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 구역’ 점점 늘고 고기잡이 배 푹푹 준다
  • 李政勳 기자 ()
  • 승인 1999.04.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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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수산부, 일본 근해 조업 축소되자 30% 감척 추진
한겨울 별미에 영덕 대게와 홍게가 있다. 홍게와 영덕 대게는 모양이 비슷한데, 영덕 대게가 훨씬 비싸다. 옛날에는 홍게와 영덕 대게를 경상도 동해안에서 잡았으나 지금은 일본 근해에서 잡고 있다. 홍게와 영덕 대게를 일본 근해에서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 바로 한국 어업이 처한 현실이다.

한·중·일이 위치한 동북아 해역은 캐나다 동쪽의 뉴펀들랜드 해역, 유럽의 도버뱅크 해역과 함께 세계 최고의 어장이다. 이런 자연 조건 때문에 일본 국민은 동물성 단백질의 70%(세계 최고)를 어패류에 의존하게 되었다. 한국인의 어패류 의존도도 매우 높아 50%대에 이르고 있다. 바다는 좁은데 인구가 많은 한·일 양국이 똑같이 어패류를 많이 먹으니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60년대까지 선진 어업술로 ‘무장’한 일본 어민들은 한국 근해로 몰려와 마구잡이로 고기를 잡아 갔다. 이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은 ‘평화선’을 선포하며 대처했다. 65년 양국은 한국 근해에서 어민 충돌을 줄이기 위해 한·일 어업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 따라 연안에서부터 12해리까지는 자국 어민만 조업하고, 나머지 바다에서는 양국 정부 규제 하에 공동 조업하게 되었다.

70년대 중반까지는 공동 조업 수역에서 일본 어민이 고기를 더 많이 잡았으나 80년대에 역전했다. 그러던 차에 미국·러시아·페루 등이 2백 해리 전관(專管) 수역을 주장했다. 그 즈음 그린피스를 비롯한 환경단체들이 원양 유자망에 걸려 죽어가는 물개 모습을 찍어 미국과 유럽의 텔레비전에 방영했다. 이로 인해 원양 어업 선진국인 일본과 한국을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덕분에 원양 어업을 제한하는 2백 해리 배타적 경제수역(EEZ) 주장이 세계적으로 힘을 얻어 82년 유엔 해양법 협약이 제정되었다. 그 무렵 베링 해 쪽 미국 경제 수역에서 쫓겨난 한국과 일본의 명태 원양 트롤 선단이 일본 홋카이도 12해리 외곽으로 모여들면서 일본쪽 공해에서 한·일 어업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본 어민들은 경제수역을 선포해 홋카이도로 몰려든 한국 원양 어선들을 쫓아내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다른 일본 어민들은 제주도 남쪽 수역에서 여전히 많은 고기를 잡고 있었으므로 일본이 경제수역을 선포할 때 한국도 곧바로 경제수역을 선포하면 제주도 남쪽으로 출어하던 일본 어민들의 손해가 커지게 된다. 이러한 이해 관계 때문에 양국 정부는 경제수역 법제화를 뒤로 미루었다. 이러는 사이 어획고 차이가 더욱 커져, 97년 한국 어선은 일본쪽 공해에서 21만t을 잡았으나 일본은 한국쪽 공해에서 11만t을 잡았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 해양법 협약이 94년 발효하자, 한·일 양국도 96년 이 협약에 가입해 경제수역에 관한 법률을 제정 공포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98년 일본은 기존의 한·일 어업협정 파기를 선언했다. 유엔 해양법 협약이 바다 질서를 규정한 새로운 국제법이 되었고 양국 모두 이 협약에 가입했으니, 이 협약에 따라 새 한·일 어업협정을 맺자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었다.

이 협상에서 한국은 중간선을 긋지 말고 양국 어선이 공동 조업하는 바다를 넓게 하자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관철되어 양국은 35해리까지만을 경제 수역으로 하고, 나머지 바다는 양국 어선이 공동 조업하는 공해(중간 수역)로 규정했다. 이러한 타결은 한국으로서는 비교적 손해가 적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일본 근해 조업이 축소된 만큼 출어할 기회가 줄어든 어선들을 감축해야 했다(감척 사업). 해양부는 현재 어업 능력에서 30%를 줄여야 한다고 본다.

감척 사업은 올해 말까지 홋카이도 근해에서 철수키로 한 명태 원양 선단부터 적용된다. 90년 제정된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에 어선 감척 보상 근거를 마련한 해양수산부는 정부 예산으로 어선을 매입해 감척(폐선)하고, 어업허가권을 반납한 선주에게는 보상비를 지원하고 있다. 어민들은 이러한 변화를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다가 새 한·일 어업협정이 발효하자 크게 당황했다. 어업 분야에 불어닥친 정리해고식 구조 조정이 어민들에게 ‘준비된 두려움’을 일으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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