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 양민 학살 사건' 진상 밝혀졌다
  • 丁喜相 기자 ()
  • 승인 1998.08.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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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군, 50년 양민 학살 사건 진상 규명에 적극 나서
전라남도 함평군청(군수 이석형)은 요즘 지역 주민의 가슴에 멍울진 현대사의 상처를 쓰다듬느라 바쁘다. 그 비극이란 48년 전 함평군 나산·해보·월야 면 일대에서 두 달 사이에 무고한 마을 주민 5백24명이 학살된 참극이다. 가해자는 당시 이곳에 주둔한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 (중대장 권준옥 대위).

그동안 언론을 통해 간헐적으로 세상에 알려진 함평 양민 학살 사건(<시사저널> 제193호 보도)은, 96년 특별법이 제정되어 현재 정부 차원에서 명예 회복 조처를 취하고 있는 거창 양민 학살 사건과 닮은꼴이다. 가해자가 당시 공비 토벌대였던 11사단(사단장 최덕신) 휘하 부대였다는 점, 공비 토벌 목적으로 주둔한 작전 지역내 농촌 마을들에서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무원칙하게 주민을 집단 학살했다는 점이 그렇다. 사건 발생 시기는 거창 사건보다 약 2개월이 빠르다.

그러나 현재 두 사건은 정부의 처리 과정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고 있다. 정부 차원에서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 작업을 벌이는 거창 사건과 달리 함평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런 조처도 취해지지 않았다. 함평군청이 이 사건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60년에 이미 진상 확인… 5·16 뒤 흐지부지

사건 발생 후 48년 동안 함평 주민 가슴 속에 한으로 남아 있는 함평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50년 11월 전남 함평군과 영광군의 경계를 이루는 불갑산 일대에 퇴로를 차단당한 빨치산들이 숨어들었다. 11사단은 이 지역에 5중대를 주둔시켜 토벌 임무를 수행케 했다. 당시 5중대는 불갑산 외곽 월야·해보·나산 면을 잇는 교통 요지 문장에 중대본부를 설치하고 작전에 들어갔다. 하달된 작전 명령은 ‘견벽청야’로 작전 지역내 모든 사람을 사살하고 가옥과 곡식도 모두 불태우라는 내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첫 비극은 50년 12월6일(음력 10월27일) 발생했다. 나흘 전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부대원 2명을 잃은 5중대는, 이날 전투 지역에 있는 나산면 동촌리와 장교리 마을 주민 70여 명을 불러내 논두렁에서 집단 사살했다. 군인·경찰 가족마저 총살했을 만큼 이성을 잃은 만행이었다.

이튿날인 12월7일 5중대는 다시 월야면 월악리 지변·내동·순촌·송계·괴정·성주·동산 등 7개 부락 주민 1백30여 명을 총살했다. 당시 공비 토벌 업무를 보조하던 방위군 소대장(정병오씨)마저 권준옥 중대장의 권총에 사살되었다. 현지에서 지금도 ‘남살뫼 학살’이라 부르는 이 참극의 현장에서 무고한 양민 학살을 만류했다는 이계필 월야지서장(73·서울 동교동 거주)은 “당시 5중대장은 아무런 조사도 기준도 없이 부락민들을 불러내 무조건 사살했다. 남살뫼에 모인 7백명이 넘는 주민을 학살하겠다는 것을 내가 노인과 15세 미만 어린이라도 빼자고 하소연해 그나마 목숨을 구해 줄 수 있었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잔혹한 양민 학살이었다. 정부가 조사를 한다면 그 날의 실상을 그대로 증언하겠다”라고 밝혔다.

남살뫼 학살 사건 사흘 뒤인 12월10일 5중대 병력 일부는 나산면 외치리에 들러 마을 주민 21명을 공동 묘지로 불러내 집단 총살했다. 간밤에 빨치산들이 내려와 마을 앞 도로를 파헤쳤는데 그것이 이 마을 주민 소행이라며 취한 조처였다.

이 학살이 있고 나서 40일 뒤 해보면 상곡리 모평 마을에서 또 한차례 양민 학살극이 벌어졌다. 이 마을은 소개 지역이어서 마을 주민들이 집을 비우고 나갔는데 뒤에 들어온 8중대 병력이 마을 주민에게 그냥 들어가 살라고 명령했다. 주민들이 귀가한 뒤 갑자기 들이닥친 5중대는 명령을 어겼다며 마을 주민들을 불러내 산기슭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50여 명을 사살했다. 5중대와 8중대의 핑퐁 게임식 명령에 우왕좌왕하다 억울하게 학살된 것이다.

이처럼 50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월야·해보·나산 면에서 집단 학살된 주민은 5백24명, 가옥 소실은 1천4백54호에 이르렀다. 이는 60년 국회 양민학살특별조사위원회가 현장을 방문해 조사한 결과이다. 당시 국회는 끔찍한 양민 학살이 있었음을 확인하고 후속 조처를 행정부에 이관했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5·16과 계속된 군사 정권에서 이 사건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국민회의 진상조사위 구성… 현장 조사

오랜 침묵의 세월을 딛고 유족들이 뭉친 때는 91년. 이들은 국회에 청원서를 내는가 하면 전남도청에 유족회(회장 정진재)를 등록하고 진상 규명과 명예 회복을 호소했다. 함평군청이 직접 진상 조사 작업에 나선 것도 이 무렵이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함평군청측은 지난 2년여 조사를 통해 생존한 5중대 부대원들의 소재를 파악했고, 그들로부터 양민 학살에 대한 ‘양심 선언’을 받아냈다. 이들은 모두 당시 상부 명령의 잔혹성을 거론하며 정부가 진상 조사를 할 경우 기꺼이 증인으로 출석하겠다고 했다.

또 함평군측은 사건 당시의 5중대 행적을 기록한 전투상보를 입수함으로써 사건 배경과 피해 규모도 확인할 수 있었다. 불갑산 공비 토벌 작전을 기록한 이른바 ‘대보름작전’에 관한 전투상보에는 2개월간 벌어진 이 지역 작전에서 국군은 적 1천5명을 사살했고, 아군 피해는 2명이라고 적혀 있다. 함평 사건 유족과 군청측은, 이 내용 자체가 정상적인 적과의 상호 교전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양민을 학살한 과정을 담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주장한다.

현재 유족들과 함평군청이 정부에 요구하는 것도, 이처럼 확보된 명백한 증거를 정부가 확인하고 거창 사건에 걸맞는 명예 회복 조처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 지역 국회의원인 김인곤 의원은 집권당 차원에서 함평사건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을 요구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지난 6월29∼30일 국민회의 진상조사단이 현장을 조사했다. 새로 취임한 이석형 함평군수도 7월 말 우선 군청 차원에서 위령탑 건립 부지 3천평을 마련하기로 결정하고 건립비 10억원을 모금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유족들이 정작 바라는 것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다. 이들의 항변은 지난 48년간 유족이 겪은 수난과 불이익에서 기인한다. 희생자 후손들이 공직에라도 진출할라치면 어김없이 ‘신원 특이자’라는 딱지가 따라붙어 불이익을 받아왔다. 환갑 넘어 학살된 할머니에게조차 ‘여자 빨치산’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어 있고, 가옥을 불태운 뒤 집에서 수거해 간 호미와 삽이 ‘노획 무기’로 묘사되어 있다.

5중대장 권준옥씨는 70년에 중령으로 예편한 뒤 낚시 가게를 운영하다 91년 62세 나이로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이한 사실은 예편 후 그가 이름을 ‘권영구’로 바꾸고 살았다는 점이다. 거창 사건과 함평 사건의 공동 책임선이라 할 수 있는 사건 당시 11사단장 최덕신은 아이러니하게도 64년 북한으로 망명했다. 그후 줄곧 북에서 대남 선전의 이용 도구가 되었던 최덕신은 현재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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