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굴암·팔만대장경 위기, 정부는 못본 체
  • 경주·합천/金恩男 기자 ()
  • 승인 1996.11.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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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균열·가야산 골프장 사태 방관… 예산 부족·학계 갈등 이유로 ‘위기의 문화재’ 못본 체
‘요즘 같아선 사표 쓰고 싶다.’문화재관리국 산하 문화재연구소 직원들의 푸념이다. 지난달 중순 석굴암 외벽 돔에 균열과 누수가 발생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온 데 이어, 30일에는 분황사 석탑(국보 30호)의 기단과 탑신부에도 균열이 생겼다고 분황사 주지가 주장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해명 자료 배포하랴, 현지 조사팀 내려 보내랴 ‘마의 10월’을 보내며 문화재연구소가 동분서주하는 동안 한켠에서는 잔잔한 ‘사건’이 벌어졌다. ‘가야산 국립공원내 해인골프장 전면 백지화를 위한 백만인 서명 운동’ 참가자가 백만 명을 넘어선 것이다. 7월18일 서명 운동을 시작한 지 백일 남짓한 기간에 목표를 달성한 해인사측은 머지 않아 대규모 축하 행사를 기획하고 있다.

이들 사건은 한 가지 흐름을 갖고 있다. 이들의 최종 요구가 ‘정부의 문화재 보존 의지를 밝히라’는 점에서 그렇다. 특히 해인사측은 단호하다. 이른바 ‘가야산 골프장 사태’는 91년 가야산 국립공원내 골프장 사업 시행 허가가 난 이래 95년 7월 문화체육부 행정심판위원회의 ‘가야산 해인골프장 사업계획 취소 결정’→사업자(가야개발) 불복→96년 6월 서울고등법원 원고(사업자) 승소 판결→96년 7월 대법원 상고로 6년째 이어져 온 상태이다. 골프장 개발 주체와 반대 세력 간의 대립이 막바지에 이른 현재 해인사측은 만약 대법원이 개발 업체 손을 들어줄 경우 국제 사회에 대대적인 청원 운동을 개시하겠다고 못박았다.

‘국제적인 청원 운동’이란 유네스코를 염두에 둔 말이다. 지난해 12월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대장경판 및 판고, 종묘가 유네스코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해인사, 지원 끊겨 ‘고려대장경 연구’ 중단

세계 문화 유산이란 72년 채택된 유네스코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세계유산위원회가 ‘인류 전체를 위해 보호해야 할 뚜렷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해 ‘세계유산일람표’에 등재한 문화재를 말한다. 현재 세계 1백5개국의 문화유산 4백69건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아시아의 세계 유산은 중국 14건, 일본 6건, 인도 21건 등이다.

해인사측은 팔만대장경을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 유산’으로 기재해 달라고 유네스코에 청원 운동을 벌이겠다는 것이다. 세계유산협약 제11조 4항에 따르면, 문화재가 파괴될 위험에 처했을 때 해당국 정부는 이를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 유산’으로 신청할 수 있다. 이것이 인정되면 유네스코로부터 보존을 위한 기술과 경비를 지원받게 된다. 그러나 문화재관리국이나 유네스코한국위원회는 이같은 구상에 대해 회의적이다. 우선은 골프장 건설이 대장경을 파괴할 가능성이란 것이 아직은 ‘가설’ 차원이기 때문이다.

현재 위험에 처한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는 대부분 중동의 분쟁 지역이나 미국 옐로스톤 공원처럼 이미 파괴가 진행되거나 파괴 개연성이 뚜렷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게다가 ‘위험에 처한 세계 유산’ 신청 주체가 정부이기 때문에 정부가 나서지 않는 한 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청원 운동만으로도 ‘문화 후진국’의 이미지를 남기는 데 충분하다. 자칫하면 또 한 차례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 수도 있다. 지난해 유네스코 회의장에서는 설악산 세계 자연 유산(문화유산 외에 자연 유산과 복합 유산이 있다) 등록을 추진하던 한국 정부와 이를 저지하려고 청원서를 들고간 지역 주민이 맞서는 촌극이 빚어졌었다. 해인사측은 현재 유네스코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로랜드 실바 총재에게 해인사 사태를 ‘예의 주시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낸 상태이다.
문제는 정부의 문화재 보존 의지이다. ‘가야산 해인골프장 건설 저지 해인총림 대책위원회’ 사무총책을 맡고 있는 일진 스님은, 세계 문화 유산 등록을 내세워 생색만 냈지 정부가 실질적으로 한 일이 무엇이냐고 비판한다. 골프장 허가뿐이 아니다. 대장경 보존을 위한 지원도 부실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한 예로 94년 5년 계획으로 출발한 ‘고려대장경 기초 학술 연구’는 2년 만에 중단되었다. 예산이 더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금속·미생물·기상학 등 각계 전문가 12인으로 구성된 연구팀은 본래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을 봉안한 장경각의 자연 보존환경 조사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의 과학적인 보존을 위한 기초 조사 수행을 연구 과제로 삼았다. 그런데 예산 지원이 끊기자 각 경판의 치수·중량·상태와 훼손 정도를 기록해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려던 후자의 계획은 착수조차 못하고 만 것이다.

팔만대장경 못지 않은 보존 가치를 지닌 석굴암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최근 석굴암 외벽 돔의 균열 문제를 제기한 동국대 산업기술연구소 유승룡 교수는 “문화재관리국 주장대로 석굴암이 당장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균열 원인과 상태, 콘크리트 노후화 정도를 종합 진단하지 않는 한 아무 탈 없이 후손 만대에 석굴암을 물려줄 수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문제가 제기되자 문화재연구소는 세 군데 균열 부위에 정밀 측정기를 설치했다. 올해 초 구입한 이 기계는 천분의 1㎜ 미세한 균열까지 측정할 수 있다. 김동현 문화재연구소장은, 이를 정기적으로 측정하면 균열이 진행되는 정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균열이 생긴 원인, 눈에 보이지 않는 내부의 균열 진행 상태는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김소장은 대한건축학회 등 외부 기관에 정밀 진단을 의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제는 이것이 ‘죽은 뒤 청심환 주는 격’이라는 사실이다. 정밀 진단은 이미 오래 전부터 시작했어야 한다는 것이 유승룡 교수의 지적이다. 석굴암은 현재 두 겹의 콘크리트 돔으로 둘러싸여 있다. 20년대에 무너진 석굴암을 개축할 때 일제가 만든 돔과, 문화재관리국이 60년대 초 이를 전면 보수하면서 여기에 1m쯤 간격을 두고 새로 두른 돔이 그것이다. 콘크리트가 개발된 지 백 년밖에 안된 만큼 그 수명에 대해서는 80∼2백 년으로 설이 분분하다.
일제가 만든 돔 수명 다했을 수도

‘80년 설’에 따르자면, 일제 때 만든 돔은 이미 수명을 다해가고 있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밀 진단은 아직까지 행해진 일이 없다. 문화재연구소측은 외기와 접촉하지 않게 바깥쪽을 완벽하게 감싸고 있는 또 하나의 돔이 콘크리트 수명을 연장시킨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연장 기한이 얼마나 될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당국이 석굴암이나 해인사 팔만대장경에 대한 기초 조사 내지 정밀 조사를 ‘기피’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분석된다. 첫번째는 예산이다. 문화재 보수·정비 예산은 올해가 6백11억원, 97년이 7백89억원이다. 이것으로 국보를 비롯한 유형 문화재 7천여 건의 보수·정비 비용을 모두 감당해야 한다. 이론상으로 건당 천만원꼴이지만 현재 진행 중인 경복궁 복원 사업이나 백제 문화권 개발 사업에 몇십억원씩 ‘뭉텅이 예산’이 편성되므로 실제 액수는 이보다 적다. 따라서 상황이 심각한 문화재에 우선 예산을 편성하게 되지 막대한 비용과 기간이 소요되는 기초 조사는 엄두를 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두번째 이유는 정부와 불교계 간의 미묘한 신경전이다. 당국은 이들 문화재 보존에 불교계가 좀더 적극적인 역할, 다시 말해 투자해 주기를 기대한다. 특히 한 해 입장료 수입이 각각 30억 원, 21억 원(95년말 기준)에 이르는 불국사·석굴암 정도라면 ‘자기 성소를 가꾸는 데’ 그만한 투자는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불교계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문화재라는 이유만으로 성소가 관광지·유흥지화하는 불이익을 감수하는 만큼 정부는 장기적인 보존 대책 마련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세번째 이유는 학계 내부의 해묵은 갈등이다. 조사 자체의 객관성보다 누가 조사를 주도하느냐가 더 중시되는 풍토이기 때문이다. 특히 원형과 보존 방법을 놓고 몇십 년째 한치 양보 없는 논쟁이 전개되어 온 석굴암의 경우 ‘관련자들이 모두 죽은 뒤에나 진상이 밝혀질 것’이라는 극언마저 나돌 지경이다.

내년은 문화체육부가 지정한 ‘세계 문화 유산의 해’이다. 석굴암·팔만대장경이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된 것이 계기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들 문화재가 더 이상 특정 교파·학계, 나아가 한국만의 것임이 아니라는 데 동의한다면, 정부는 이를 보존하기 위한 ‘무한 책임의 청사진’을 제시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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