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접공들 망간 중독 공포에 떤다
  • 부산/박병출 (pbc@sisapress.com)
  • 승인 1997.0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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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 지역 용접공들 망간 중독 공포… 파킨슨증 발병 사례도
지난해 여름 포항 선린병원에 30대 환자 한 사람이 긴급 후송되었다. 철강공단 근로자 강 아무개씨(36)가 저녁 식사를 하다가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진 것이다. 하루 수십 명씩 환자를 실어 나르는 포항소방서 119 구급대나 병원 응급실 근무자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흔치 않은 강씨의 증세를 시작으로, 노동계 일각에는 80년대 말~90년대 초의 원진레이온 사태를 연상시키는 직업병 파동이 불어닥치고 있다.

입원 후 실시한 병리 검사에서, 강씨는 소변과 혈액 중의 망간 농도가 유달리 높게 나타났다. 뇌를 자기공명촬영(MRI)한 결과, 중뇌(中腦)와 기저핵 부위가 밝게 관찰되었다. 정상인이라면 어둡게 보여야 할 곳이다.

선린병원 건강관리과장 홍영습 박사가 망간중독증인지 의심하고 있을 무렵, 다시 철강공단 근로자 두 사람이 병원을 찾았다. 세 사람 모두 용접공이라는 사실에 주목해 부산 동아대병원·동국대 포항병원 등의 예방의학팀과 공동 조사를 편 홍박사는, 지난해 12월14일 ‘강씨와 김 아무개(36)·박 아무개(35) 씨 등 3명이 이산화탄소 용접 과정에서 발생하는 흄(fume·가스)에 의해 망간에 중독된 사실을 확인했다’라고 발표했다. 1주일 뒤 이번에는 포항지역 용접공 중 정밀 검진을 신청한 14명 모두에게 같은 진단이 내려졌다. 국내에서는 최초로 집단 망간 중독 실례가 발견된 것이다.

뇌에 망간이 고착되어 이상이 생길 경우 파킨슨병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는 홍박사의 말이 보도되자, 공단 지역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미국 프로 권투 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발병함으로써 유명해진 파킨슨병은, 초기에는 한쪽 발을 끌거나 한쪽 손을 떠는 증상을 보인다. 계속 진행되면 얼굴 근육이 굳어 무표정해지고, 마비된 상태가 아닌데도 모든 수의 동작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 병은 중뇌의 흑질(substantia nigra)부에 있는 도파민 생성 세포가 파괴되면 발병하는데, 엄밀하게는 세포가 파괴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경우를 파킨슨병, 증세는 같아도 원인이 분명한 경우를 파킨슨증이라 구분한다.

국내 용접공 수를 노동계는 30만, 노동부는 16만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이들의 절대 다수는 포항·울산·부산·거제·광양으로 이어지는 ‘동남 공업 벨트’의 조선·자동차·플랜트 사업장에서 일하고 있다. 특히 ‘망간 중독자 ’ 17명 모두가 소속된 포항지역건설노조(위원장 심성오)는 사건이 터지자 기자회견을 열어, 경제 성장의 미명 아래 건설 노동자들의 생명과 건강권을 무방비 상태로 방치했다며 정부를 규탄하고 나섰다.

그러나 지난 1월30일 노동부 산하 직업병 심의위원회(위원장 문영한 산업보건연구원장)는, 격론 끝에 강씨 등 3명에 대한 직업병 판정을 유보했다. 병증과 원인이 불분명하다는 것이 쟁점이었다. 이들이 나타낸 증세가 두통·무기력·성욕 감퇴 등 이른바 ‘고개 숙인 40대’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예견된 결과이기도 했다. 처음 세 사람의 산재요양신청서를 접수한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는, 소속 사업장 확인 날인이 없다는 이유로 서류를 반려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애초부터 ‘일터’만 있고 ‘직장’이 없다. 건설노조는 일용공들이 결성한 지역 노조로, 각 사업장과 단체협약(근로계약)을 통해 인력을 공급하고 있다. 당연히 대기업보다는 중소 하청 업체가 그 대상이다. 얼마 후 찾아가 보면 남아 있는 경우보다 쓰러진 숫자가 훨씬 많다.

노동부는 결국 의료소견서만으로 이들의 요양 신청을 심의하기로 했지만, 지난 12월 열린 2차 심의위원회에서도 세 사람은 산재 요양 승인을 받지 못했다. 대신 다른 한 사람이 망간 중독 직업병 판정을 받았다. 홍박사의 우려가 벌써 현실로 나타나, 강 아무개씨(48)가 ‘망간 중독에 의한 국내 첫 파킨슨증 환자’를 기록한 것이다.특수 검진 결과 두 달 넘게 발표 안해

지난 1월 부산 동아대병원에 입원한 강씨는, 파킨슨병 권위자로 알려진 김재우 신경과장으로부터 확진을 받았다. 느린 동작에 한쪽 발을 끌고 손을 떠는 등 전형적인 파킨슨증이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태였다. 강씨는 경남 진주시의 한 중소기업에서 2년간 용접공으로 일했고, 그전에는 8년간 시간제 근무로 용접 일을 해왔다. 강씨에 이어 부산 한 자동차 회사의 용접공 박 아무개씨(47)가 또 포항 선린병원에서 파킨슨증 진단을 받자, 용접 노동자들은 ‘혹시 나도? ’하는 공포에 휩싸였다.

혼란도 커지고 있다. 홍영습 박사가 망간 중독에 따른 파킨슨병 진행을 경고한 것과 달리, 첫 환자를 발견한 김재우 박사는 ‘망간이 뇌에 흡착되어 파킨슨증으로 진행되는 것은 극히 드문 사례’라고 상반된 의견을 밝혔기 때문이다. 노동부는 포항 지역 역학 조사를 맡기고 각 지방 노동사무소에 일선 사업장의 근로 환경 위법 사실을 단속하라고 지시했을 뿐,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뒤늦게 실시한 특수 검진마저 두 달이 가깝도록 결과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 포항 건설노조 관계자는 “12월 말 조합원 중 5백50여 명이 검진을 받아 망간 중독이 의심되는 80명 정도가 자기공명촬영을 마쳤는데, 병원들이 이유 없이 발표를 미루고 있다”라며 외압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병원 관계자들은, 진단 소견은 이미 정리했지만 상태의 경중을 나타낼 기준이 없어 개인별 판정을 내리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의학계 일부에서는 이번 파문의 책임을 언론에 묻고 있다. 학계 보고용 자료를 입수한 한 신문이 특종인 양 앞서 보도하면서 ‘망간 중독’을 기정사실화해, 의학적 판단을 제시할 기회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는 89년 용접봉 제조업체 근로자 4명이 망간 중독 판정을 받은 바 있다.

혼란의 와중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쪽은 일용 용접공들이다. 일거리를 따라 이리저리 옮겨다니므로, 설령 직업병 판정을 받는다 해도 치료나 보상을 할 주체가 없다. 재해 사업장을 밝혀내기도 불가능하다. 그나마 지역 건설노조가 결성된 곳은 서울·인천·대전·성남·안산·포항 등 여섯 곳뿐이다.

노동부와 근로복지공단은 광부들의 진폐증 치료에 적용한 방식을 원용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보상이나 치료비는 산재기금에서 지출하되, 처리 절차는 마지막 근무한 사업장에 맡긴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사업주들은 벌써부터 경력이 오랜 용접공을 기피하고 있다. 노동부 역시 채용할 때 실시하는 건강 검진을 강화해 이들을 철저히 가려낼 계획이다. 용접공들은 ‘굶어 죽으나, 병들어 죽으나’라는 냉소적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용접 작업 중에는 음식물은 물론 물을 마시는 것조차 금기로 되어 있지만, 대다수 사업장에서 용접공들은 작업장 바닥에 앉아 식사를 해결하고 있다. ‘작업 종료 직후 샤워’도, 이들에게는 책에나 나오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2시간용으로 제작된 방진 마스크는 하루 2~3개 지급이 고작이다. 조선소 등의 밀폐된 공간에서 작업하다 보면, 용접 열기에 숨이 막혀 그것마저 벗어던지기 일쑤다. 이들은 하루 평균 10시간 동안 망간이 섞인 15kg짜리 용접봉 4롤 이상을 녹여낸다. 이같이 열악한 근로 여건을 개선하는 ‘파킨슨증 예방 대책’에 앞서, ‘파킨슨증 공포증 치료책’ 마련은 더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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