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청 경찰'이 가정 폭력 방조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6.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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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숙 모녀 살인 사건/“흉기 휘두른다” 신고해도 “사생활 보호” 딴청만
또시작이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들려오는 욕설과 비명에 최씨(회사원·경기 시흥시 신천동)는 잠이 깼다. 벌써 열흘째 내리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옆집 오원종씨(50)는 꼭 자정이 넘어 들어와 새벽 4~5시까지 행패를 부리곤 했다. 오씨는 동거인인 정미숙씨(42)뿐 아니라 정씨의 어머니 이상희씨(72)에게도 손찌검을 하는 눈치였다.

최씨뿐 아니라 한 울타리 안에 사는 이웃 사람 대부분이 잠이 깨 마당에 나왔지만 오씨는 남의 집 일에 웬 참견이냐며 오히려 큰소리였다. 참다 못한 최씨는 관할 파출소 전화 번호를 돌렸다. 최씨의 기억에 따르면 이것이 지난 4월9일 새벽 2시께 상황이다. 그러나 그날 밤 경찰은 출동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1주일 만에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16일 새벽, 이상희씨가 잠든 오원종씨를 칼로 찌른 것이다. 이 사건은 딸 정미숙씨의 대리 자수→ 이상희씨의 진실 폭로 및 재수사→ 어머니 구속과 딸 석방으로 이어지며 언론으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사건 발생 직후 이상희씨를 면담하면서 사태 진전에 깊숙이 개입하게 된 한국여성의전화(회장 신혜수)는 이번 사건이 사회적으로 주목된 것을 두고 ‘3박자가 잘 맞아떨어진 운좋은 경우’라고 평한다. 비극성(가정 폭력)과 시기(가정의 달), 극적 요소(뒤바뀐 살인범)가 맞물려 사회에 동정 여론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운 좋은 경우’ 차원에서 마무리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한국여성의전화측의 확고한 입장이다. 신혜수 회장은 경찰이 가정 폭력에 대해 바른 인식을 가지고 자기 직무에 충실했다면 이번 사건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앞서 소개한 이웃 최씨의 신고가 있기 전에도 여러 차례 숨진 오원종씨를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다고 정미숙씨가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질을 사생활로 보는 경찰은 직무유기”

정씨에 따르면 부산에 있는 본부인과 정씨 사이를 왔다갔다하던 오원종씨는 지난 4월1일부터 숨진 16일까지 보름 남짓한 기간 시흥 정씨 집에 붙박혀 있으면서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경찰에 신고를 당했다. 시흥시에는 은행·소래 두 군데 파출소가 있다. 이 중 정씨가 경영하는 실내 포장마차는 소래파출소, 사는 집은 은행파출소 관할 지역이다. 이웃 최씨가 은행파출소에 오씨를 신고하기 전에도, 한번은 정씨의 포장마차에서 오씨와 시비가 붙은 손님이 오씨를 신고하고, 또 한번은 오씨가 정씨를 칼로 위협하던 중 어머니 이상희씨가 그 칼을 빼앗아 도망가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연행된 지 각각 10분·1시간 만에 오씨가 풀려났다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오씨를 연행한 소래파출소 관계자는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씨를 풀어주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정씨는, 신고 당시 어머니는 며칠 만이라도 마음 편하게 살도록 그 사람을 수감해 달라고 애원했다면서, 파출소에서 쉽게 풀려난 뒤 오씨가 ‘내가 쉽게 잡혀들어갈 사람 같으냐’ ‘한번 더 신고했다가는 집을 몽땅 불질러 버리겠다’고 협박하며 더 심하게 매질을 하곤 했다고 주장한다.

특히 은행파출소쪽은 이웃 최씨의 신고 전화를 받은 사실 자체도 부인하고 있다. 파출소의 한 경위는 전화국 통화 기록을 떼 보면 알 것 아니냐고 강변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미숙씨의 또 다른 이웃 강 아무개씨(41·여)는 “신고 당시 최씨가 흥분해 말을 못이어 내가 전화를 대신 받아 집 위치를 자세히 설명해 줬다”라고 증언했다. 전화국 기록을 확인한 결과, 최씨는 4월9일 새벽 2시23분부터 3분여 동안 ‘694-0112(은행파출소 전화 번호)’와 통화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여성의전화를 포함한 여성·시민 단체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서두르는 한편(63쪽 관련 기사 참조), 가정 폭력에 대한 경찰의 대응과 처리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점을 부각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가정 폭력을 방지할 법적·제도적 틀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현재로서 경찰력은 가정 폭력을 막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난 9일 광명경찰서 앞에서 시위를 벌인 데 이어, 16일 경찰의 직무 유기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고 관할 소래·은행 파출소장 문책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들 파출소장은 지난 10일께 각각 보직 발령을 받고 전출한 상태이다. 이들을 전보 발령한 이유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 광명경찰서는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는 정확한 진상을 조사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

가정 폭력은 외부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주에서 가정폭력방지법을 채택하고 있는 미국 같은 나라도 가정 폭력이 외부에 알려지는 경우는 22%밖에 안된다는 정부 통계가 나와 있다(1986). 심지어 ‘가정 폭력은 외부로 드러내기보다는 가정 내에서 처리해야 한다’(75.4%)는 인식이 대다수인 한국에서(92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여러 차례 신고를 시도한 정미숙씨는 상당히 예외적인 경우이다. 문제는 이를 받아들이는 경찰의 태도이다. ‘이번 이상희씨의 살인은 경찰이 조장하거나 심지어 공모한 것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라고 맹공하는 이종걸 변호사는, 폭행 현장에서 아내 또는 이웃이 폭력 남편을 신고해도 가정 문제라는 이유로 입건조차 하지 않는 예가 대부분이라며 가정 폭력에 소극적인 경찰의 대응 태도를 꼬집는다. 매를 맞아 생긴 상처를 근거로 고소를 제기해도, 신속을 요하는 사건을 처리하는 형사과가 아닌 조사과가 조사를 맡아 시기를 지연시킴으로써 고소인의 의지를 꺾고 고소 사건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경찰은 가정 폭력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사생활을 침해할 우려’를 든다. 그러나 이종걸 변호사는 “경찰 수사권이 침해해서는 안될 사생활이란, 법규를 위반하지 않은 순수하게 사적(私的)인 행위를 지칭하며, 따라서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해 형법상 범죄 행위를 구성하는 구타 행위를 순수하게 사적인 행위로 간주해 경찰권 행사를 거부하는 행위는 직무 유기에 속한다”라고 반박한다. 그런 의미에서 ‘진작 경찰 아닌 여성단체에 도움을 요청했더라면 어머니의 살인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정미숙씨의 한탄은 역설적이다. 사생활 ‘존중’을 앞세운 경찰이 결국은 개인의 삶을 ‘파괴’하고 만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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