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5세 조기입학으로 과외 열풍
  • 金恩男 기자 ()
  • 승인 1995.1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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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5세 조기 입학 허용으로 ‘열풍’… 교육 여건 부실, 입학해도 문제투성이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에 있는 ㅇ유치원은 지난달 학부모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만 네 살 어린이에게 취학 준비 교육을 시킬 것인지 여부가 간담회의 쟁점이었다. 결론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아이를 이른 나이에 학교에 보낼 필요가 없으며, 따라서 취학 준비 교육도 불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부모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아이가 처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것이 불안의 핵심이었다.

5·31 교육개혁안에 따라 만 다섯 살 어린이의 조기 입학이 가능해지면서 나온 풍경이다. ㅇ유치원은 문제가 순조롭게 풀린 편이다. 일부 유아원·유치원은 부모들의 학습 강화 요구로 속앓이를 한다. 국어·영어·속셈 등 학습 과외 학원들은 ‘만 5세 조기 입학 특수’를 기대하며 ‘조무래기 원생’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프로그램 개발에 골몰하고 있고, 지역에 따라서는 그룹 과외가 성행할 조짐이 보인다. 네 살짜리 아이를 둔 공 아무개 주부(서울 서대문구 홍은동)는 “아파트 게시판에 그룹 과외 희망자를 모집하는 광고가 부쩍 늘고 있다. 오전은 유치원, 오후는 그룹 과외를 받는 아이들이 많다”고 최근의 달라진 분위기를 전한다.

만 네 살 이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그룹 과외는 대개 4~5명으로 이루어지며, 수업은 언어·숫자·과학 영역으로 나누어 진행된다. 기업과 개인이 운영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는데, 부모들은 대개 교육학을 전공한 ‘해외 유학파’ 교사를 선호한다. 액수는 과목당 5만~10만원, 전과목 총괄 10만~30만원으로 지역과 교사에 따라 상당한 편차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학습지 시장도 달아오르고 있다. 삼성출판사 이순영 편집국장은, 최근 들어 유아용 학습지를 구입하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지는 추세라고 밝힌다. 현재 취학 전 어린이를 상대로 한 학습지는 <지능업> <큰생각> 등 종합지능개발용과 <한글나라> <수학박사> 등 과목별 학습지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영어 학습용 교재도 꾸준한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의 교재가 나이 별로 나뉘어 있는 만큼 만 다섯 살 조기 입학에 대한 시행 방안 발표를 앞두고 출판사 간의 눈치 보기도 치열하다. (주)웅진출판의 한 관계자는 “만 다섯 살 교재와 취학 준비용 교재를 따로 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다.
조기 입학 찬반론 팽팽히 맞서

조기 교육 과열 조짐은 만 5세 국민학교 입학 방침이 발표된 직후부터 예견됐다. 교육부는 10월18일 이같은 부작용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생년월일 순으로 입학을 허용하며 △학력 평가나 체력 검사 등 어떤 형태의 검사나 시험도 치르지 않겠다는 ‘5세아 국교 입학 허용 확정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고 해서 과외 열풍이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다. 현행 방침대로라면 내년부터 국민학교 1학년에 만 다섯 살과 여섯 살 어린이가 섞이게 되는데, 그러면 만 다섯 살 어린이의 ‘적응’을 위해 또 다른 과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만 다섯 살 아이의 조기 입학이 타당한지에 대한 논란이 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우선은 조기 교육 자체에 대한 논란이다. 교육학자·교사·학부모 모두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찬반 입장이 나뉜다. 영재 교육을 표방하며 전국에 50여 지부를 둔 ㅅ아카데미 정 아무개 원장은 “아이들 교육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강조한다. 세 살 이전에 두뇌가 완성된다는 학설에 따라 0세부터 교육 프로그램을 두고 있다는 정원장은 “조기에 바른 교육만 시켜준다면 보통 아이 누구나 영재성을 계발할 수 있다. 세계는 급변하는데 우리 제도 교육은 너무 늦게 시작한다”고 주장한다. 소수 정예 유아원으로 유명한 밍키하우스 이순덕 원장도 “현장에서 직접 가르치다 보면 유아원에 들어오는 아이들 머리가 해가 갈수록 좋아지고 있음을 실감한다”며 현행 입학 연령이 현실에 맞지 않음을 지적한다.

이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이원영 교수(중앙대·유아교육)는 80년대 미국에서 일었던 조기 입학 붐 당시 어린 나이로 학교에 입학한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올라가서 자퇴하거나 학습 기피증에 걸리고, 심한 경우에는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는 보고서를 인용하면서 “다섯 살 어린이는 유아 교육 기관에서 놀이와 활동을 할 때 가장 잘 배운다”고 지적한다. ‘참교육을 위한 학부모회’ 오성숙 사무처장 또한 “독일의 경우 유치원에서 학부모를 불러놓고 ‘지금 저 아이들(만 4~5세)에게 문자나 셈을 가르치려 했다가는 성장을 망치고 만다’는 강좌를 하곤 한다”며 조기 교육의 위험성을 경계한다.

특히 만 다섯 살과 여섯 살 어린이가 같은 학급에 공존하게 될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원 아무개 교사(54·전북 ㅈ국민학교)는 “동년배라도 생일이 빠르고 늦음에 따라 학습 능력에 차이가 나곤 한다. 특히 ‘똑똑하다’는 부모의 평가 때문에 한 살 일찍 입학한 아이들의 경우 1학년 2학기가 되면 서서히 힘에 부치는 모습을 보인다”고 말한다. 교육부 또한 전국 6천여 국민학교와 9천여 유치원에 배포한 홍보 전단을 통해, 무리한 조기 입학이 어릴 때부터 같은 집단 내에서 연령 차이로 인하여 자녀의 지도력, 진취성, 원만한 인간관계 형성 등에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학부모들이 신중히 판단하기를 당부한다.

이같은 찬반 논란은 ‘보통의 평균적인 아이’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영재아라면 사정은 다르다. 애초에 5·31 교육개혁안에 만 5세 조기 입학 내용을 포함한 취지도 ‘수학 능력을 갖춘 어린이’에게 교육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현실은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수학 능력을 판별할 객관적 평가 기준이 없고 △시험을 통해 이를 평가하게 될 경우 과외가 성행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를 들어 교육부가 ‘생년월일 순 허용 방침’으로 후퇴하고 만 것이다. 이 때문에 경실련·전교조 등 18개 교육 관련 시민단체로 구성된 ‘만 5세아 국민학교 입학 반대 및 유아교육의 공교육화 추진 연대회의’(연대회의·공동대표 임재택 부산대 교수)는 애초의 취지를 저버린 이번 방침이 결국 ‘빈 교실 채우기 수단’이나 다름없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연대회의는 국민학교 학생 수가 날로 줄어 교사당 학생 수가 균형을 찾으면서 서서히 교육 정상화의 싹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 만 다섯 살 입학 방침이 나온 것은 경영 논리로 머리 수를 다시 채우려는 편법이라고 주장한다.
과밀 학급·주입식 교육부터 해결해야

물론 교육부는 나름의 논리가 있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생년월일 순 허용 방침을 ‘방법상의 일시적 후퇴’로 평가한다. 그는 현재 50% 안팎인 유치원 취원율이 70% 가까이 올라가면 아이들의 수학 능력을 평가할 종합 기준을 갖출 수 있으리라고 전망한다. 학습 능력·사회성·발표력을 종합 평가할 수 있는 일종의 ‘유치원 종합생활기록부’가 정착되고, 이를 통해 조기 입학 여부를 결정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만 여섯 살로 입학 연령이 못박혀 있는 현행 제도에 융통성을 부여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방침에 의의가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문제는 교육 현실이다. 조기 입학에 찬성하건 반대하건 공통으로 지적하는 대목이 하나 있다. 현재의 국민학교 교육 환경으로는 제대로 된 유아 교육이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우선은 학생 개개인에 맞는 지도를 어렵게 하는 과밀 학급이 그렇고, 창의성 계발을 어렵게 하는 주입식 교육이 그렇다. 만 다섯 살 어린이는 국민학교가 아닌 유치원에서 교육해야 하고, 유치원은 또한 반드시 공교육화해야 한다는 연대회의의 지적이 설득력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연대회의는 ‘도시·농촌간, 빈부간 격차에 상관없이 유아에게 교육 기회를 균등하게 보장하기 위해’ 외국처럼 만 다섯 살 어린이에 대해 무상 유아 교육을 실시하라고 주장한다.

지난 6월 서울시 교육청이 학부모 5천여 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만 다섯 살 자녀를 국민학교에 보내겠다고 응답한 비율은 22.5%였다. ‘아이가 기죽을까 봐’ 학교에 보내기 겁난다는 서울 잠실의 한 주부는 “그래도 다른 사람이 모두 보내면 마음이 흔들릴 것 같다”고 털어놓는다. 참교육 실천 학부모회 오성숙 사무처장은, 과외나 영재교육 따위를 격렬하게 비판하던 사람들조차 막상 자기가 학부모가 되면 주변 분위기에 따라가게 돼 있는 것이 우리의 교육 현실이라고 꼬집는다. 입학할 나이가 지났어도 아이의 적응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될 경우 입학을 미룰 수 있는 부모의 용기가 필요할 때이다. 교육부 또한 면밀한 검토 없이 만 다섯 살 조기 입학을 밀어붙이려 했다가는 조기 교육 과열을 ‘방지’하기는커녕 ‘조장’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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