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까지 간 철거반 만행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5.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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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여성 속옷 벗기고 연탄재 뿌리는 만행…“성폭력 엄벌하라”
지난 4월25일 오전 8시쯤 서울 봉천동 근화병원 응급실에 여자 환자 한 사람이 실려 왔다. 두 사람의 부축을 받고 들어선 환자는 물에 흠뻑 젖은 데다 흙탕물에서 뒹굴다 온 듯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철거반원들한테 맞았다’는 보호자들의 설명을 귓전으로 들으며 환자 옷을 벗기던 간호사 김은주씨는 깜짝 놀랐다. 환자의 바지는 말할 것도 없고 속옷 안까지 온통 연탄재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지존파 때보다 더한 범죄’라는 철거민들의 분노를 낳은 이 철거 폭력의 희생자는, 봉천6동 철거민대책위원회(철대위) 위원장을 맡고 있던 전 아무개씨(40)였다.

전씨는 이 날 오전 6시께 ‘철거반원들이 철대위 사무실을 부수고 있으니 빨리 오라’는 철대위 회원 이혜선씨의 전화를 받고 집을 나섰다가 변을 당했다. 철대위 사무실에 도착할 무렵 옥상에서 망을 보던 철거반원이 ‘저년 잡아라’ 하고 소리를 치자 골목 여기저기서 뛰어나온 철거반원 20여 명이 전씨를 에워쌌다. 구석에 몰린 전씨는 사정없는 주먹과 발길질 세례를 받았다. 아랫배를 맞은 전씨가 배를 움켜쥐며 땅바닥에 쓰러지자 철거반원 한 사람이 전씨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내렸다. 급히 뛰어나오느라 걸쳐 입은 고무줄 바지는 쉽게 벗겨졌다. 전씨가 맞고 있던 골목 안에는 연탄재를 버리는 쓰레기통이 있었다. 철거반원들은 연탄재 하나를 꺼내 부수더니 전씨의 벗겨진 아랫도리에 뿌렸다.

전씨는 당시를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얘기한다. 저항은커녕 ‘다시는 여자 구실을 못하게 해주겠다’‘회칼로 회를 떠 버리겠다’는 등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폭언을 예사로 내뱉는 철거반원들 앞에서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에 질려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 철거반원들은 회칼·쇠파이프·해머 따위로 무장하고 있었다.

전씨가 폭행 당한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철거민연합(의장 양해동)은 즉각 성명서를 발표하고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여성단체들도 여기에 합세했다. 특히 여성단체들은 지난해 4월부터 시행된 성폭력특별법(성폭력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으로 철거반원들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씨 사건 이전에도 여성 철거민에 대한 철거반원들의 성 폭력은 수시로 있어 왔다. 강제 철거 과정에서 철거반원이 여성의 머리채를 휘어잡거나 옷을 찢는 일은 다반사라는 것이 철거민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낮에 주부 혼자 지키는 집에 불쑥 들어와 ‘언제 이사 갈거냐’고 협박하거나 ‘딸 조심하라’는 등 성적 폭언으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지난해 4월19일에는 서울시 행당2동 재개발 지역에서 한 철거반원이 팬츠만 입은 채로 야구방망이를 들고 돌아다녀 여성들을 공포에 떨게 한 적도 있다.

TV에 얼굴 나와 정신 피해 더 커

그러나 철거반원들이 처벌 받은 예는 거의 없다. 철거반원을 폭력 혐의로 고소하면 대개 이들도 맞고소해 쌍방 피해로 처리되기 일쑤이다. 법적인 처벌이 뒤따르지 않으므로 철거반원들의 폭력은 더욱 흉포해지고 대담무쌍해진다.

“모든 폭력은 나쁘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히 이번 사건은 여성의 성적 수치심을 건드려 ‘성’을 통제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매우 악질적이다”라고 한국성폭력상담소 노주희 실장은 지적한다. 이들을 엄격하게 처벌해야만 ‘여성 노동자만큼의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는’ 여성 철거민에 대한 인권 유린에 쐐기를 박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전씨는 현재 전치 3주의 진단을 받고 사당의원에 입원해 있다. 다행히 자궁은 손상되지 않았다는 것이 병원측 설명이고, 외음부 바깥쪽에 난 따끔거리는 물집들이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겠지만, 그보다 전씨를 아프게 하는 것은 정신적 상흔이다.

특히 폭행 사건이 있은 다음날 한 텔레비전 방송의 9시 뉴스에 전씨 얼굴이 정면으로 나오는 바람에 전씨는 친지들 앞에서 얼굴을 들 수가 없게 됐다. 전국철거민연합과 여성단체들의 지원에 힘입어 이번 사건에 대한 법적 대응을 준비하면서 전씨는 어두운 얼굴로 얘기한다. “가난이 서러운 적은 없었다. 다만 현실이 서러울 뿐이다.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질 수 있는 현실이 정말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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