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가 주인인 '꿈의 병원'생긴다
  • 宋 俊 기자 ()
  • 승인 1998.11.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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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사랑병원, 환자가 주인인 의료 체계 구축 ‘꿈의 진료’
멀리할수록 좋은 것이 있다. 병원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통념을 거부하고 나선 병원이 있다. ‘주민의 병원, 생활 속의 병원, 꿈의 병원’을 표방한 인천사랑병원(원장 이왕준)이다.

‘병원 주인은 (의사가 아니라) 환자와 지역 주민이고, 병원은 고장 난 신체를 고치는 재생 공장이기 이전에 지역의 보건 상태를 총체적으로 관리하는 레이더 기지여야 한다’는 것이 이 병원의 주장이다. 한국의 의료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이 난데없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생경하다 못해 엉뚱하기까지 하다. 삐딱한 눈길로 보자면, 11월 말 개업을 앞둔 병원의 홍보성 구호로 읽히기도 한다.

그렇지만 인천사랑병원의 독특한 몇 가지 특징과, 개업하기까지 겪은 우여 곡절은 ‘결백’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우선 이 병원에는 문턱이 없다. 옛 인천세광병원을 인수한 뒤 50일 동안 보수 공사를 했는데 수천만원을 들인 공사의 절반 이상이 문턱을 없애는 데 투자되었다.

70년대 후반 인천 주안역 앞 대로변에 지어진 이 건물의 애초 용도는 여관이었다. 유난히 문턱이 많은 건물이었다. 방과 복도·계단은 물론이고, 화장실·소변기·양변기까지도 한 뼘 남짓 두툼한 디딤돌로 문턱을 삼았을 정도였다. “돈벌이만 따졌으면 굳이 보수할 필요가 없었다. 문턱을 없앤 것은 상징적 의미가 더 크다. 의사의 권위주의, 직원의 불친절 같은 추상적인 문턱까지도 모두 걷어낸다는 선언이다”라고 이왕준 원장(34)은 말했다.

병세·비용 등 자세히 설명해 ‘눈높이 치료’

이 병원이 내건 공약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자승 자박이 우려될 정도다. 첫째 ‘눈높이 치료’다. 의학 지식과 전문 용어를 환자(또는 그 가족) 수준에 맞추어 개방한다. 병세와 진료 내역, 치료법, 비용 따위를 자세히 설명한다. 단순히 친절 차원이 아니다. 환자와 가족이 많이 알수록 예방 효과와 건강 수준이 높아지리라는 취지에서다.

전화 서비스도 강조된다. 잠시 퇴원했거나 입원을 앞둔 환자의 병세를 전화로 점검해 불의의 사태를 막자는 방책이다. 진료 예약일 전날 확인 전화도 할 계획이다. 담당 의사의 직통 전화를 개방해, 환자가 수시로 전화 문의를 할 수 있다. 인터넷을 이용한 상담도 가능하다.

사랑병원 로비에는 여느 병원에 없는 공간이 하나 있다. 무대다. 환자·가족·의료진이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매달 조촐하게 공연·잔치 등을 여는 공간이다. 유쾌한 환경이 스트레스를 줄이고 치료 효과를 높인다는 점에 착안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그 다음이다. 이왕준 원장에 따르면, 사랑병원은 왜곡된 한국 의료 시스템을 개혁하는 실험 모델이다. 이 실험을 위해 사랑병원은 여러 가지 전문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이 프로그램들은 사랑병원이 왜 ‘꿈의 병원’인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병원의 출범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랑병원의 주요 멤버는 <청년 의사> 출신 30대 중반 전문의들이다. <청년 의사>는 진보적인 의사·의대생 들이 모여 92년 6월 창간한 의료 전문지다. 지속적으로 의사·병원·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대안을 소개하는 것이 <청년 의사>의 발행 목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꿈의 병원’을 건설하자는 욕구가 생겨났다. 그렇지만 병원 설립은 여간 규모가 큰 사업이 아니었다. 잠자고 있던 ‘꿈의 병원’ 청사진을 현실화해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지난해 말의 외환 위기였다. 연이은 병원 부도 사태가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세광병원과 <청년 의사>는 지난봄 운명처럼 만났다.

진로그룹 소속이던 세광병원이 모기업 부도 여파로 무너진 것은 지난 5월. 1순위 채권자로서 3백여 잔류 직원이 전원 고용 승계를 전제로 병원을 인수할 제3자를 찾고 있었다. 이들은 거개가 노조원이었고, 세광병원 노조는 막강한 조직력으로 오래 전부터 명성을 떨쳐 왔다.

여러 사람이 군침을 흘렸지만 눈엣가시 같은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인 경우는 없었다. <청년 의사> 팀은 달랐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의사와 노조가 함께 경영하는 노사 합의식 꿈의 병원을 제안한 것이다. 이 제안은, 의사와 직원 사이의 갈등이 다른 병원 노조의 첫 번째 이슈인 점을 감안하면 좋은 비교가 된다. 여러 차례 교섭 끝에 부채 47억원을 떠안는 조건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병원 땅값에도 못 미치는 파격적 금액이었다.

노조는 퇴직금과 밀린 임금(총 부채의 60%)을 3년간 유예하고, 상여금을 1년간 동결하며, 임금도 종전의 절반으로 줄인다는 강퍅한 조건을 수용했다. 3년 무쟁의 선언도 덧붙였다. <청년 의사> 팀 역시 병원을 살리기 위해 봉급을 다른 병원의 60∼70% 선에서 동결하겠다고 약속했다. 원장을 포함해 의사 전원이 기꺼이 응급실 야간 당직을 서겠다는 비장한 결의도 했다.

지역 사회의 의료 보건 센터인 ‘열린 병원’

10월 초 병원 보수 공사가 시작되었고, 한켠에서는 새 식구들이 머리를 맞대고 꿈의 병원 프로그램을 학습했다. 프로그램의 골자는 대략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열린 병원’이다. 한국의 의료 시스템은 지독하게 폐쇄적이다. 병원간, 혹은 의사 간에 시설·장비를 공동 활용하거나 협진을 통해 복합 증세를 효과적으로 치료하는 체제가 전무하다시피 하다.

제살 깎기식 무한 경쟁 양상도 지적된다. 개인 병원(1차 진료 기관)과 중형(2차). 대형(3차) 병원이 환자를 유치하느라 무차별 경쟁을 벌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무리하게 비싼 장비를 도입하게 되었고, 결국 IMF 체제 이후 병원 부도 사태라는 결과를 낳았다. 과잉 진료는 물론이고 교통 사고 환자를 유치하기 위한 환자 쟁탈전 따위가 그 폐해로 나타났다. 심지어 큰 병원에 환자를 인계할 때 경쟁을 의식해 동네에서 먼 곳을 추천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꿈의 병원’은 이같은 폐단을 지양한다. 개인 병원과 종합 병원을 엮는 협진 체제가 그 대안이다. 고가 장비를 필요로 하는 검진은 큰 병원에 외주를 주고, 반대로 경미한 환자는 개원의(개인 병원) 쪽으로 보내 준다. 분야에 따라 개원의와 ‘협진 의사’ 계약을 맺어 서로 도울 수도 있다.

의료 기기를 공동 이용하는 방안도 강구한다. 급할 때는 앰뷸런스를 무료로 대여해 준다는 원칙도 정했다. 환자 인계 경로를 분명하게 (해당 병원의 해당 의사에게) 체크해 주는 것도 ‘꿈의 병원’의사의 의무다(현행법상 경비와 수익을 나누는 기준이나 비율이 모호한 것이 걸림돌이기는 하다).

자문위원단 구상도 협진의 한 방편이다. 여러 종합 병원 교수를 자문위원으로 위촉해 진료 협조를 받고 유사시에는 환자를 직접 인계해 주는 식이다. 개원의 자문위원·시민운동 단체 자문위원 위촉도 구상하고 있다.

환자와도 열린 관계를 맺는다. 이를테면 당뇨 클럽·고혈압 클럽처럼 환자·보호자 모임을 활성화해 관련 자료 및 정보를 지원하는 식이다.

사랑병원의 두 번째 요점은 ‘지역 주민의 병원’이다. 병원을 ‘치료 공장’이 아니라 지역 보건의 전진 기지로 삼는 것이다. 눈높이 치료 등을 통해 주민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협진 개원의 등과 연계해 주치의 시스템(예:동네별 담당 의사)을 운용할 수도 있다. 정기 건강 강좌, 학교·경로당·복지회관 대상 무료 진료 등으로 지역 사회의 보건 의료 센터 노릇을 맡는 것도 시급한 과제다.

“의사는 ‘의료 큐레이터’이다”

의료 외적인 측면에서 환자를 돕는 사회복지사 제도도 고려 대상이다. 예컨대 산업 재해 판정을 정당하게 받도록 행정적인 도움을 주거나 종교 단체 등과 연계해 재정 지원을 알선하는 사회복지사를 의료 체제의 외곽에 포진한다는 발상이다.

마지막 모토는 ‘의료 정의 실현’이다. 이익 추구보다 최선의 의료 행위를 앞세우는 자세다. 합리 경영은 기본이다. 이중 장부 따위를 감시하는 ‘행정 이사’로 전 노조위원장을 임명한 것도 한 예다. 시민단체의 감시·비판 기능을 도입한 사외 이사제도 검토 중이다. 의료의 공공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꿈의 병원’의 경쟁력을 극대화하는 길이라고 이들은 굳게 믿는다.

“의사는 의료 큐레이터다. 최선의 진료 방법을 설계하는 것이다. 치료의 주도권은 환자에게 주어져야 한다”라고 이왕준 원장은 말한다. 이원장에게 사랑병원의 공약은 이중의 부담이다. 주민과의 약속도 약속이거니와, 한국 의료의 문제점과 선배 의사들의 과오를 겁없이 질타하던 <청년 의사> 시절의 정당성 여부가 꿈의 병원 성과에 따라 판가름 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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