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장성 '홍길동 잡기' 경주
  • 강원 강릉/전남 장성·成耆英 기자 ()
  • 승인 1997.04.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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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강릉·전남 장성, 연고지 주장하며 줄다리기… 각기 기념 사업 추진 서둘러
홍길동(洪吉童). 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남성 3인칭이다. 구청이나 동사무소 어디를 가서 보아도 민원 서류 견본 양식에 적힌 남자 이름 중 열에 아홉은 홍길동이다. 그만큼 그는 노소를 불문하고 한국인을 대표하는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홍길동이 실제 인물인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다. 물론 그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관심의 대상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홍길동이 서로 자기네 고장에서 태어났다고 두 자치단체가 논쟁을 벌이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홍길동 고향 논쟁을 벌이고 있는 곳은 강원도 강릉시와 전라남도 장성군이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 3월 말, 소설 <홍길동전>의 작가 허 균의 고향으로 알려진 강릉시가 홍길동을 강릉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상징 로고와 마스코트를 현상 공모하면서 일어났다.

그러자 <연산군 일기>와 <해동이적> 등 역사 문헌과 자기네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근거로 삼아 홍길동의 생가 터가 군내에 있다고 주장해 온 장성군이 제동을 걸고 나섰다. 장성군 역시 홍길동 생가 복원 등 대대적인 ‘홍길동 기념 사업’을 벌이려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강릉시는 예기치 못했던 장성군의 반응에 당황하면서도 애써 맞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애초 이 문제가 처음 불거졌을 때 양쪽 자치단체가 보인 첫 반응은 한마디로 황당하다는 것이었다. 홍길동 기념 사업을 지난 3월 처음으로 제안해 포상까지 받았던 장성군 변범석 사회복지계장은 “95년 장성군이 군의회 답변을 통해 이미 홍길동 생가 복원 사업 계획을 밝혔고 최근 이를 구체화했는데 강릉시가 홍길동을 자기네 상징물로 만들겠다니 어처구니없다”라고 말한다. 게다가 88년에 이미 장성문화원 관계자들이 현장 답사를 해서 홍길동 생가 터로 알려진 황룡면 아곡리에 생가뿐만이 아니라 ‘길동샘’이라고 불리는 우물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혔다는 것이다.

사정은 강릉도 마찬가지이다. 지난해부터 이미 강원도가 주관하는 ‘강원의 얼 선양 사업’의 하나로 홍길동 기념 사업을 추진해 왔다는 것이다. 심기섭 강릉시장은 “관선 시장 시절이던 94년에 내가 구상해 제안했던 것이고, 12대 국회의원 시절 마스코트를 만들기 위해 개인적으로 아는 미술대 교수에게 용역까지 줬던 적이 있다”라며 자기들이 먼저임을 분명히했다.

“허 균 고향이 연고지” “전설이 증명” 주장 대립

강릉과 장성이 계획하고 있는 기념 사업 내용은 설명만 들어도 그럴듯하다. 강릉시는 이번 현상 공모를 시작으로 3억5천만원을 들여 소년 홍길동 선발대회를 열고, 홍길동 동상과 기념관을 건립해 홍길동을 강릉의 상징 인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허 균의 부친인 선조 때 문신 허 엽(1517~1580)이 살던 강릉시 초당동의 고가옥(강원도 문화재 자료 제59호)을 허 균의 생가로 복원하고, 터만 남아 있는 강릉시 사천면 애일당(허 균의 외가)을 복원한다는 계획도 포함하고 있다. 경포호 바로 옆에 있는 이 고가를 허 균의 생가로 복원·정비하면 훌륭한 테마 파크를 만들 수 있다는 계산이다. 이 곳에서 송림이 우거진 해안 도로를 따라 5㎞쯤 떨어져 있는 곳에 허 균 문학비와 애일당 터가 있다. 여기에다 그 반대편에는 94년 완공한, 허 균·허난설헌을 기리는 ‘오누이 문학 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 유적들을 공간적으로 잘 연계하면 해마다 경포대를 찾는 천만명 가까운 관광객에게 행락 도시만이 아닌 문화 도시 강릉의 이미지를 심을 수 있는 환상적인 관광 상품이 되리라는 것이 강릉시의 야무진 구상이다.
장성군도 황룡면 아곡1리에 있었다고 알려진 홍길동 생가를 복원해 주변에 산재해 있는 필암서원·동학농민혁명전승기념탑·장성댐 등과 영화 <태백산맥> 촬영지에 마련하고 있는 영화 마을 조성 사업 등과 연계해 대규모 관광 벨트를 꾸미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이미 홍길동생가복원사업추진위원회까지 구성했다. 김흥식 장성군수도 이를 위해 4월 중에 추경 예산안을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두 자치단체가 서로 ‘홍길동은 우리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어디에 있을까.

장성군 황룡면 아곡1리에는 예로부터 홍길동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고 한다. 홍길동 생가 터로 알려진 곳에는 집터로 보이는 40여m 길이의 축대가 있고 주변에는 가는 대나무가 빽빽하게 둘러 있다. 이를 두고 마을 사람들은 홍길동이 관군의 습격으로부터 거처를 보호하고 유사시 반격하기 위해 화살 재료로 쓰이는 전죽(筌竹)을 심어 놓은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 곳에서 2백여m 떨어진 곳에는, 지금은 사용되지 않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즐겨 마셨던 샘터가 있다(이 샘을 ‘길동샘’이라고 불렀다고 장성군측은 주장한다). 이 샘은 여름에는 이가 시릴 정도로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기로 유명하다. 아곡1리 주민 채재순씨(80)는 자기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는 것도 순전히 그 샘물을 먹고 자란 덕분이라고 말한다. 89년 이 곳의 생가 터를 답사했던 정상균 교수(서울시립대·국문학)도 “당시 촌로들은 ‘길동이 땅을 끌어당겨 장성에서 무등산까지 두 걸음에 내달았다’는 전설을 증언했다. 일제 때는 이 곳에서 홍길동 영화를 찍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오고 있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만 갖고 황룡면 아곡리 일대가 홍길동이 태어나 자란 곳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아직까지 근거가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이 곳 주민들도 홍길동의 존재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지는 못한 것 같았다. 이 곳에서 50년 넘게 살았다는 아곡1리 주민 임봉수씨(57)는 “우리 마을에 있는 샘의 물맛이 워낙 좋아 즐겨 마신 것은 사실이지만, 이를 길동샘이라 불렀다는 말은 처음 듣는다”라고 말했다. 홍길동이라는 인물의 비중에 비하면 전설 내용이 그리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지적도 있다. 장성군측도 이런 점을 의식해 사업 시행 전에 학술 심포지엄을 열어 역사 고증을 거친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강릉시는 홍길동 자체가 가상 인물인 이상 작가 허 균의 고향인 강릉이 곧 홍길동의 무대요 고향이나 다름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허 균의 친가와 외가가 모두 유적으로 강릉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역시 과연 허 균이 실제로 초당동 고가에서 태어났는지는 아직 입증된 바 없다.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 고가는 6·25 직후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을 건축학자인 이광노 전 서울대 교수가 매입해 개인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형편이다. 강릉시나 강원도가 내세우는 것만큼 이 허 균 생가도 제대로 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상품권 등록 둘러싸고 법적 대립 가능성도

전문가들은 어느 지역에서도 홍길동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것은 과거 시대 상황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진단한다. 허 균이나 홍길동 모두 관(官)의 시각에서 보면 역적이어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특히 유림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던 강릉에서 반역죄로 몰려 처형된 허 균을 재조명한다는 것은 유림과의 정면 충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강릉을 대표하는 인물은 오직 율곡이라는 데 아무런 이견이 없었고, 매년 실시하는 ‘율곡제’가 유일하게 권위를 인정받는 행사였다. 강릉시 김흥술 학예연구사는 “그동안 허 균의 사상이나 문학을 기리는 행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단오제 행사 중 ‘교산(蛟山·허 균의 아호) 백일장’ 정도였다”라고 말한다. 허 균의 사상을 혁명적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유림 분위기 탓이었다. 이런 강릉 지역의 전통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최근 허 균의 사상과 홍길동의 활약상이 제대로 평가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지방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을 의미한다.

홍길동 소유권을 둘러싼 두 자치단체의 갈등과 경쟁이 물밑에서 뜨거운 가운데, 한켠에서는 두 지역이 소모적인 논쟁에만 휘말려 있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설성경 교수(연세대·국문학)는 “홍길동이라는 실존 인물에 대한 추모 사업은 장성에서 하고, 작가 허 균에 대한 기념 사업은 강릉에서 하자”라는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이 사업들을 연계해 전라도와 강원도의 교류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현재 홍길동 연고권 논쟁에 먼저 불을 붙인 장성이나, 예상치도 않고 있다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강릉이나 이 논쟁이 그리 싫지 않은 표정들이다. 자기 고장을 ‘홍길동 마을’로 선전하는 홍보 효과를 자연스레 거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런 논쟁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눈치이다.

그러나 강릉이 오는 8월 말까지 로고와 마스코트를 공모해 늦어도 10월 중으로 홍길동 관련 캐릭터를 확정한다는 방침을 정해 놓고 있어, 이를 상표권으로 등록하게 되면 법적 논란으로까지 비화할 전망이다. 심기섭 강릉시장이나 김흥식 장성군수도 그 가능성을 이미 공언하고 있다. 두 지역의 문화계 인사들은 이 논란이 ‘논쟁’이 아닌 ‘분쟁’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우려하며, 논쟁이 지역의 문화적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것이 ‘문화 유산의 해’에 걸맞는 생산적인 논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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