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팔로’ 찾아 지옥엔들 못가랴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4.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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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 연쇄 살인 사건 200일째…경찰, 자존심 걸고 피 말리는 추적
서울 강남경찰서 강력1반 박상호 형사(46)는 살인 사건 해결사다. 남들은 살인 사건 두세 건 ‘구경하기’도 힘들다는데, 그는 살인 사건만 20건 가까이 해결한 민완 경찰이다. 그가 속한 강력반은 지난해 서울경창청장이 수여한 ‘강도 베스트 수사반’에 선정되기도 했다.

박형사는 지난해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보았다. 얼굴 없는 연쇄 살인범을 쫓지만 미해결사건으로 끝나버리는 영화는 그에게 무료했다. 박형사 사전에 미제 사건이란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난해 9월24일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강력계에서만 18년을 보낸 그마저 요즘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4월11일이면, 2백일째. 그는 얼굴 없는 범인을 쫓고 있다. 하지만 진전이 없다. 그에게 날짜는 숫자에 불과했다. 토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오로지 단서를 찾는 날과 그렇지 않는 날만 있을 뿐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살인 사건 해결사를 미궁에 빠뜨린 사건은 이른바 ‘버팔로 사건’이다.

2003년 9월24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자택에서 ㅅ대 명예교수 이 아무개씨(73)와 부인 이 아무개씨(68)가 숨진 채 발견되었다. 안방에서 러닝 차림으로 둔기에 머리를 맞아 사망했다. 범인은 현금 7천여만원이 집안에 있었지만 손도 대지 않았다. 10월9일 서울 종로구 구기동에서는 강 아무개씨(85)와 며느리 이 아무개씨(60) 그리고 강씨의 아들(35)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이들도 모두 둔기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10월16일에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단독 주택에서 유 아무개씨(69)가 둔기로 머리를 맞고 숨졌다. 한 달이 지난 11월19일에는 동대문구 혜화동 2층 단독 주택에서 김 아무개씨(86)와 파출부 배 아무개씨(57)가 시체로 발견되었다. 역시 둔기에 머리를 맞아 숨졌다.

두 달 사이에 비슷한 살인 사건이 4건이나 발생한 것이다. 피해자 중에는 하나같이 노인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머리를 가격당했다. 범행 장소는 모두 단독 주택이었다. 4건 모두 금품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삼성동·구기동·혜화동에서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 신발 자국이 발견되었다. 260mm 크기로 ㄱ사가 제조한 버팔로 신발이었다. 이때부터 연쇄 살인 사건은 ‘버팔로 사건’이라고 불렸다(<시사저널> 제737호 12월11일자 참조).

버팔로 신발 구입자 6백50여명 탐문

경찰은 관할 별로 전담반을 꾸렸다. 박상호 형사가 속한 강남서는 신사동과 삼성동 사건을 맡았다. 동대문서가 혜화동 사건, 서대문서가 구기동 사건을 맡았다. 이후 경찰은 1주일에 한번씩 정기 회의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으며 공조 수사를 하고 있다.

살인 사건 해결사의 노하우로 보면 살인 사건의 8할은 치정·원한·재산 다툼 세 가지 가운데 하나가 범행 동기다. 박형사는 피해자가 노인들이어서 치정 쪽보다 원한이나 재산 다툼에 수사력을 집중했다. 그는 강력1반 후배 형사들을 2인1조로 나누었다. 박성수·주용석 형사가 한 조가 되고 정구영·양진국 형사가 한 조가 되었다. 그리고 신사동이나 삼성동 피해자의 주변 인물을 정밀하게 조사했다. 이런 식으로 20일 정도 파고들면 용의자 윤곽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신사동 사건 주변 인물 50여명, 삼성동 사건 주변 인물 30여명을 탐문했지만, 원한 관계가 드러나지 않았다. 신사동 사건 현장에는 현금 7천여만원이 그대로 남아 있어 재산 다툼이나 돈을 노린 범행도 아니었다.

박형사는 난감했다. 살인 사건만 20건을 해결했지만, 범행 동기마저 불분명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이럴 때는 방법이 없다. 본격적인 싹쓸이 저인망 수사에 돌입할 수밖에. 단서란 단서는 모두 찾기 위한 저인망 수사가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강남서 강력 1반부터 7반까지 형사 42명이 투입되었고, 서울경찰청 형사기동대 2개 반도 지원에 나섰다. 전국 경찰과 수사 협조에 들어갔다.

먼저 범죄 수법이 동일한 전과자 조회 기록을 뽑았다. 고급 주택에 침입해 둔기를 사용한 범죄자가 1천1백22명에 달했다. 서울·경기·인천 등 수도권은 직접 탐문 수사를 했다. 나머지 지역은 지방 경찰에 부탁했다. 최근 강력 범죄 출소자 2천3백37명의 신원도 파악해 알리바이를 확인했다. 여기까지는 기본이다.

박형사는 이 사건의 유일한 단서인 신발 자국에 주목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의뢰해 신발 바닥 문양을 판독한 결과 ㄱ사 버팔로 제품으로 판명되었다. 신발 자국의 닳은 정도로 보아 지난해 사간 것으로 추정되었다. ㄱ사에 문의했더니, 지난해 이 버팔로 신발은 전국에서 1만5천 켤레가 팔렸다. 경찰은 범행 현장에 찍힌 크기와 같은 260mm를 구매한 사람을 파악했다. 모두 3백77명이었다. 물론 신원 파악이 가능한 신용카드로 구매한 고객들이었다.

구매자 신원과 알리바이를 확인했다. 단서가 나오지 않자, 신발 구매자 수사를 확대했다. 신발 크기 판독에 오차가 있을 수 있으므로 크기에 관계없이 같은 문양의 버팔로 제품을 구입한 2백84명을 추가로 조사했다. 강력반 형사들은 발 길이를 재기 위해 줄자를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신데렐라 찾기식 수사를 벌이기도 했다.
이쯤 되면 시간은 쫓기는 자의 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제 사건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관련 단서란 단서는 모조리 확인하는 저인망 수사는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확대되었다. 사건 현장 주변 CCTV 화면 확보에 나섰다. 범행 당일 범인이 찍혔을지도 모르는 지하철 강남구청역과 주변을 지나는 시내 버스 CCTV 테이프 2백8개를 모아 분석했다.

효과가 있었다. 동대문경찰서가 단서를 찾아냈다. 혜화동 사건 용의자의 뒷모습이 찍힌 CCTV 화면을 찾아낸 것이다. 사건 현장에서 사라진 점퍼를 입은 모습이 그대로 찍혀 있었다. 경찰은 그의 사진을 담은 전단 10만장을 찍어 전국에 배포했다. 현상금도 5천만원을 걸었다. 키가 168cm로 확인되었다. 큰 진전이었다. 전국에서 50~60건의 제보가 잇달았다. 하지만 뒷모습이 찍힌 것이어서 신빙성이 떨어졌다.

그동안 경찰이 CCTV 분석 못지 않게 심혈을 기울인 분야가 휴대전화 수사다. 피해자 전화뿐 아니라 사건 현장 근처 공중 전화, 휴대전화 기지국 연결 번호까지 모두 3개월치를 분석했다. 신사동 사건의 경우 조회한 기록이 무려 25만여 건에 달했다. 이것을 분석해 범행 시간대에 통화한 7백10명을 가려냈다.

미제 사건을 만들지 않겠다는 집념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 식으로 조그만 흔적이라도 찾아 나섰다. 교통 패스용 신용카드를 이용해, 신사동과 삼선동 일대를 통과하는 버스를 이용한 승객의 기록 80여만 건을 확보해 분석했다. 이 신용카드와 버팔로 신발을 산 카드가 일치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심지어 둔기에 맞아 숨졌다는 데 착안해, 망치를 잘 다루는 목공 등 자격증 소지자(2만8천여명) 가운데 정신병 경력자 2백59명에 대해 탐문 수사를 하기도 했다.

<공공의 적> 비디오 대여자도 일일이 조사

과학 수사 시대라고 하지만, 박형사처럼 고참 형사의 수사 원칙은 그래도 발로 뛰는 것이다. 그 덕에 해결할 기미도 보인 적이 있었다. 수사 도중 유력한 용의자가 떠올랐다. 신사동 사건 현장에 드나든 중국집 배달원이, 사건 이틀 뒤에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탐문 수사 결과 그가 휴대전화를 한강에 버렸다는 동료의 진술까지 받았다. 박상호 형사는 ‘감이 왔다’. 서울 소재 98개 중국음식점을 탐문 수사했지만 소재를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 배달원들이 값싼 고시원에서 생활한다는 소리를 듣고 서울 소재 고시원 1천43 군데를 훑었다. 고시원에서 그 배달원을 찾아냈다. 하지만 그는 알리바이가 명확했다. 맥이 탁 풀렸지만, 용의자를 하나씩 배제해 가는 것도 수사 성과라고 자위했다.

순간적인 모방 범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종로구·강남구·동대문구 관할 비디오 대여점을 전부 조사하기도 했다. 버팔로 사건과 유사한 내용을 다룬 영화 <공공의 적>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간 사람 가운데 혹시 범인이 있지 않을까 하는,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감 때문이다. 지난 3백일 동안 동원된 경찰은 연인원 6천8백여명이었다.

수사 인력을 대거 투입하고 휴대전화부터 카드 기록까지 조회했지만 버팔로 사건은 미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만일 버팔로 사건이 미제 사건으로 남는다면 박형사에게는 치욕이다. 미제 사건은 처리되지 ‘않는’ 사건이지만, 달리 보면 처리하지 ‘못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범인에게는 완전 범죄라는 면죄부를 주는 셈이다. 18년 강력계 형사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물론 미궁에 빠진 사건을 해결하면 1계급 특진이라는 당근이 주어진다. 반대로 채찍도 있다. 해결하지 못하면 자칫 직속 상급자들이 줄줄이 좌천될 수도 있다.

4월12일, 박상호 형사는 수사본부가 차려진 서울 압구정1동 파출소로 출근했다. 얼굴 없는 범인을 찾는 2백1일째 수사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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