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어린 죽음 둘러싼 '의료 분쟁 판결' 파문
  • 대구·朴晟濬 기자 ()
  • 승인 1997.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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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의료 사고’에 환자측 손 들어줘…‘무과실 입증주의’에 의사들 반발
의료 사고 재판 한 건이 의료계를 진동시키고 있다. 지난 2월 초순 대구고등법원이, 5년째 끌어오던 한 의료 사고 소송 사건에 대해 손해배상금 약 2억1천만원을 환자측에 지불하라는 주문과 함께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리자, 피고(의사)는 물론 지역 의사회까지 판결의 부당성을 지적하며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특히 대구 지역 의사회는 소속 회원 3천여 명을 대상으로 판결 내용에 불복한다는 내용의 서명 운동까지 벌이고 있다. 개별 의료 사고 판결에 대해 당사자가 아닌 지역 의사회가 집단으로 반발하고 나선 것은 의료 분쟁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게다가 대구시의사회는 대한의사회에 공문을 보내 의료계 전체 차원의 대응책을 수립하라고 촉구하는 등 이 문제를 확산시키고 있어, 파문은 앞으로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사건의 발단은 92년 2월, 대구 시내 한 중학교에 다니던 장재우군이 갑자기 머리가 아프고 열이 오르는 증세를 보여 어머니와 함께 대구 시내에 있는 한 개인 병원을 찾으면서 비롯되었다. 장군의 진료를 맡았던 사람은 대구시 감삼동 장신민내과의원 장신민 원장이었다. 장원장은 곧 장군의 증세를 감기 몸살에 의한 것으로 진단하고, 노나린·아모렉스·캐롤·마그노칼·유자임 따위 감기 몸살 약을 주사·투약했다. 장군은 장원장으로부터 사흘간 똑같은 방법으로 감기 몸살 치료를 받았다.

사건은 치료 사흘째 되는 날 터졌다. 치료 첫날부터 이미 침을 흘리고, 아래턱 부위에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등 이상 증세를 보이던 장군은 치료 사흘째 되는 날 몸에서 붉은 반점이 돋았으며 입안이 헐어 음식물을 삼키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학교를 조퇴하고 다시 병원을 찾은 장군에게 의사는 ‘감기 몸살에 걸리면 보통 입안이 잘 헐고 침을 많이 흘리게 된다’며 역시 같은 방법의 치료를 한 뒤 장군을 돌려보냈다.

“비슷한 사례 없다” 1심에선 의사 승소

치료를 받고 집으로 돌아온 장군은 낮잠을 자던 중 갑자기 의식을 잃어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으며, 이 날부터 지난해 4월 합병증(폐렴)으로 죽을 때까지 51개월간 지속적 경련·호흡부전·뇌수종 따위 병마에 시달리며 단 하루도 병상에서 일어설 수 없었다.

감기 치료를 받기 전까지 멀쩡했던 장군을 하루아침에 식물 인간 상태로 만든 ‘그 무엇’에 장군을 장기간 맡아 돌본 경북대병원측은 ‘특발성 간질’이라는 병명을 붙였다. 간질은 간질이되 발생 원인을 전혀 밝혀낼 수 없는, 말 그대로‘특별한 간질’이라는 것이었다. 장군에게 감기약을 주사했던 장신민 원장 역시 장군을 사망으로 몰고간 간질과 자신의 감기약 주사 행위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환자측은 달랐다. ‘건강하기 이를 데 없던 아이가 갑작스럽게 간질에 걸려 그 길로 병원 한 번 못나와 보고 죽게 된 진짜 원인은, 주사약의 부작용을 빼놓고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라는 것이 환자측 주장이다.
당사자끼리 주장이 엇갈려 원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한 의료 사고가 법정 분쟁으로 옮아가는 일은 흔한 일인데, 장군 사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환자측은 장원장을 상대로 치료비(위자료 포함)를 물어달라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92년 7월에 시작해 95년 3월 일단락된 환자와 의사 간의 1차 법정 분쟁에서 법원은 피고인측의 잘못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의사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의학상 간질이 지속되는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별다른 원인을 찾을 수 없는) 특발성에서 말미암는 경우도 많으며, 원고에게 투여된 약제로 인해 간질 지속 상태가 발병한 경우는 국내외에 보고된 바 없으므로 인과 관계를 인정하기 힘들다’는 이유에서였다.

1심 판결에 불복한 원고측이 의료 사고 전문 변호사인 최재천 변호사를 앞세워 항소를 제기한 때는 95년 5월. 최변호사는 피고측이 사용한 약물의 부작용을 조목조목 지적하여 이들 약물이 장군의 간질 지속 상태를 유발했음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 예컨대 장원장이 장군에게 주사한 노나린의 경우, 이 약물이 결막염·부종 따위 치명적인 독성을 갖고 있어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 노나린과 함께 투여된 캐롤(소염진통제의 일종) 역시 해열 및 진통 효과가 아스피린의 20~30배에 이를 정도로 뛰어나지만, 드물게 천식 발작을 유발하거나 때때로 발진·가려움증·두드러기 같은 과민 증상을 보이므로 다른 소염진통제와 함께 쓰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증언을 전문 기관의 사실 조회를 통해 확보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고측이 제출한 이같은 증거를 받아들여 장원장이 장군을 진찰하고 감기약을 주사할 때‘사전 반응 검사’를 실시하지 않은 과실을 추가로 인정했다. 더 나아가 재판부는 장군의 간질 발병이 장원장의 실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닐지라도 장원장 자신에 의해‘무과실’이 완벽하게 입증되지 않았으므로 원고측에 손해 배상을 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1심 판결 때와 다른 법리를 들고 나와 원고측 손을 들어줬던 것이다.

의사들 “재판부, 의학 지식 잘못 적용”

이같은 판결이 나자 흥분한 쪽은 대구 지역 의사들이었다. 장원장의 싸움을 대신 맡고 나선 것이다. 의사들은 먼저 재판부가 저지른‘의학 지식의 오류’를 지적했다. △장원장이 사용한 약물이 환자에게 간질 지속 상태를 일으킨 적이 없음에도 이를 무시한 점 △진료받을 당시 없었던 간질 지속 상태가 진료 후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 진료 행위와 그 결과간 인과 관계를 사실상 인정한 점 따위는 의학적으로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명백한 오류이므로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구시 의사들이 서명 운동까지 벌이며 항소심 판결을 집단으로 문제 삼는 이유는 따로 있다. 의사에게 무한 책임을 강요하는 이른바 ‘무과실 입증주의’가 항소심 판결의 주요 법리로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무과실 입증주의란, 공해 피해 분쟁 사건에서 확립된 원칙으로, 원인 제공자가 일정한 피해 발생에 대해 과실이 없음을 밝히지 못하는 한 해당 피해에 대해 책임을 지게 하는 원칙이다. 90년대 들어 국내 의료 사고 분쟁에도 본격 적용되기 시작한 무과실 입증주의는 의료 사고가 발생했을 때 전문 지식과 강력한‘동료 의식’으로 무장한 의사들로부터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도입되었으나‘진료권을 지나치게 제약한다’는 이유로 의료계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왔다. 그런데 이번 재판에서는 이 원칙을 적극적으로 판례의 준거로 택한 것이다.

항소심 판결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원고측은 집단 서명 운동을 벌이는 의사회측에 대해 ‘법률적·의학적 주장은 재판 절차에서 진술하라’고 공박하고 있다. 반면 의사회는 서명 운동을 계속해 싸움을‘장외’로 확대하겠다는 뜻을 굳히고 있다. 대구시의사회 김완섭 부회장은 “과실 없는 의사가 자신의 무과실을 입증하지 못할 때마다 범법자로 몰린다면 과연 누가 의사 노릇을 할 것인가. 이번 사건을 뒤집지 못하면 의사들은 사소한 감기 몸살조차 치료하기를 꺼리게 될 것이다. 이런 판결이 과연 국민 보건에 보탬이 되는지 아닌지는 누구보다 환자 자신이 더 잘 알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무과실 입증주의를 둘러싼 환자와 의사간 다툼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층 치열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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