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도취 위기가 극단적 선택 부른다
  •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
  • 승인 2004.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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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이 가진 자들의 자살, 그 죽음의 심리학
자살은 인간의 10대 사망 원인 중 하나이다. 2000년 세계보건기구(WHO) 보고서에 따르면, 한 해에 지구상에서 교통사고로 숨지는 사람은 1백26만명, 자살 사망자는 81만5천명에 이른다. 독일 같은 경우에는 십수 년 전부터 자살 사망자 수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능가하고 있다. 하지만 명확하게 드러나는 수치와 달리 자살은 매우 복잡한 인간 행동으로서 생물·사회·심리적 요인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두 가지 잣대만으로 어떤 이의 자살 이유를 따져 보는 것은 이 세상 사람을 조용필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두 종류로 나누는 일만큼 단순하고 어리석다.

미국의 한 억만장자는 아침에 신문을 보다가 자기 그룹의 주식이 엄청나게 하락했다는 기사 때문에 투신 자살을 하고, 1백15세와 1백19세인 두 노인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에 혐오감이 생겨서, 혹은 자신의 나이에 진저리가 나서 자살했다. 언뜻 자살이라는 공통된 죽음의 방식에 의해서 한축으로 꿰어지는 듯 보이는 그들의 죽음도 사실은 지극히 개별적이고 독립적이다.

요즘 ‘자살 도미노 현상’이라고까지 불리는 유력 인사들의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에도 그러한 개별성은 어김 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지난 9개월 동안 검찰 수사 중 자살한 유력 인사는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의장, 안상영 부산시장, 남상국 전 대우건설 사장, 박태영 전남도지사 4명이다. 대기업 최고경영자와 고위 공직자라는 그들의 사회적 신분과, 4명 모두 검찰 조사 중에 자살했다는 특수 정황을 정치·사회적 맥락에서만 따져보면 망자의 개인적 고통과는 별개로 흥미진진한 추리소설 한 권이 뚝딱 완성된다. 하지만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그들의 자살은 ‘절망에 빠진 사람의 최후의 감정을 분석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그들의 죽음은 ‘자아 통제력 상실’이 인간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의 자살은 공황 장애 환자들의 자살 심리에 가깝다. 공황 발작 상태에서는 거의 심장이 멎을 만큼 엄청난 속도로 심장이 뛰고, 미쳐버릴 것 같은 느낌이 엄습한다. 메스꺼움이나 복통, 이인증(자기 자신이 낯설게 느껴짐), 이상현실감(주위 환경이 낯설게 느껴짐) 등에 휩싸여 정상적인 사고 기능이 일시 정지된다. 이런 공황 발작을 몇 차례 경험한 사람들은 ‘내가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극단의 무력감에서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

누구에게나 검찰 조사가 죽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검찰 조사는 일시적으로 정신을 혼미하게 할 만큼 압도적이고 위협적인 경험이다. 자아 통제력을 거의 완벽하게 상실하기 때문이다.

폭탄 중의 폭탄이라는 ‘모압(Mother of All Bomb) 폭탄’은 대략 반지름 5백m 가량을 무산소 상태로 만들어 모든 생명체를 살상한다는데, 검찰 조사가 시작되는 순간 피의자 대부분은 정신적인 무산소 상태를 경험하는 듯하다. 강압 수사에 대한 의구심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다. 외부와 완벽하게 단절된 듯한 고립감, 내가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듯한 느낌에 정신이 아득해진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검찰 조사 경험담이다. 법조 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검찰은 법으로 보장된 힘이 있는데, 그 힘은 ‘구속’에서 나온다.

장·차관 등 고위 공직자, 현역 국회의원, 재벌을 비롯한 기업인, 교수 등 누구든지 검찰의 표적이 될 수 있다. 검사 처지에서는 모든 사람이 ‘잠재적 피의자’인 셈이다. 검사들끼리는 ‘우리 집 강아지가 오줌을 못 가려서 큰일’이라고 하면 ‘한번 잡아넣지’라고 받는 것이 검사다운 재담으로 받아들여진단다. 생살여탈권에 가까운 그런 막강한 권한 앞에서 정신적 진공 상태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일반 자살률에 비해 교도소 자살률이 이탈리아는 10배, 스위스는 14배 가량 높게 나타나는 것도 구속이라는 현실 앞에서 극단의 무기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일반인도 그러한데 자아 통제력을 훨씬 더 많이 가지고 살아가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느끼는 무력감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일 것이다. ‘더 많이 가진 자’들이 느끼는 주관적인 피해 의식은 객관적 실체보다 더 크다.
그런 점에서 자살이 ‘자아도취적 위기’에서 비롯한다는 해석은 설득력을 가진다. 이들이 느끼는 위기란 지극히 주관적이다. 따라서 남들에게는 고통에 불과한 일이 내게는 죽을 일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하다. 유명 호텔의 주방장은 중요한 연회에 쓰일 굴이 늦게 도착해서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졌다는 이유로 자살했고, 한 과학자는 자신의 과학적 제안을 신문이 비웃었다는 이유로 목숨을 끊었다. 많은 경우의 자살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닷없고 어처구니없게 느껴지는 것의 근원에는 인간의 자아도취적 위기 의식과 자기 파괴가 자리 잡고 있다.

어떤 이는 ‘더 많이 가진 자들의 자살’을 가리켜 우리 사회가 투명 사회로 가는 길목에서 피할 수 없는 한 과정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일련의 자살 행위를 면죄부로 갈음하거나 감상적 동정심을 보여선 안 된다고 말한다. 한 죽음의 개별성이라는 현미경적 시각과 시대적 현상이라는 망원경적 시각 사이의 어떤 지점에 실체적 진실이 있는 것일까.

자살을 시도한 경험이 있거나 금방이라도 자살하려는 사람들과의 상담을 통해 죽음에 대한 간접 경험을 많이 하는 정신과 의사 처지에서도 ‘죽음’에 대해서 만큼은 자신 있는 말을 하기가 어렵다. 그것이 죽음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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