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사랑’ 엿보는 동성애 만화 기승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1996.1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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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 만화’ 청소년 사이에 봇물… “일본 저질 문화 유입” “자연스런 추세” 찬반 엇갈려
“언제까지 내가 널 지켜줄게”(<남자의 향기>), “오랫동안 기다려 왔어. 너와 한몸이 되고 싶어”(<브론즈>). 연인 사이의 사랑 고백이 아니다. 요즘 청소년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이른바 ‘동성애 만화’의 한 대목이다. 예로 든 대사를 읊는 당사자나 듣는 상대가 모두 남자이다.

동성애 만화가 국내에 널리 퍼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들어서이다. 아이들 표현대로 ‘어른들만 모르는 또 하나의 비밀’인 셈이다. 이들은 동성애 만화를 ‘Y물’ 또는 ‘H물’이라는 은어로 부른다. Y란 일본어 ‘야오이’의 약칭이다. 야마나시(주제 없음)·오치나시(소재 없음)·이미나시(의미 없음)의 머리 글자를 딴 이 용어는, 아마추어 동인지에 실린 패러디 만화를 일컫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러나 지금은 남성끼리의 연애 행위를 그린 만화에 대한 총칭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H는 ‘변태’의 일본식 발음인 ‘헨타이’의 머리 글자를 딴 것인데, 일부에서는 단순히 ‘호모’의 약칭으로 받아들여 쓰고 있다.

용어에서 알 수 있듯 이들 만화는 일본에서 제작·수입한 것이 대부분이다. 80년대 중반 본격 등장한 일본의 동성애 만화는 90년대 들어 전성기를 맞고 있다. 동성애 만화가 꾸준히 유입되면서 국내 유명 만화가들까지 여기 가세하는 움직임이 보이자 YWCA 만화 모니터 모임은 95년 말 보고서에서 이미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그 기세가 수그러들기는커녕 최근 동성애 만화 수입이 오히려 급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분석된다. 하나는 일본 만화를 불법 복제·출판하는 업자들이 몇 년 안에 있을 것이 확실해 보이는 일본 만화에 대한 시장 개방을 앞두고 마지막 기세를 올리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간륜)는 “연말이 돼야 정확한 통계가 나오겠지만 올들어 일본 만화 불법 복제물이 지난해에 비해 배 이상 늘어난 것으로 추산된다”라고 밝혔다. 지난해 간륜이 심의한 일본 만화 복제물은 4백여 건이었다. 또 하나는 지난 2∼3년간 동성애 만화 도입기를 거치며 청소년들의 입맛이 이미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동성애 만화 시리즈를 출판하고 있는 ㅇ사 관계자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시리즈도 가능한 것이다. 다음 권이 언제 나오느냐고 재촉 전화를 걸어오는 독자도 많다”라고 강조했다.

수요층이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청소년들을 통해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ㅂ여고 2학년 ㅊ양은 “처음 Y물을 접했던 중 3때만 해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남자와 여자가 등장하는 ‘정상적’인 러브 스토리가 오히려 밋밋하게 느껴진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만화를 즐기는 아이라면 십중팔구 동성애 만화도 함께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어림잡아 학급에서 반수 이상이 동성애 만화를 즐겨 보며, 그 중 대여섯 명은 마니아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들 마니아는 서울 종로6가 서적 도매상 골목, 홍익대 앞 서점 등을 정기적으로 돌며 신간을 구입하거나 전문 브로커 또는 일본 여행자 등 각종 루트를 통해 일본 만화 원본을 입수하기도 한다. PC 통신이나 동호회를 통해 최신 정보를 교환하는 것은 필수이다.

동성애 만화를 보는 시각은 찬반 양 갈래이다. 반대론자들은 이들 만화로 인해 일본의 저질 성 문화가 여과되지 않고 유입될 염려가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동성애’라는 소재 자체가 진부해지면서 극단적이고 자극적인 구성과 표현으로 이를 상쇄하려는 경향이 나타남에 따라 우려는 더 커지고 있다. 강간·집단 성폭행·소아 성애 등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비정상적인 성행위가 동성애 만화에서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많은 고정 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오자키 미나미의 만화 <브론즈>를 보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해 온 (남자) 동생에게 복수하기 위해 형이 동생의 (남자) 애인을 납치해 성폭행하는 내용이 나온다. 열 살도 채 안 된 남자 아이를 숙부와 그의 친구인 남색가가 차례로 강간하는 내용(<바람과 나무의 시>), 가슴이 유난히 큰 ‘젖소 소녀’가 등장해 여자 친구·남자 교사 등과 닥치는 대로 성 관계를 맺는 내용(<핸>)도 있다.

또 한 가지 동성애 만화가 비판받는 것은 청소년들의 성(性) 정체성 확립에 악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양창순 박사(서울백제병원 신경정신과)는 청소년기는 특히 모방 심리가 강한 때이므로, 동성에서 이성으로 관심이 자연스럽게 이행해야 할 이 시기에 동성애를 다룬 대중 매체에 집중 노출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드래곤 볼>(국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일본 무술 만화)을 본다고 모두 산으로 수련하러 들어가더냐’라고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앞에서 소개한 ㅊ양 또한 “아무리 Y물 마니아라도 현실 분별력은 있다. 만화 보고 동성 연애를 해 보겠다는 친구를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다”라고 잘라 말한다. 1주일에 10여 권씩 새로 쏟아져나와

그러나 이들 만화가 동성애에 대한 관심을 넘어 지지까지 불러일으키는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ㅊ양은 Y물을 보기 전까지는 동성애에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것이 현실에 기반을 두지 않은 지지라는 사실이다. 만화 평론가 박인하씨는 현재 나와 있는 동성애 만화 거개가 ‘삶’(리얼리티)이 아닌 ‘포장’(이미지)만을 팔고 있다고 지적한다. 대부분의 동성애 만화에는 ‘꽃 미남’‘꽃 미녀’들이 대거 등장한다. 못생기거나 나이가 많은 주인공을 내세운 만화는 예외 없이 외면당한다. 이들 선남선녀가 펼치는 화려한 애정 행각에 가려, 현실 속에서 성적 소수로서 동성애자들이 받는 고통과 고뇌는 오히려 묻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동성애 만화를 옹호하는 이들도 있다. PC 통신을 통해 적극적인 만화 비평 활동을 펴고 있는 애니메이트 동호회·만화창작 동호회가 대표적인 집단이다. 이들은 텔레비전과 영화가 동성애를 다룬 지 이미 오래인데 만화에만 비난 여론을 퍼붓는 것은 형평에 어긋날 뿐더러 만화를 저급 문화로 여기는 편견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대중 예술의 하나인 만화가 사회의 뜨거운 관심사를 담아내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관심이 극단으로 편중돼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옹호론자들도 수긍한다. 관련 업계에서는 최근 유통되는 만화, 그 중에서도 여학생들이 즐겨 보는 순정 만화(일본 복제품)의 경우 90% 가까이가 동성애 만화라고 추정하고 있다. 1주일 평균 10여 권씩 동성애 만화가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동성애를 더 이상 낯설지 않은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사실이다. YMCA 이명화 청소년상담실장은 “에이즈가 화제일 때 에이즈에 대한 문의가 부쩍 늘듯 최근에는 동성애로 고민하는 사례가 많아졌다”라며, 한 달에 10건꼴로 상담 전화가 걸려온다고 밝혔다. 동성애 만화가 억압된 성적 욕구를 해소하는 출구 기능을 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남학생에 비해 ‘포르노’를 접할 기회가 적은 여학생들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는 것이다. 동성애를 작품에 본격적으로 등장시킨 ‘국내 작가 1호’ 이정애씨는 한 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동성애 만화에) 남자 주인공이 많은 이유는 독자들이 여성이고, 그들이 남성이 나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여자도 남자의 육체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즐길 권리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배경을 충분히 감안한다 해도, 전체 만화 가운데 동성애 만화가 차지하는 현재의 비중은 분명 비정상적이다. YWCA 만화 모니터 모임 강미나씨는 만화계에 입문하려는 신인 작가 가운데 90% 가까이가 동성애 소재 작품을 출품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불법 복제가 가능한 일본 만화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결국 근본적인 대안은 만화 시장을 하루빨리 개방하되 철저한 등급제(아동용·청소년용·성인용)를 동시 적용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 만화 평론가 박인하씨의 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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