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점으로 돌아간 조계종 사태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9.10.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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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집행부 · 정화회의, 서로 '세속법' 끌어들여 내분 조짐
‘무엇이 보리(菩提)냐고 묻자 덕산 스님이 말했다. “가거라, 여기에 똥을 싸지 말라.”’(최승호 <달마의 침묵>)

오늘날 불자들이 종법(宗法)을 묻는다면 노스님은 똑같은 대답을 했을지 모른다. 너도나도 종법을 말하지만 그 바탕에는 종법과 무관한 이해 다툼이 깔려 있다는 것. 이것이 최근 들어 재연될 조짐을 보이는 조계종 분규를 바라보는 일반의 시각이다.

분규 조짐은 10월1일 법원 판결에서 이미 예견되었다. 이 날 서울지법 민사합의 42부(재판장 이수형 부장판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 고산 스님에 대해 ‘부존재 확인 및 직무 정지 가처분’ 판결을 내렸다. 이로써 지난 1월 제29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해, 조계종을 알리는 대외적인 ‘얼굴’로 자리잡았던 고산 스님은 순식간에 그 존재를 부정당하고 말았다.

소송을 낸 이는 지난해 11월 ‘송월주 총무원장 3선 반대’를 내걸며 조계종 총무원 청사를 실력으로 점거했다가 43일 만에 공권력에 해산된 정화개혁회의(정화회의·현재는 정화불자대중연합) 정 영 총무원장. 정화회의는 공권력 투입 이후 조직이 거의 와해된 속에서도 새로 등장한 고산 총무원장 체제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고 따로 총무원을 운영해 왔다.

불교조계종중앙신도회를 비롯한 조계종 관련 단체들은 ‘이번 판결은 한국 불교의 정통성과 자주성을 사법부가 정면으로 짓밟은 폭거’라고 주장한다. 이 때문에 10월12일 열린 사부대중결의대회 구호도 ‘불교 자주권과 종법 수호’였다.

조계종 최고 의결 기구라 할 중앙종회는 정치적 음모설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번에 서울지법이 밝힌 판결의 핵심 근거는 ‘(고산 스님측은) 지난해 12월 총무원장 선거법 개정을 위해 열린 임시 중앙종회가 초종헌적 효력을 갖는 승려대회 결의에 따른 만큼 유효하다고 주장하나, 이 승려대회는 일방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것에 불과한데다, 종회 자체도 제대로 된 공고 없이 개최한 만큼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는 94년 개혁종단이 출범하는 계기가 되었던 승려대회의 합법성을 대법원이 인정했던 사례와 대조된다는 것이 중앙종회의 주장이다. 곧 하급심이 대법원 판결을 뒤집고 새삼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총선을 앞두고 불교계를 길들이려는 정치적 음모가 깔려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승소한 정화회의측이 항소한 까닭

이쯤 되면 의아한 대목이 있다. 지난해 실정법의 힘을 빌린 것은, 다시 말해 정화회의가 점거한 총무원 청사에 공권력을 투입해 달라고 요청한 것은 현 집행부였다. 당시 정화회의측은 ‘세속법의 잣대로 종단 내부 문제에 개입하지 말라’며, 법원의 퇴거 명령을 거부하다 끝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런데 이번에 실정법을 끌어들인 것은 거꾸로 정화회의 쪽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현 집행부가 세속(실정법)의 잣대를 규탄하고 나섰다.

의아한 대목은 또 있다. 서울지법이 판결한 나흘 뒤 고산 총무원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항소를 포기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불교를 철저하게 무시한 재판부 판결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지만, 지난해와 같은 극한적 폭력 상황을 막고 예상되는 혼란과 분규를 최소화하기 위해’ 총무원장 직에서 사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고산 스님은 ‘악법도 법’이라는 정신으로 실정법에 순응하는 ‘자기 희생적 결단’을 내린 것일까. 내막을 알고 보면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다. 이번에 재판부는 고산 스님의 총무원장 직무를 정지시킴과 동시에 도견 스님(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을 직무대행으로 선임했다. 도견 스님은 정화회의가 추천한 인사. 따라서 도견 스님에게 직무대행을 맡겼다가 정화회의 사람들로 선거인단(종회 의원 81명+24개 교구별 선거인단 2백40명)을 물갈이한 뒤 총무원장 선거를 새로 치르리라는 것이 현 집행부의 우려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고산 스님이 항소를 포기하면 1심 판결이 확정되면서 도견 스님의 직무대행 권한이 소멸되고, 종헌 종법에 따라 새로 선거를 치를 수 있다는 것이 현 집행부의 판단이었다. 이에 정화회의측은 새 카드로 맞섰다. 자기네가 오히려 항소하는 방식으로 재판을 연장시키려 한 것. 정화회의는 항소를 위해 재판 청구 취지를 변경했다. △피고(고산 스님)가 임명한 집행부 간부와 본·말사 주지 무효 △종단 예산 중 피고가 지휘 집행한 3억여 원 반환 등이 변경 취지이다.

그러나 재판에서 전부 승소한 쪽이 항소하는 것은 드문 일이다. 극히 제한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대법원 판례이기도 하다. 지난 5일 정화회의는 일단 서울지법에 항소장을 접수시킨 상태. 그렇지만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 법원이 판단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며, 만약 법원이 항소를 기각할 경우 그 동안 직무대행이 행한 직무는 모두 무효가 된다.

그런데도 조계종 현 집행부와 정화회의측은 이미 서로 다른 직무대행 체제를 가동하고 있다. 이른바 조계종 3대 계파라 일컫는 육화회·청림회·일여회가 일제히 현 집행부 지지를 표방한 이상 정화회의가 설 땅은 좁아 보인다. 현재 분위기대로라면 새 선거에서 재추대된 고산 스님이 압승할 것이라는 섣부른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불교계 민심은 칼자루를 쥔 쪽에 쏠리게 되어 있다. 우리가 재판에서 승소한 뒤 24개 교구 본사 주지 가운데 3분의 2 가량이 동요해 전화를 걸어오고 있다’는 것이 정화회의 관계자 말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일반 불자들의 민심 이반이 더욱 가속화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이다. 민심 이반은 조계종이 96년부터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신도 등록 사업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애초에 조계종은 가톨릭 같은 조직적인 신도 관리를 꿈꾸며 이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나 사업을 시작한 지 4년이 되어 가는 99년 10월 현재 등록된 신도는 고작 18만 명. ‘2천만 불자’를 주장해 온 조계종으로서는 맥 빠지는 결과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민심 이반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가. 1차적으로는 거듭된 분규 탓이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종단 개혁에 대한 실망감 때문이라는 것이 김종찬씨(전 <불교신문> 편집국장)의 지적이다. 94년 불교계가 벌인 ‘4·10 전국승려대회’는 87년 민주화 대투쟁에 비견된다. 이 승려대회를 통해 불교계는 부정부패·권력유착으로 얼룩진 서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갈아엎고 개혁 종단을 출범시켰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개혁에 대한 평가는 부정 일색이다. 지난해 9∼10월 김응철 교수(중앙승가대·포교사회학)가 전국의 출가·재가 불자 5백여 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벌였다. 조사에 따르면, 당시 개혁 종단이 내건 5대 실천 이념(정법 구현, 불교 자주화 구현, 종단 운영 민주화, 청정 교단 구현, 불교의 사회적 역할 확대)이 제대로 지켜졌다는 평가는 10% 수준이었다. 특히 ‘청정 교단 구현’에 대한 긍정적 평가는 8% 수준에 머물렀다.

이쯤 되면 ‘개혁을 표방했던 스님들이 주지 자리를 하나씩 꿰차고 앉은 뒤 보여준 행태는 과거와 전혀 다를 바 없었다’는 한 불교 신자의 개탄이 억지만은 아닌 듯하다. 정화회의 관계자는 ‘개혁 종단 들어서도 여전했던 총무원장의 전횡, 일부 지도층 승려의 횡령·도박, 말사 주지직 사고팔기 실태 등을 조계종 내부에서 공론화하고 바로잡자는 것이 애초에 우리가 출발했던 동기’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94년 사태로 중징계를 받았던 구 집권층이 합세하면서 정화회의 전체가 ‘반개혁·폭력 세력’으로 몰리게 되었다는 것이다.총무원장의 인사·재정 권한 축소해야

고산 스님 체제가 출범한 뒤에도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는 것이 교계 안팎의 평가였다. 고산 체제는 과도한 징계와 무원칙한 인사로 구설에 올랐다. ‘멸빈(승적을 박탈하는 것) 같은 극단적인 징계는 최소화하려 노력했다’고 현 집행부는 주장해 왔다. 그러면서도 중앙종회가 지난 7월 전국 7대 총림 가운데 하나인 영축총림을 총림에서 해제한 것은 대화합 정신에 어긋난 처사였다는 것이 실천불교전국승가회 관계자의 지적이다. 영축총림은 지난해 정화회의 세력의 구심 역할을 했던 통도사가 속한 총림이다.

이밖에 고산 스님은 자기 문중 사람이나 상좌를 총무원 주요 보직 또는 직영 사찰 주지로 임명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새로 임명된 인사 중에는 지난해 이른바 ‘불교방송 횡령 사건’으로 물러난 임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같은 인사 파행을 문제 삼아 일여회·청림회 2대 계파는 지난 8월 중앙종회에 불참하기도 했다.

결국 풀지 못한 숙제를 산더미처럼 떠안은 상태에서 조계종은 또 한 번 위기를 맞게 되었다. ‘실리를 좇아 세속법을 끌어 쓰다가, 세속법이 불리해지면 종법의 권위에 기대던’ 지도부의 모순은 이번 판결을 계기로 폭발하고 말았다. 결국 조계종이 살 길은 ‘세속법 앞에서도 정정당당하고 투명한 체계’를 갖추는 것이라고 교계 사정에 정통한 한 불자는 말했다.

조계종 내분의 본질은 ‘잿밥 싸움’이라는 것이 교계 안팎의 정설이다. 그렇다면 ‘말 안 듣는 자식을 길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용돈을 회수하는 것’이라는 격언대로 총무원장 한 사람에게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는 인사·재정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총무원과 전국 본·말사의 예결산 내역을 투명하게 공개하는 구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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