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몸부림치는 ‘버려진 땅’ 에티오피아
  • 아디스아바바/글·사진 박성준 기자 (snype00@sisapress.com)
  • 승인 1996.08.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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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현지 취재/경제개발 계획 통해 ‘가난’ 덜기…종족주의·부패가 걸림돌
 
중간 기착지인 에리트리아의 아스마라 공항에서 손님과 물건을 내리고 싣느라 한참 꾸물거리던 이집트 항공사 소속 여객기는 출발 예정 시간을 1시간 넘기고 나서야 활주로에서 이륙했다. 비행기가 목적지인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공항에 착륙한 시각은 7월21일 오전 11시(현지 시각). 같은 날 새벽 5시에 이집트 카이로 공항을 출발한 지 꼭 6시간 만이었다. 원래 카이로에서 아디스아바바까지는 비행기로 3시간30분이면 족히 닿을 수 있는 거리이다.

공항에 도착하기 전, 비행기 창을 통해 하늘에서 내려다본 이 지역 풍광은 외부 세계에‘절대 빈곤의 나라’로만 알려진 에티오피아에 대한 고정 관념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연록색 들판과 짙푸른 녹색 유칼립투스나무 숲이 끝없이 이어지고, 간간히 누런 빛 강줄기와 허옇게 살을 드러낸 경작지가 드넓은 평야를 수놓은 고원 지대의 경관은 영락 없는‘지상 낙원’의 모습이었다.

평균 고도가 해발 2천~3천m에 달하는 광활한 아비시니아 고원 지대의 연평균 기온은 사람이 살기에는 물론 식물이나 가축이 자라기에도 적당한 평균 16℃. 적어도 비행기 안에서 만큼은 에티오피아가 지구상 최악의 빈곤국이라는 사실과, 80년대 이래 혹독한 가뭄을 겨끔내기로 겪으며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사자를 내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줄 어떤 증거도 찾아낼 수 없었다.

하지만 비행기가 일단 공항에 착륙하는 순간부터 모든 판단은 원래의 고정 관념으로 돌아간다. 에티오피아를 찾는 외부 세계 사람들은, 가방에 숨어든 벼룩까지 찾아내 일일이 마릿수를 셀 정도로 까다롭고 권위적인 세관대의 통관 절차를 거치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칙칙한 빛깔의 바바리를 걸쳐 입은 세관원들이 짐 수색을 시작했다. 그들은 테이프로 밀봉한 짐상자마저 날카로운 칼로 사정 없이 갈라 내용물을 확인했다. 취재진이 공항을 빠져나간 시각은 이 날 오후 1시가 넘어서였다. 세관대에서 무려 2시간 이상을 허비한 것이다.

아디스아바바 공항의 까다로운 통관 절차는 오늘날 에티오피아가 처한 정치·경제·사회·문화 상황을 함축해 보여준다. 한반도보다 약 5배 넓은 광대한 영토(1백22만㎢)에 총 인구 5천3백만명(94년 기준)이 모여 사는 에티오피아는 유엔·유네스코 같은 국제 기구와 미국 등 서방 국가로부터‘원조’를 받아 살아가고 있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대기근, 30년 이상 지속된 내전 후유증이 이 나라 경제를 국민총생산(GNP) 52.6억 달러(93년 기준), 1인당 국민소득 백 달러(93년 기준)에 불과한 세계 최악의 빈곤 상태로 끌어내리며, 외국 원조로 겨우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는 나라로 전락시켰다.

 
사회주의 몰락했지만 관료주의는 여전


외국 원조에 의존하여 나라 살림의 대부분을 꾸려가는 이 국가의 최대 관심 사항은 외국 원조가 한 해에 얼마나 들어오느냐 하는 것이고, 들어온 원조품을 얼마나 적절하게 나누고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외국 원조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해 물품이 어디로 흘러나가는지를 정부가 감시한다. 이처럼 중대한 국가 사무가 폭주하는 길목이 바로 공항과 항구에 자리잡은 세관이다. 결국 에티오피아 경제의 심장부는 엉뚱하게도 아디스아바바 공항인 셈이었다.
현지인, 특히 외국인으로서 아디스아바바에 제법 오래 산 사람들은 통관 절차의 까다로움을 경제적인 이유보다는 이 나라 특유의 정치 상황 또는 낡은 사회 관행과 연관지어 풀이하기를 더 좋아한다. 에티오피아는 91년 5월 현재의 정부 수반인 멜레스 제나위가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철권 통치로 악명 높은 육군 중령 출신 하일레 마리암 멩기스투에 의해 20년 가까이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 왔다.

74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멩기스투는 이듬해부터 주요 산업 시설, 금융기관, 토지와 도시민의 재산을 차례로 국유화했다. 그러나 그가 이식한 사회주의, 특히 독재와 함께했던 사회주의는 에티오피아 사회에 관료주의와 부패를 만연시켰다. 공항 세관원들이 제때 통관시키지 않고 여행객을 골탕 먹이는 진짜 이유는 나태와 텃세부리기를 주무기로 삼는 관료주의의 낡은 악습 때문이거나, 까다롭게 심사해 부수입을 챙기는 부패 관행의 잔재 때문이라고 현지인들은 믿고 있다.

관료주의와 부패 관행의 최대 피해자는 다름 아닌 에티오피아인 자신이다. 93년 한국은 구호 물자를 만 달러어치 에티오피아에 지원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구호 물자는 에티오피아에 도착한 지 1년이 넘도록 일반인들에게 나누어지지 않았다. 통관이 늦어진 이유는 ‘외국에서 들어온 모든 물자에 세금을 매긴다’는 원칙 때문이었다. 세관 창고에 1년이 넘도록 처박혀 있던 구호 물자는 한국대사관측이 비싼 세금 외에 1년 보관료까지 물어준 다음에야 겨우 세상으로 나올 수 있었다.

부패 잔재는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었다. 에티오피아 오로모 주에서 자원 봉사자로 일하고 있는 박 아무개씨의 최근 목격담이 이를 입증한다. “지난해인가 유엔이 오로모 주에 구호 물자로 차량 백대를 지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해 못할 일이 벌어졌다. 유엔의 구호 물자가 들어오고 난 뒤 특별한 이유 없이 주지사를 비롯한 오로모 주 고위 관리들의 개인 소유 차량이 1대씩 더 늘어난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관리들이 구호용으로 들어온 차량을 가로챘다고 수근거렸다.”

7월의 아디스아바바와, 그곳에서 약 백㎞ 떨어진 나자렛 사이의 도시·농촌 풍경은 멩기스투 정권이 에티오피아인에게 물려준 사회주의 유산이 얼마나 혹독한가를 한눈에 보여준다. 도시 전체가 커다란 빈민굴이나 다름없는 아디스아바바에서는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을 보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들은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것을 찾기도 하고, 과일을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펼쳐 놓고 장사를 하기도 한다. 어쩌다가 외국인을 만나면 이들은 너나없이 영어로 ‘머니’ ‘머니’를 외치며 달려들기 일쑤다. 초등학교 취학률이 남자 33%, 여자 24%라는 사실을 입증이라도 하듯 아이들 대부분은 영락없는 거지 차림으로, 수령이 20년 이상은 족히 됨 직한 낡은 자동차들이 시커먼 매연을 뿜어대는 길거리를 하루 종일 쏘다닌다

어른이라고 다를 것이 없다. 에티오피아는 6월부터 8월 사이 대우기(大雨期)를 맞는다. 아디스아바바도 예외가 아니어서 7월의 이 도시에는 줄곧 비가 내렸다. 그러나 거리에서는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 변변한 일자리가 없는 어른들은 모두 거리에 나와 행상을 하거나, 구두닦이와 노점상을 하기 바쁘므로 소낙비에 옷 젓는 일 따위에는 아예 신경 쓸 여지가 없다. 현지인에 따르면, 아디스아바바 거주자들의 한달 평균 수입은 에티오피아 돈으로 1백50보(Birr), 한국 돈으로 4만원 정도이다.

식량 부족해도 인구 증가 여전

에티오피아는 후진국이므로 물가가 낮을 것이라고 짐작한다면 큰 착각이다. 워낙 물자가 귀하고 화장지·비누 등 극히 예외적인 품목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생활 필수품을 전량 외국에서 수입하는 데다가 관세마저 높게 매겨 물건 값이 선진국 대도시 못지 않게 비싸다. 물가는 높고 수입은 적으므로 에티오피아인들은 끼니를 거르기 일쑤다. 현지 한국대사관 자료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의 1인 하루 평균 칼로리 섭취량은 국제 영양실조 기준치(2천5백50㎈)의 73%에 불과하다. 국민 대다수가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봤자 얻을 것이 별로 없는 에티오피아인들은 외국인과 접촉이 잦은 직업을 찾기 위해 열을 올린다. 고등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은 특히 그렇다. 에티오피아 최고 명문인 국립 아디스아바바 대학을 91년에 졸업한 셀라시에 피크레(25)도 그 중 하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관광 전문학교에 다시 들어가 일정 과정을 마치고 지난해 관광회사에 취직했다. “대학 졸업생들이 외국인을 상대하는 직업을 선호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예요. 하나는 마땅히 취직할 자리가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외국인을 상대하는 직업의 수입이 상당히 높다는 것입니다. 그나마 저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많은 학생이 대학 문을 채 나서기도 전에 실업이라는 암울한 현실에 절망합니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에티오피아의 참상은 농촌의 만성적인 식량 부족 사태에서 절정을 이룬다. 에티오피아 경제가 시장 경제 체제로 전환했음에도 생산력 증대의 토대가 될 사사로운 토지 거래는 여전히 제한되어 있으며, 왕정 때에는 부재 지주에게, 사회주의 때에는 소수 지배 세력에게 생산물을 빼앗기면서 농민들은 식량 증산의 의욕을 아예 잃어버렸다. 한 서방 언론 보도에 따르면, 에티오피아는 93년 한 해에만 식량을 75만t 수입했다. 지난해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에티오피아가 식량 부족 때문에 곡물을 매년 2백50만t씩 수입해야 할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아프리카 대륙 특유의 종족주의는 내전을 부채질하며 에티오피아의 발전을 지체시켜온 또 하나의 원인이다. 암하라족·오로모족·티그리족 등 무려 90여 종족으로 사분 오열되어 있는 인구 구성이 에티오피아 국민의 단결과, 저개발 극복을 위한 일사 불란한 행정력 집행을 가로막고 있다. 최근 에티오피아는 식량 부족 사태에도 불구하고 인구 증가율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이유는 ‘종족중심주의’에 따른 각 종족의 출산 장려 정책 때문이었다.

아프리카 사회에서 뿌리 깊은 종족주의의 관행은 지난해 5월 총선을 통해 과도 정부 시대를 마감하고 정식으로 집권한 제나위 정권에서도 일부 나타나고 있다. 트그리 지방 출신인 제나위는 입각하면서, 정부내 주요 자리를 자기 지방 출신으로 채웠다. 현지 주재 한국공관의 한 직원에 따르면, 제나위는 집권 이후‘안전 이민과 난민국’이라는 정보기관을 설치했다. 이 기관의 임무는 분명하다. 비밀 요원을 아디스아바바에는 물론 전국 주요 도시·해외에까지 배치해 다른 종족의 동향 따위를 감시·통제하기 위함이다.

 
국제통화기금 ‘시장성 좋다’ 평가


오랜 기근과 사회주의 잔재, 부패와 종족주의적 분열의 틈바구니에서 에티오피아인 대다수는‘절대 빈곤선’ 이하의 형편없는 삶을 지탱해 왔다. 반면 극소수 가진 자들은 지위와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배를 더 크게 불리는 일에만 몰두해 왔다. 일부 가진 자들은 한겨울이 아닌데도 두터운 털옷으로 치장하고 최고급 승용차에 올라 아디스아바바 시내를 누빈다. 대개의 후진국 사회가 그러하듯, 에티오피아에는 절대 다수의 지옥과 극소수의 천국이 공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에티오피아에 전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제나위 정권이 들어선 이후 지난 3년간 에티오피아는 연평균 5%선의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제나위 정권은 또 식량 자급에 최우선 목표를 둔 5개년 경제개발 계획을 세워 추진해왔다. 외국 자본 유입을 촉진하기 위해 까다롭기 그지없던 투자법도 손질했다. 그 결과 에티오피아는 최근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시장성이 좋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얻기도 했다.

한국대사관 최홍기 서기관은 “최근 에티오피아는 에리트리아와 예멘간 영유권 분쟁 을 중재하고 부룬디 사태 때 평화유지군을 파견하는 등 외교적 성공까지 거두고 있다”라고 소개했다. 정치가 안정되고, 경제력도 희미하나마 소생 기미를 보이면서 에티오피아는 동부아프리카 역내 정치의 중심국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 40개 최빈국 가운데 30개 국가는 아프리카 대륙에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에티오피아는 가장 후미에 있다. 그런 에티오피아가 최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길고도 험난한 역주를 시작했다. 60년대에 이 나라 마라톤 영웅 비킬라 아베베가 올림픽을 2연패한 영광을‘빈곤과의 싸움’이라는 경기장에서 재현이라도 할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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