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베기 현장 르포]들녘은 한숨 풍년
  • 담양·영광/羅權一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1998.11.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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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베기 현장 르포/농민들, 호우·태풍 피해에 일손 부족 겹쳐 ‘허덕’
올해 전남 지역에서 첫 추곡 수매가 이루어진 지난 10월20일 오전. 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천 공판장에는 이른 아침부터 경운기와 트럭에 벼를 싣고 달려온 농민들이 줄을 이었다.

이 날 40㎏ 들이 27가마를 모두 1등급 판정(가마당 5만2천4백70원)을 받고 창평농협 직원으로부터 돈을 받아 쥔 박상술씨(68·창평면 일산리)는 “원래 받을 돈은 1백41만7천원인데 올해 초에 농협에서 받은 선금을 떼고 나니 84만원밖에 안된다”라며 몇번이고 아쉬운 듯 돈을 세었다. 박씨처럼 정부와 약정 수매 계약을 한 농민들은 올해 3월 쌀 40㎏짜리 1가마당 2만1천원씩 미리 받았기 때문에 이 돈을 제한 나머지를 수매 현장에서 받은 것이다.

박씨는 또 “태풍에 벼가 다 쓰러져 올해 같으면 농사 안 짓겠다는 사람이 많다. 작년 같으면 1마지기(2백평)에 40㎏짜리 10가마가 넘게 나왔는데, 올해는 쓸 만한 것이 5∼6가마밖에 안된다. 논바닥에 깔리고 썩은 벼가 많다”라고 안타까워했다. 추곡 수매 현장에서 등급 판정을 기다리던 구만회씨(62·창평면 오강리)도 “벼가 다 쓰러지고, 논에 파묻힌 나락이 많다. 나락이 물속에 있다 보니 때가 끼어서 빛깔이 변해 그렇지 속까지 검은 것은 아닌데. 등급 판정하는 사람들이 그 속을 알아주어야 할 텐데”라고 연신 되뇌며 조바심을 냈다. 박씨나 구씨처럼 약정 수매 계약을 한 농민은 그나마 정부가 수매해 주기 때문에 다행인 편이다.

“남는 것 없다” 수확 포기하기도

농림부는 약정 수매를 계약한 농가들의 경우 벼가 물에 잠겨 싹이 트거나 빛깔이 시커멓게 변했어도 잠정 등외 품목(가마당 3만9천9백50원)으로 수매하고 있다. 그러나 농협과 약정을 체결하지 않은 농민들의 경우 집중 호우와 태풍에 쓰러진 벼를 수확하지 않고 내버려둔 사례도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워낙 일손이 부족한데다 콤바인 일당이 올라 수확해도 남는 것이 별로 없고, 오랫동안 물에 젖어 싹이 난 벼는 도정 과정에서 부서지거나 싸라기가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전국적으로 재배한 벼의 28%나 쓰러진데다 전남 지역 수매 현장에서는 예년 같으면 95∼97%를 오르내리던 1등급 판정이 올해는 92∼95% 대로 낮아지는 등 전체적으로 1등급 판정 비율이 줄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정부가 예상하는 올해 전체 수확량도 애초 기대했던 3천5백64만석을 밑돌 것으로 예상된다.

10월20일 오후. 추곡 수매가 이루어진 담양 창평면 인근 대전면과 수북면에는 군부대 인력까지 동원되어 태풍과 집중 호우로 쓰러진 벼를 낫으로 베고 탈곡하는 막바지 수확이 한창이었다. 장병들과 함께 벼를 베던 최영자 할머니(73·대전면 행성리)는 “혼자 논 12마지기를 지었는데 태풍에 다 쓰러져 얼마나 갑갑하던지 아예 하나도 안 베고 그만두려고 했다. 군인들이 이렇게 와서 도와주니 고맙기 이를 데 없다”라고 말했다. 부대원 40명을 이끌고 최씨 할머니 논 벼베기에 나선 박지호 대위(32·황금박쥐부대)는 “농촌에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뿐이어서 일할 사람이 없다. 장병들이 오니까 서로 도와달라고 아우성인데, 이렇게 도와드리지 않았으면 어떻게 쌀을 수확했을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벼베기에는 공공 근로사업자들도 참여해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김인기씨(60·대전면 행석리)는 “무릎까지 푹푹 들어가는 진창에서 벼를 베고 있다. 콤바인도 못 들어가는 논에서 쓰러진 벼를 베고 묶어 논 밖으로 내놓는데 여간 힘들지 않다”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대전면의 경우 심은 벼의 73%가 쓰러져 대부분 낫으로 벼를 베야 할 상황이다. 이렇듯 10월 한 달 동안 호남 들녘에서는 민·관·군이 함께 쌀을 한톨이라도 더 수확하려는 ‘벼베기 총력전’이 벌어지고 있다. 공무원들, 벼베기 현장으로 매일 출근

10월22일 현재 전남도청이 집계한 벼베기 동원 인력은 연 3백53만1천명. 전남도의 벼베기는 현재 90%를 겨우 넘긴 실정이다. 때문에 시·군 지역 농정과·농산과 등 농업 관련 부서 공무원들은 날마다 해가 뜨면 벼베기 현장으로 출근하다시피 하고 있다. 전남 고흥군청 농정과의 한 관계자는 “고흥군청 지역 공무원 9백명이 거의 매일 벼베기에 동원되고 있다. 밀린 업무는 저녁에 일을 끝내고 군청에 돌아와 처리한다. 추석 연휴 때 하루 쉬고 10월 한 달 동안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현재 전남 지역에서 벼베기 실적이 가장 낮은 지역은 고흥군과 영광군인데, 고흥군의 경우 물이 잘 빠지지 않는 간척지가 5천여 ㏊가 넘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10월20일에야 겨우 간척지 논에 콤바인이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현재 군인과 공무원 들이 매일 투입되어 벼베기를 하고 있다. 영광군도 간척지가 많아 벼베기 작업이 더디다. 지난 10월20일 불갑면에서 전남 도경 경찰들의 벼베기 돕기를 둘러보던 김봉열 영광군수는 “간척지가 많은 염산·백수 등 서부 지역 7개 면은 이제야 겨우 물이 빠져 콤바인이 들어갈 수 있다. 또 비가 내리기 전에 전부 수확해야 하는데 콤바인이 부족하다”라고 걱정했다.

현재 전남 지역에서 콤바인 사용료는 1마지기당 3만∼4만5천원 선으로 지난해 2만∼3만원에 비해 많이 오른데다, 쓰러진 벼를 콤바인으로 수확할 경우 시간이 2∼3배 이상 걸리고 기계 고장이 잦아 전남 지역은 콤바인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그래도 전남도는 벼베기가 일찍 끝난 경기도·강원도에서 콤바인 81대를 빌려왔다. 전남도는 내년부터는 태풍이 불면 쓰러지기 쉬운 동진벼 대신 일미벼나 대산벼를 심도록 농민들에게 권장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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