 떠나 이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북리 마을은 폐쇄 대상 1순위에 올라 있다. 병원 인력이 줄어 환자 마을을 통합할 수밖에 없다는 방침에 따라 병원측이 이주를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48년간 구북리에서 살아온 주민 박세주씨(73)는 “스물여섯 살에 이곳에 와서 평생을 살았다. 소록도의 돌멩이 하나하나에 피와 땀이 묻어 있다. 구북리가 고향이나 마찬가지인데 아무리 좋은 집을 지어 이사한들 뭐하겠느냐”라고 말했다.

주민 가운데는 지난해 병원 근처 중앙리의 새 집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도 있다. 도무지 정을 붙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 오장렬씨(68)는 “구북리 간호사들이 아니면 누가 우리들의 대소변 수발까지 하겠는가. 단 한 사람이 남는다 해도 평생 구북리에서 살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병원 당국은 환자 마을 통폐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국립 소록도병원 이상열 의료부장은 “환자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구북리 사람들이 병원 부근 마을로 이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수 인력으로 환자들을 돌볼 여력이 없다. 병원과 가까운 마을에 집중되어야 현재 인력으로 간호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직원 1인당 환자 수 일본의 5배

이처럼 소록도가 겪는 IMF 한파는 혹독하기 그지없다. 정부조직개편위의 결정으로 지난해 간호조무사와 기능직 등 26명이 줄었고, 올해도 정부의 정원 조정 계획에 따라 간호조무사 23명을 포함해 올해 말까지 30명이 감축될 예정이다. 그 다음에는 마을 통폐합이 기다리고 있다. 이미 8개 마을 가운데 지난해 1개가 줄어들었고, 내년에는 다시 5개로 줄게 된다. 당연히 마을 환자들로부터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다. 병원측도 마을 통폐합을 강행할 경우 환자들의 집단 민원이 발생할 소지가 있는 것으로 보고 단계적인 통폐합을 추진하고 있다. 병원 예산도 지난해까지는 96억여 원이었지만 올해는 88억원으로 줄었다. 현재 소록도병원에서는 간호사 27명과 간호 조무사 67명을 포함해 직원 1백95명이 7개 마을 환자까지 합쳐 모두 9백15명을 돌보고 있다. 이 가운데 정규직인 전문 진료 의사는 병원장을 포함해 3명에 불과하다. 99년 현재 소록도병원의 직원 1인당 환자 수는 5.6명으로 일본의 1.1명에 비해 턱없이 많다.

이상열 의료부장은 “전체 환자 수는 줄고 있지만 간호를 받아야 할 환자들은 늘고 있다”라고 말한다. 멀쩡하게 병이 낫거나 젊은 축들은 이미 병원을 떠났고, 남아 있는 환자들은 평균 나이가 70세 정도로 고령화해, 일일이 수발을 들어야 할 환자가 더 늘어났다는 것이다. 때문에 소록도병원측은 환자의 고령화 및 중증 환자가 증가해 간호 및 생활 보조 인력 등 수요가 더 늘어났으므로 정원 감축 계획을 재검토해 달라고 최근 보건복지부장관에게 건의한 상태이다.

전국에 있는 한센병 환자는 97년 말 현재 모두 2만2백24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 가운데 7천여 명이 전국 90개 정착촌에서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다. 이들 환자 가운데 공동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노동력이 떨어진 고령 환자가 매년 30~40명씩 소록도에 입원한다. 소록도는 이제 ‘나환자들의 낙원’이 아니라 이들 환자들의 ‘마지막 치료공간’ 또는 나환자 문제를 다루는 정부의 ‘최종적인 기관’으로 남아 있는 셈이다.

소록도병원은 현재 이곳에 거주하는 환자들을 돌보는 지역 병원으로서뿐만이 아니라 한센병이 완치될 때까지 한국 유일의 한센병 전문 치료 병원의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 때문에 정부가 소록도병원에 일률적인 구조 조정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곤란하다는 지적도 많다.

소록도병원 서무과의 한 관계자는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점에서 소록도만 특별 대우를 해 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한센병을 앓고 있는 불구 환자들에게 얼마나 큰 복지 혜택을 줄 것인가는 전적으로 정부의 몫이다”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1월15일 김모임 보건복지부장관이 소록도병원을 방문할 때 그를 수행한 보건복지부 행정관리담당관실 최원영 과장은 ‘소록도병원의 애로 사항을 충분히 청취했다. 조금이라도 더 배려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라는 원론적인 입장을 밝혔다.

여의도의 1.5배에 달하는 ‘사슴섬’ 소록도, 1백40만평 섬 전체가 한센병 환자들의 치료 공간이자 생활 터전인 소록도는 지금 ‘환자들이 피땀 흘려 만든 낙원’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안식처’로 전락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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