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 앞둔 포철의 선심 공세
  • 부산/박병출 (pbc@sisapress.com)
  • 승인 1995.06.1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방선거 앞두고 선심 공세 잇달아 ‘의혹’… “경질설 나돈 김만제 회장 면책용” 시각도
5월29일 포항의 축구 전용 구장에서는 ‘포항 아톰즈’팀 출범을 기념한 국가대표팀 초청 축구 경기가 열렸다. 이 날 포항제철은 84년 창단 이래 국가 대표를 47명 배출하고 네 차례나 우승을 차지한 명문 구단 포철 아톰즈를 ‘조건 없이’ 포항 시민들에게 내놓았다. 시민 구단으로 운영될 포항 아톰즈가 재정 면에서 자립할 때까지 운영비는 계속 포철이 대기로 했다.

포철은 포항 지역에 축구단 외에도 큼지막한 선물 보따리를 잇달아 풀어내고 있다. 그런데 그 시기가 4대 지방 선거를 앞두고 집중돼 묘한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민자당을 대신한 득표용 선심 공세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다.

5월12일 타결된 어민 피해 보상은 ‘선심 의혹’의 첫 번째 사례로 꼽힌다. 포철은, 공해로 어획량이 격감했다며 보상을 요구하는 어민들과 지루한 줄다리기를 해왔다. 87년에 어민들이 요구한 금액은 3백억원이었다. 용역 조사 결과를 근거로 당초 11억원 선을 제시했던 포철은, 8년 만인 이 날 결국 2백억원짜리 합의 각서에 서명했다. 그 가운데 40억원은 어민소득증대사업 기금, 10억원은 어민자녀장학기금 명목이다. 이 50억원은 보상금이라기보다 김만제 회장이 강조하는 ‘지역 협력사업’ 범주에 속한다.

어민 피해 보상 타결 1주일 만인 5월19일에도 2백억원 규모의 지역 협력사업 계획이 발표됐다. 김만제 회장은, 포항시가 10만~15만평의 부지를 제공하면 포철이 2백억원을 들여 휴양·문화·체육 시설을 건립해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민자당이 포철 이용해 금권선거”

다시 1주일 만인 5월25일에는 김회장과 김의환 포항시장이 헬기를 타고 부지 물색에 나섰다. 시민들에게 금방이라도 공원이 솟아오를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줄 정도로 ‘일사천리’였다. 포철은 본사 서울 이전설을 잠재우기 위해 포항 신본사 건립을 결정했고, 그 부지도 포항시에게 정해 달라고 요청해 둔 상태이다.

포철측은 일련의 사업이 우연히 선거 시기와 맞물렸을 뿐 정치적 의도는 없다고 강조한다. 홍보실 관계자는 “어민 피해 보상은 김회장이 타결 시한을 지난해로 정한 일이므로 오히려 늦어진 것이다. 시민 공원 조성도 93년 정명식 회장이 약속한 사항이다”라고 말했다.

축구단을 시민 구단으로 전환하는 일은 실제로 지난해부터 추진돼 왔다. 김만제 회장은 재창단 일정을 94년 12월로 잡고 시민 법인 구성을 서둘렀으나, 포항 출신 허화평 의원(민자당)의 반발로 좌절됐다. 허의원은 지역에서 사전 논의를 거치지 않은 채 구단 사장을 인선했다는 이유로 강력히 불만을 나타냈다. 김회장이 사장으로 내정했던 이대공씨(전 포철 부사장)가 이진우 전 의원(민자당)의 동생이어서, 양측의 대립은 더욱 관심을 모았다. 허의원은 14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포항 시민과 포철의 대결’이라는 구호로 이씨를 누른 뒤 민자당에 입당했다.

인선을 둘러싼 잡음이 구구한 정치적 해석을 낳으며 확대되자, 포철은 시민 구단 창립을 96년으로 유보하겠다고 밝혔다. 따라서 이번의 포항 아톰즈 출범은 계획보다 반년 이상 앞당겨진 셈이다.

행사를 선거 일정에 맞춰 조절한 징후는 다른 곳에서도 발견된다. 포철이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마련한 ‘한마음 축제’가 그것이다. 지난해에는 7월에 치렀던 이 행사를 올해는 6월로 앞당겼다. 이 모든 일을 포철의 주장대로 ‘우연’으로 돌리기는 어렵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듯 바쁘게 움직이는 포철의 의중은 무엇일까. 야당측은 민자당이 포철의 손을 빌려 금권 선거에 나섰다고 비난한다. 정부 투자기관인 포철이 고위층과의 사전 협의 없이 수백억을 특정 지역에 쏟아부을 수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민주당 포항시지구당 권기원 사무부국장은 “여건상 포철은 이번 지방 선거에서 민자당의 대리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정도가 지나친 것 같다”고 말했다.
포철의 최근 행보를 선거와 연관지으면, 그 발단은 몇 달 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포철이 지난 3월의 ‘실책’으로 확실한 민자당 표를 대량으로 잃어버린 후, 그 책임 때문에 발벗고 나서게 됐다는 해석이다.

포철은 3월1일자로 45세 이상 장기 근속자 1천4백12명을 명예 퇴직시켰다. 회사측은 ‘본인들의 희망’임을 강조하지만, 퇴직자들은 ‘무언의 강요’에 의한 것이었다는 상반된 입장이다. 퇴직자 모임인 ‘포명회’(포항제철 명예퇴직자 협의회)를 회원들이 ‘3·1동지회’라 부르는 사실이 이들의 심정을 잘 나타내 준다. ‘3월1일에 집단 숙청 당한 동지’라는 자조 섞인 말이다.

퇴직자들은 회사에 대해 배신감을 갖고 있다. 청춘을 바쳐 15~20년씩 일한 창업 세대를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명예 퇴직 방침은 발표에서부터 시행까지 20일이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기습적으로 추진됐다. 사회 적응 프로그램 등 배려는커녕 아무런 예고도 없었다. 오히려 2년 간은 계열사 취업을 금한다는 단서 조항까지 만들어 퇴직자들의 진로를 더 좁혀 놓았다.

명예 퇴직자는 ‘反 민자, 反 만제’

더욱이 퇴직금 누진제가 적용되지 않은 데 불만을 품은 퇴직자들이 집단 소송을 제기하는 등 퇴직자들이 ‘반(反) 민자, 반(反) 만제’라는 새로운 정서 집단을 형성하자 포철은 여권의 따가운 눈총을 받게 됐다. 지난 3월 포철에 대한 감사원 감사는 청와대 한이헌 경제수석과의 불화 때문이라는 말이 돌았지만, 최근에는 이 감사가 김회장의 명예 퇴직 ‘악수’에 대한 정치적 경고장 성격이었다는 설이 새롭게 제기되고 있다. 경쟁력을 높이는 차원의 감원 계획은 정부와 사전 협의를 거쳤지만, 시행 시기를 김회장이 단독으로 결정해 ‘고위층’의 노여움을 샀다는 것이다.

감사 직후 포철이 김종진 사장을 위원장으로 한 특별 기구를 설치해 지역 협력사업에 부쩍 열을 올리기 시작하면서, 한동안 나돌던 김회장 경질설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노사 갈등을 빚고 있는 한국통신을 대상으로 5월15일부터 감사를 벌여 감사 종결 다음날인 5월29일 결과를 발표한 감사원이, 포철에 대해서는 2개월이 넘도록 입을 다물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포철 감사 결과 발표 시기는 지방 선거 이후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유력하다. 김회장이 이번 선거에 공을 세워 ‘면책’을 기대한다는 추측도 가능해진다. 5월24일 포철을 방문한 박재윤 통상산업부장관이 김회장에게 고로를 증설하라고 요청하고, 김회장이 즉석에서 98년까지 2조원을 투입해 광양에 제5고로를 짓겠다고 화답하자, 벌써부터 낙관적 결과를 점치기도 한다.

그러나 포철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일련의 선심성 사업이 민자당 표로 직결될 것인가에는 회의적 반응이 많다. 포항 지역의 정치 구조가 복잡 미묘하기 때문이다. 포항은 대구·경북에서는 유일하게 ‘TK 정서’라는 잣대가 들어맞지 않는 지역이다. 굳이 재단하자면, ‘반(半) 민자 반(半) 민주’라는 새 눈금이 필요하다. 포항은 경북 지역인데도 민자당 실세 최형우 의원의 영향권에 들어 있고(최의원은 인근 울산 출신이고 처가가 포항이다), 민주당 이기택 총재의 고향이기도 하다.

민자당이 포철을 기반으로 하여 경북내 세력권 확장을 노린다면, 민주당은 교두보 확보에 기대를 걸고 있다. ‘경북 인물’ 김윤환 의원에게 호감을 갖고 있으면서도 민자당에 냉소적인 ‘반(半) 민자’ 상당수와, 이총재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으면서도 민주당을 선호하지 않는 ‘반(半) 민주’ 대부분은 사실상 부동표에 가깝다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이번 선거는 무소속에서 민자당으로 돌아선 허화평 의원과 포철의 역할이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박태준 전 회장으로 인해 ‘쓰라린 아픔’을 겪은 포철은 김만제 회장 체제 출범 후 기업윤리강령을 채택해 정치 불개입을 선언했다. 취임 첫해인 지난해 직원과의 인화에 주력한 김회장은 그동안 공·사석에서 여러 차례 ‘취임 2년째의 목표는 지역 화합이다’라고 강조했다. 서로 ‘강건너 동네’로만 인식해온 포철과 지역민 간의 거리감 해소에 대한 특별한 관심 표명이었다. 선거만 아니라면 포철의 활발한 지역 협력사업은 공기업의 바람직한 역할로 자리매김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일거수 일투족이 선거라는 프리즘을 통해 투영되는 까닭은, 포철이 정치적 힘에 무력한 구조적 한계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는 ‘박태준 없는 포철’의 시험대이다. ‘정객’의 자리를 대신한 ‘경영인 김만제’의 홀로서기가 가능할지, 하니면 회오리에 휩쓸려 정치권의 전위 조직으로 전락하고 말지는 선거기간에 분명하게 가려질 것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