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들, 해방구 버리고 어른 세계 침투
  • 성기영 기자 ()
  • 승인 1996.08.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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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들, 돈암동 떠나 노원역 부근 집결…그들만의 세상과 성인 문화 ‘공존’
 
서울 돈암동 성신여대 입구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10대 문화가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북상하고 있다. 그 중간 기착지는 미아삼거리역을 끼고 있는 대지극장 뒤쪽. 10대 문화의 물결은 신일고등학교가 있는 미아역이나 쌍문역쯤에서 잠깐 파고를 조정했다가 상계동 노원역 부근에서 가장 큰 굽이를 만든다. 아이들은 이제 또래 문화를 찾아 돈암동까지 남하할 필요가 없다. 이곳에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니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아직도 돈암동을 다니는 게 쪽팔려서’이다.

돈암동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10대의 거리가, 이 거리의 주인이었던 성신여대생들도 적응하기 어려웠던 10대들만의 공간이었다면, 미아삼거리·수유·노원 역 주변으로 넓게 펼쳐진 문화권은 엄밀하게 따지면 그들만의 공간은 아니다. 이 지역은 역세권 주변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밀집한 지역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10대들이 아무 저항을 받지 않고 어른들의 문화로 진입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옳다.

이들 지하철역은 이미 4호선 1단계 개통 구간인 한성대 입구∼상계역 중에서도 가장 이용객이 많이 드나드는 역들이다. 하차 인원만 따져도 노원역이 4만1천여 명, 수유역이 4만5천여 명, 미아삼거리역이 3만8천여 명이다. 4호선 구간 중 비교적 유동 인구가 적은 한성대입구역이나 미아역에 비하면 곱절이 넘는다.

행정 구역 상으로 상계2동과 상계7동인 노원역 주변은 그런 모습을 단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곳이다. 이 지역 주변으로는 1단지부터 19단지까지 있는 주공아파트만 각 단지당 2천여 세대씩 무려 4만여 세대가 사는 아파트 단지가 넓게 퍼져 있다.

 
“교복 입고 당당히 술 주문할 수 있는 곳”


노원역 주변이 북적거리기 시작한 것은 92년 미도파 백화점이 들어서면서부터라는 것이 주민들의 한결같은 말이다. 주말이면 2만명이 넘는 사람이 드나드는 이 대형 백화점이 들어서면서 급격하게 팽창하기 시작한 상권은, 상계 2동과 7동 지역에 대형 음식점·나이트클럽·단란주점 등 유흥업소를 수백 개 양산했다.

10대들이 이곳으로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어른들 문화에 섞여 버림으로써 역설적으로는 어른들의 감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거리의 10대들에게 단연 인기가 있는 곳은 노래방·커피숍·호프집이다.
상계2동 ‘순대 타운’도 10대들이 마음놓고 찾는 곳이다. 스포츠센터 건물 한 층을 메우고 있는 이 순대집들은 흡사 서울대 앞 신림사거리의 ‘순대시장’을 연상시킨다. 10대들이 이곳을 자주 찾는 이유는 또래들만 모이는 탓도 있지만 ‘달라면 그냥 주는’ 술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곳을 가끔 찾는다는고교 2학년 여학생은 “교복을 입고 가도 당당히 술을 시킬 수 있어 이곳을 자주 찾는 것 같다”라고 말한다. 보충 수업이 끝나고 교복을 입은 채 이곳을 찾는 10대들이 빠져 나가면 사복 부대가 다시 이곳을 점령하지만 옷 모양만 바뀌었을 뿐 이들의 행선지는 똑같다.

저녁 무렵 10대들이 가장 부담 없이 찾는 곳이 노래방이다. 밀폐된 공간이기 때문에 아무런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밤 9시쯤 친구 2명의 생일 파티를 하러 이 거리로 나온 여고생 4명은 눈썹부터 입술까지 완벽한 화장술을 자랑했다. 평소에는 배꼽티에 슬리퍼를 신고 나오기도 하지만, 이 날만큼은 생일 파티를 하기로 한 날이라 미니 스커트에 하이힐, 발목에 걸치는 은빛 액세서리까지 꽤나 ‘신경을 쓴’ 편이다. 그 중 한 아이는 왼쪽 어깨에 딸기 모양의 ‘보디 페인팅’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들은 거리로 나오자마자 같은 수의 ‘오빠들’과 짝을 맺었다. 커피숍·호프집·노래방을 ‘순서에 따라’ 한번씩 거친 이들은 오전 1시반쯤에서야 ‘이제 슬슬 집에 가 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물론 오빠들의 삐삐 번호만큼은 잊지 않고 적어 놓았다. 오빠들은 고3이라고 했다.

비디오방에서 포르노 ‘감상’

이 소녀들은 돈암동과 화양리, 강남역·신촌 등 ‘물 좋은’ 곳 치고 안 가본 데가 없다. 그러나 신촌에 가자니 언니들 때문에 ‘꿇리는 것 같고’, 돈암동에 가자니 ‘쪽팔리는 것 같아’ 이 거리를 택했다고 한다. 이 소녀들에게 얼굴 화장은 기본에 속한다. 10대들은 ‘화장〓탈선’이라는 판에 박힌 공식을 거부한다. 이 점에는 ‘범생’(이들은 모범생을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들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교복을 입고 나온 여고 2학년생들도 “화장은 개성 아니냐”라고 말한다. 물론 학교에서 화장품을 들키는 순진한 아이들은 없다. 한 아이는 자기가 상업 학교에 다닌다는 전제를 달면서 “우리 반 아이들 중 길거리 다닐 때 화장 안하는 애들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소녀들의 장래 희망은 연예인이다. 한 소녀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했고 또 다른 소녀는 CF 모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 굳이 학교에 다닐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래도 학교는 마쳐야 하지 않겠느냐”라고 되물었다. 의미를 찾기는 힘들지만 집에서 거주하는 한 가족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는 식이다.

이 거리에도 물론 나이트클럽이 있다. ‘○○ 비즈니스 클럽’이라는 간판을 단 성인용 클럽 바로 옆에 있는, 20대 이하만 드나들 수 있는 디스코테크이다. 비행접시 입구와 흡사한 출입문을 웨이터가 리모컨으로 열어 주어야만 입장할 수 있는 이 나이트클럽은 무엇보다 ‘물 관리’가 철저하다. ‘물이 나쁘다’고 소문 나면 손님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나이트클럽에서는 그래서 20대 후반 손님이 오면 물을 흐리지 않기 위해 ‘홀’보다는 ‘룸’을 권하는 편이다. 이 클럽의 꽃은 물론 부킹이다. 그러나 촌스럽게 한 번 부킹으로 ‘어떻게 해보려는’ 순진파는 거의 없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여자들도 그냥 ‘술 한잔 얻어 먹고 싶어’ 부킹에 응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남자 아이들도 그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거리에서 만난, 패션 선글라스를 쓴 고1 남학생이나 성조기가 새겨진 두건을 쓴 중3 남학생도 여자 아이들을 ‘꼬시기’ 위해 그렇게 적극적이지는 않다. 자기들끼리 노래방에서 놀다가 밤10시쯤 집에 가는 길이라던 이들은 주로 비디오방을 많이 이용한다.

역 주변 골목골목마다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있는 비디오방은 집을 나왔거나 갈 곳이 마땅치 않은 아이들에게는 둘도 없는 은신처가 된다. 둘이 들어가서 5천원만 내면 비디오 한 편을 다 보고 아침까지 하루를 ‘죽이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아침이 되면 잠을 깨워 줄 뿐 밤새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하든 간섭하는 사람이 없어 좋다는 것이다. 한 비디오방 주인은 “따로 돈을 받고 재워 주는 경우도 있지만 손님이 많을 때는 시간이 없어 빨리 방을 빼야 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여자 친구가 있으면 비디오방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기도 한다. ㄷ상고 1학년이라는 한 학생은, ‘한 반에서 열 명 정도 빼고는 비디오방에서 한 번씩은 자 보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요즘 비디오방에서는 웬만한 단골이 아니면 도색 필름은 잘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열일곱 살인 한 아이는 포르노를 보고 싶을 때는 비디오방 주인과 자신들끼리만 통하는 암호가 있다고 귀띔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이는 경찰이 단속을 나올 때마다 업주들이 불을 끄고 숨겨 주었던 경험도 이야기해 주었다.

 
역 주변 비디오방 외에도 10대들이 갈 곳은 많다. 중심부 단속이 심해지면 변두리 비디오방을 찾고, 거기에도 단속의 손길이 미치면 주변의 어린이 놀이터를 찾는다. 돈암동 등과 달리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즐비해 어린이 놀이터가 없는 데가 드물기 때문이다. 놀이터나 정자에서 더위를 식히던 어른들이 저녁 무렵 집으로 들어가고 나면 그곳은 이들의 차지가 된다. 소주방이나 노래방의 영업이 끝나는 시각에 이들이 뭔가 아쉬워 찾는 곳은 또 있다. 지난해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편의방’이 그곳이다. 24시간 편의점을 변화시킨 이 편의방은 한쪽 구석에 간단한 식·음료 등을 갖춘 넓은 홀을 마련해 놓고 있다. 업소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테이블 10∼20개가 있기 때문에 영업 시간에 쫓기지 않고 먹고 마시는 데는 여기처럼 좋은 곳이 없다.

이 거리에서 만난 10대들의 특징 중 하나는 사진 찍히는 것을 전혀 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메라를 들이대면 이들은 손가락으로 ‘V’를 그리기도 한다. 그만큼 자기 표현에 거침이 없다. 적당한 포즈를 취하는 적극파도 있다. 이들에게 자기들의 행위는 탈선이 아니다. ‘개성 표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같았다.

이 거리의 가장 큰 특징은 성인들의 문화와 10대의 문화가 아무런 불협 화음 없이 거의 완벽하게 공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곳은 돈암동처럼 10대들만의 공간이 아니다. 10대들은 이곳에서 비로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문화권을 비집고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이곳에서만큼은 10대들이 더 이상 돈암동 같은 자기들만의 거리를 고집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성인용 나이트클럽과 어른 출입 금지 나이트클럽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그렇고, 대형 냉면집과 소주방이 간판을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그렇다. <스피드>나 <꿍따리 샤바라>처럼 최근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10대들의 노래가 울려퍼지는 골목 한켠으로 ‘신장 개업’이라는 표지를 비스듬하게 붙여 놓은 이발소가 서너 개씩 짝지어 있는 모습도 그랬다.

그러나 이 거리에 이들을 꾸짖을 어른들은 없다. 어른들은 길 건너에서 다른 형태의 유흥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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