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 또 납치…수영계에 뭔가 구린 데가 있다
  • 高濟奎 기자 ()
  • 승인 2000.07.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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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진 파문 이어 이혜화 선수 재납치 사건 발생…연맹 파벌 다툼 치열
전국가대표 수영선수 이혜화양(16)이 6월 6일 또다시 납치되었다. 이양은 지난해 3월 태릉선수촌 정문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고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조사를 마친 뒤에 선수촌 생활에 적응하기 어려워 이선수가 꾸민 자작극으로 일단락지었다. 하지만 지난해 5월27일 KBS가 방영한 <추적 60분>에서 이양은 자작극을 뒤집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했다. “동서울 터미널에서 납치당해 청주까지 끌려갔다. 납치범들은 ‘ㅇ감독이 수영계를 말아먹는다. 나는 수영계 잘되는 꼴을 못 본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경찰에 수영계 비리를 전하라 했고, 여의치 않으면 자작극이라고 진술하라고 시켰다. 납치범들은 풀어주면서 ‘동규처럼 죽고 싶지 않으면 말 잘 들어라’고 협박했다.”

납치범들이 협박하며 들먹인 단동규군(19) 은 배영 200m에서 두각을 나타낸 선수다. 그는 지난해 1월25일 오후 6시20분 아무 연고 없는 서울 강서구 ㄱ아파트 앞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단군은 숨지기 1시간 전에 친구 호출기에 울먹이며 “나 동규. 무서워서 나 못살겠다. 이상한데 쫓아다니고…잘 있어”라는 메시지를 남겼다. 경찰은 부검 결과 별다른 타살 혐의점이 나타나지 않자 투신 자살로 수사를 종결했다. 유가족은 단군이 자살할 이유가 없다며 경찰 발표에 반발했다.

방송이 나간 뒤 당시 대한수영연맹 박동호 회장(48)이 직접 이혜화양 납치 사건 재수사를 촉구했다. 경찰도 재수사에 나섰으나 이양이 진술을 번복하고 뚜렷한 외상이 없어 자작극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양은 이 사건으로 ‘3개월 자격 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혜화양 어머니 “수영계 내부에 범인 있다”

이양은 징계 기간에도 매일 6시간씩 강도 높게 훈련했다. 동료들은 “그때 혜화는 흔들리지 않고 열심히 운동했다”라고 말했다. 이양은 징계 기간이던 7월8일 비등록 선수로 출전한 ‘대구시장배 수영대회’에서 대회 신기록을 내며 3관왕을 차지했다. ‘수영을 하기 싫어서 자작극을 꾸몄다’는 선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열정을 보였다. 지난해 10월에 열린 전국체전에서도 800m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재기했다.

그런 이양이 또다시 납치 사건에 휘말린 것이다. 이양은 6월6일 오후 12시40분께 대구 대명동 ㄷ스포츠센터에서 괴한 2명에게 납치되었다가 6시간 뒤 앞산 부근에서 풀려났다. 박윤경 코치(31)는 이양을 발견했을 때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코피를 많이 흘려 상의가 거의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온몸에 멍이 들었고, 복부에는 구두 발자국도 남아 있었다. 목 주변은 손으로 심하게 조인 듯이 부어 있었다.” 또한 이양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기억 상실 증상을 보여 경북대병원에 입원해 치료받고 있다. 경북대 강병조 정신과장은 “혜화양은 기억 상실증으로 최근 2∼3년 동안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자기가 수영을 했다는 사실도 간혹 기억하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납치 사건과 달리 이번에는 선수 생활을 위협받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어머니 송씨는 “자작극이 아니다. 혜화가 정신적 충격이 심하다. 더 운동하기가 힘들지도 모른다”라고 말했다.

대구남부경찰서는 대구수영연맹 관계자·감독·코치 들을 불러 조사했으나 용의자나 단서를 찾지는 못했다. 이기완 형사계장은 “사건 발생 다음날 본인 진술을 받았지만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직까지 결정적인 목격자가 없다”라고 밝혔다. 이양 가족은 이번 사건 역시 지난해 납치 사건처럼 수영계 내부에 범인이 있다고 믿고 있다. 이번에도 납치범들이 “왜 수영을 그만두지 않느냐”라며 이양을 폭행했다고 전했다. 또한 어머니 송씨는 “4월9일에도 다섯 남자가 조깅하던 혜화를 위협했다”라고 말했다. 위협만 하고 폭행은 하지 않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송씨가 수영계 내부에 혐의점을 두는 이유는 범인들이 수영계를 훤히 꿰뚫고 있고, 지난해 납치 사건이 석연치 않게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또 수영연맹 ㄱ씨가 송씨에게 “자작극이라고 말하면 가벼운 징계를 내리겠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연맹 관계자는 지난해 이혜화양 납치 사건 때 파벌간 충성 경쟁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국가대표 선발까지 좌지우지

이 말이 사실이라면 이번 사건 역시 수영계 내부 파벌·반목과 연관된다. 이혜화양 사건을 마무리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ㄱ씨는대한수영연맹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로 알려져 있다. 수영연맹 관계자는 “ㄱ씨와 ㄴ씨 인맥이 7∼8년 동안 수영계를 장악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전임 박동호 회장이 취임할 때 수영계 인맥을 ‘집행부에 적극적임·무조건 반대·활용 가치가 있음’과 같이 분류한 살생부를 만들어 회장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ㄱ씨는 지난해 7월 박동호 회장과 함께 수익사업 비리를 저질렀다는 의혹을 사 수영연맹에서 물러났다.

수영연맹은 지난해 공금 유용 사건이 발생해 내분을 겪었고, 올 2월 심홍택 회장이 취임했다. 심회장 취임과 함께 수영계 실력자인 ㄱ씨는 슬그머니 부회장에 취임했다. ㄱ씨가 복귀하면서 내부 인사에 간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내부 진통과 반발로 5월에 ㄱ씨는 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아직까지 지속되고 있다. 수영연맹 이사진이 그의 측근들로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수영계에는 국가대표 선발과 관련된 잡음까지 잇따랐다. 지난 4월 한국이 싱크로나이즈 올림픽 예선대회에서 듀엣 부문만 출전권을 확보하자 국내 1인자인 장윤경 선수 파트너를 정하면서 파벌간 다툼이 일어났다. 한국 싱크로계의 양대 산맥은 ㄷ씨와 ㄹ씨.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들은 자신들의 수제자를 대표팀에 합류시키고자 했다. 결국 선발전이 자기 사람 심기를 위한 쇼로 그칠 수 있다는 비난이 거세지자 선발전은 취소되었다. 이름을 밝히지 말아 달라는 현역 수영 코치는 “싱크로 부문뿐 아니라 수영 국가대표 선발 기준은 없다고 보면 타당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준 자체가 정해지지 않아 대회 때마다 선발 기준이 바뀐다고 했다. 예를 들면 2개 대회를 합친 기록으로 대표를 선발하기도 하고, 특정 대회 기록만 기준으로 삼기도 하며, 가장 좋은 기록을 보유한 선수를 선발하기도 한다. 기준이 수시로 바뀌기 때문에 연맹의 입김에 따라 선수 선발이 좌지우지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시드니올림픽 국가대표 추가 선발 때도 잡음이 있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수영연맹 관계자는 ‘장희진 파문’ 역시 이런 잡음과 연관된다고 밝혔다. 장선수(서일중·2년)는 기말고사 때문에 입촌하지 않고 훈련할 수 있도록 수영연맹에 요청했다. 수영연맹은 5월23일 특정 선수만 배려할 수 없다며 징계했다.

하지만 연맹은 이미 장선수가 입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한 선수촌에 입촌하지 않고 훈련을 받아 올림픽에 나간 전례도 있었다. 장선수는 입촌한 뒤 하루가 지나 귀가 허락이 없자 선수촌을 이탈했다. 부모는 코치와 상의한 뒤 ‘수업을 빠지면서까지 입촌해서 훈련할 수 없다. 국가대표 자격을 포기하겠다’고 연맹에 전달했다. 연맹은 부모·선수에게 소명할 기회도 주지 않은 채 대표팀 무단 이탈로 규정해, 올림픽 대표 자격을 박탈하고 1년간 대표팀 및 상비군 선발에서 제외하는 중징계를 내렸다. 장선수 부모는 신문을 보고서야 징계 사실을 알았다. 파문이 확산되자 수영연맹의 상급단체인 대한체육회가 나서 ‘연맹이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할 수 없다’며 중재에 나섰다. 일단 대한체육회 차원에서 장선수가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을 보장한 상태다. 장선수는 기말 고사를 치르고 선수촌에 입촌해서 훈련할 계획이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수영연맹은 아직까지 장선수 징계를 철회하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해 수영 관계자는 “충분히 대화로 풀 수 있었는데도 강경하게 밀어붙인 데는 어떤 의도가 있지 않았겠느냐”라고 말했다. ‘자기 사람 심기’ 내지는 ‘해외파 길들이기’라는 것이다. 장선수는 미국에서 기본기를 다져 국내파 조희연의 시대를 마감시킨 해외파다.

이처럼 지난해부터 계속 불거진 수영계 파문을 선수 개개인의 문제라고 보기는 힘들다. 수영계 내부의 고질적인 갈등과 파벌 싸움이 문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 주요 관계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어 진상은 가려져 있으나, 어린 선수들을 짓밟는 추악한 ‘그 무엇’이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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