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층 인사 ‘자살 도미노’ 왜 일어나나
  • 고제규 기자 (unjusa@sisapress.com)
  • 승인 2004.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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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없는 원칙 수사가 숨통 조였나…검찰권 위축 우려 속에 일선 검사들 “법대로”
“과도기로 본다. 앞으로 1~2년 안에 이런 풍조가 사라질 것이다.” 지난 5월3일 서울 지청에 근무하는 한 특수부 검사는, 박태영 전남도지사의 영결식 소식을 접하고 이렇게 말했다.

2003년 8월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투신 자살하면서 시작된 고위층 인사들의 자살 행렬이 계속되고 있다. 안상영 부산시장,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에 이어, 지난 4월29일 박태영 전남도지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모두 검찰 조사를 받는 중에, 또는 받은 후에 자살했다. 검찰청 가는 길이 저승길이 된 셈이다. 느닷없이 ‘저승사자’라는 오명을 쓰게 된 검찰은 당혹러운 처지에 놓였다. 고위층 연쇄 자살은 ‘독립 검찰’이 전혀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이기 때문이다.

자살은 역풍을 몰고 오기 마련이다. 정몽헌 회장 자살로 검찰의 강압 수사 논란이 일었듯, 이번 박태영 지사 장례식장에서도 ‘오죽했으면 자살했겠느냐. 검찰이 모욕감을 주었을 것이다’라는 비난이 터져 나왔다.

자살 역풍에 대한 검찰의 대응은 신속했다. 박지사 자살 당일, 수사를 맡았던 서울 남부지검 이준보 차장검사는 “박지사가 원할 때마다 변호인 접견이 가능했고, 세 차례 변호인 접견이 있었다. 가혹 행위는 없었다”라며 진화에 나섰다. 검찰 수뇌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사 시스템을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했다. 4월29일 김종빈 대검 차장은 “사회 저명 인사를 부를 때는 조심하고 검찰 수사도 시스템을 정비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수뇌부의 발 빠른 움직임과 달리 일선 검사들의 반응은 차분하다. 서울중앙지검의 한 검사는 “솔직하게 말하자. 예전에는 한국판 플리 바겐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다. 검찰은 바뀌었다. 이런 변화 자체를 그들(사회 지도층)은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유죄를 인정하는 대신 형량을 낮추거나 조정하는 플리 바겐(plea bargain)은 미국에서 시행되는 제도다. 공식적으로 국내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난 국민의정부 때까지 사회 권력층 인사들은 비공식적인 플리 바겐의 특권을 누려온 것이 사실이다.

서울 지청의 한 검사는 “굳이 실명을 거론하지 않겠지만, 아무개 인사는 검찰청에 들어오기 전 위쪽과 거래하고 들어왔다. 이를 근거로 조사받으면서 은근히 수사 검사를 압박했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검사는 “지금은 정치적 거래마저 수사 기록에 오픈하자는(남기자는)것이 일선 검사들 분위기다”라고 말했다.

관행으로 여겨져온 비공식 정치적 협상 자체가 참여정부 들어 사라진 것이다. 정치적 거래를 통한 마지막 탈출구가 막히자,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자살을 그 탈출구로 삼은 셈이다. 자살 도미노 현상은 검찰의 원칙 수사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를 따라 가지 못한 사회 지도층의 아노미 현상일 수 있다.
고 박태영 지사는 지난 4월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했다. 건강보험공단 인사 비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박지사를 향해 좁혀 가고 있을 때였다. 당시 박지사의 ‘철새 행보’에 대해 박지사가 청와대나 여권에 줄을 대 검찰 수사를 피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있었다.

고위층 인사들의 잇단 자살은 수사 시스템에 대한 전반적인 재검토로 이어질 전망이다. 5월1일 송광수 검찰총장은 서울 고검에 수사 시스템 전반을 재검토하라고 지시했다. 물론 일선 검사들도 강압 수사 방식은 사라져야 한다고 한목소리로 주장한다. 그러나 심리적 압박 수사에 대해서는 각자 다른 목소리를 낸다.

한 검사는 이렇게 말했다. “강압 수사는 사라져야 하지만 심리적인 압박 수사는 필요한 것 아니냐. 좀도둑도 처음에는 버틴다. 하물며 평생 명예롭게 살았다고 자처하는 고위층 인사들은 버틸 때까지 버틴다. 이런 사람을 상대로 심리적 압박 수사마저 하지 말라는 것은 수사를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 서울지청 특수부 출신 한 검사도 “화이트 칼라 범죄자에 대한 수사의 생명은 완급 조절이다. 압박할 때 압박하고 풀어줄 때 풀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노하우다”라고 말했다.

자살 도미노 현상이 검찰권 위축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검찰이 참고해야 할 노하우는 또 있다. 자살 역풍을 헤쳐나간 이탈리아 검찰과 일본 검찰은 반면교사감이다.
흔히 대검 중수부의 불법 대선자금 수사를 이탈리아 검찰의 마니풀리테(깨끗한 손)에 빗대는데, 이탈리아 검찰 역시 자살 도미노에 시달렸다. 당시 수사 과정에서 국영 에너지 회사 ENI사 가브리엘레 칼리아리 전 회장, 가르디니 몬테디손 화학그룹 회장, 모로니 사회당 국회의원 등 사회 지도층 인사 13명이 자살했다.

잇단 자살로 인해 검찰 수사에 대한 반발이 있었지만 이탈리아 검찰은 고강도 수사로 돌파했다. 마니풀리테의 주역 피에트로 검사가 옷을 벗으면서 수사는 용두사미로 끝났지만, 마니풀리테는 이후 이탈리아의 낡은 정치관계법을 손질하게 만들었다.

일본의 연쇄 자살 행진은 현재진행형이다. 2001년 방위청 비행정 뇌물 사건 당시 나카지마 전 의원이 자살했다. 1999년 대장성 직원 뇌물 사건 때에는 무려 5명이 목숨을 끊었다. 자살한 5명 가운데는 재일동포 2세 출신 아라이 쇼케이 중의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라이는 도쿄지검 특수부에 체포되기 직전 호텔에서 목을 맸다.

일본에서는 사회지도층 인사 자살에 ‘냉담’

단일 사건으로 5명이 자살하면 수사가 주춤할 법한데, 도쿄지검은 50년 만에 처음으로 대장성 본청을 압수 수색하며 정공법으로 돌파했다. 당시 주임검사가 현재 도쿄지검 특수부를 이끌고 있는 이우치 겐사쿠 부장검사다. 가네마루 신 전 자민당 부총재 탈세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건을 해결한 특수통 이우치 검사도 심리적 압박 수사와 관련한 일화로 유명하다.

2001년 모리 내각의 실세인 무라카미 마사쿠니 전 노동상을 수사할 때다. 이우치 검사는 “거짓말이면 국회에 가서 배를 가르겠다고 말하지 말고 여기서 갈라 봐라. 계속 부인하면 평생 검찰에서 못 나간다”라며 압박했다. 무라카미 전 노동상은 공판 과정에서 모욕감을 느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일본 현지에서 공판 과정을 지켜보았던 서울고검 노명선 검사는 “일본에서는 사회 지도층 인사의 자살이 빈번하다. 그러나 일본 언론이나 시민들은 냉담하게 바라본다”라고 말했다. 2002년 2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일본 법무협력관으로 근무한 노검사는, 지난 3월 검찰 내부 통신망에 남상국 사장의 자살을 미화하는 한국 사회의 이상 현상을 꼬집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잇단 피의자 자살을 접하는 검찰 수뇌부와 평검사 사이에는 온도 차가 있다. 검찰 수뇌부가 조심스런 행보라면, 평검사들은 단순하고 거침 없는 행보다. 한 평검사는 “복잡한 문제일수록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라며 법과 원칙에 따른 수사가 유일한 돌파구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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