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들 의대 신설 · 증원 신청 붐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5.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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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개 대학·삼성, 의대 신설·증원 신청… 의사들은 반대, 교육부는 긍정적
증원이냐, 동결이냐. 최근 의과대학 신·증설 움직임에 대해 의사 단체를 중심으로 한 일부 집단의 반발이 거세지면서 의사 수를 늘리는 문제가 또다시 의료계 안팎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해 정부는 의료계가 강력히 반대 의사를 표명했는데도 강원대·관동대·서남대·건양대에 의과대학 신설을 인가했다. 교육부가 주관하는 96학년도 의대 신설·증원 인가 작업은 늦어도 9월 초까지는 마무리될 예정이어서 의사 단체들의 반대 움직임은 한층 강도가 높아질 전망이다.

보건복지부 자료에 따르면, 96학년도에 의과대학 신설을 신청한 대학은 대불공대·목포대·세명대·한일신대 등 모두 17개 대학이다. 적게는 20명에서부터 많게는 50명까지 따로 입학 정원 증원을 신청한 대학은 11개 대학에 이른다. 신설 또는 증원을 요청한 대학 수와 그에 따른 입학 정원 수는 모두 28개 대학, 1천3백30명이다. 해가 갈수록 신·증설을 신청하는 대학과 정원 수가 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94학년도와 95학년도 의대 신·증설 신청 정원 수는 각각 7백50명·1천20명이었다.

‘삼성의과대학’ 탄생할 것인가

의대 신설 신청 대학 가운데에는 지난해 교육부 인가 과정에서 지역 안배 논리에 밀려 탈락했다고 해서 언론의 관심을 끈 제주대와 대학 관계자나 동문 사이에서 ‘의대가 없어 학교가 발전하지 못했다’고 푸념할 정도로 의대 신설에 강한 집착을 보이는 성균관대가 들어 있다. 제천의 세명대도 입학 정원 60명 규모의 의대 인가를 신청해 놓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의대 설립을 신청한 대학 가운데에서 사람들의 눈길은 단연 삼성 의대로 쏠리고 있다. 삼성 의대는, 막대한 자금을 들여 국내 최고의 병원 시설을 갖췄다고 해서 다른 병원으로부터 부러움과 질시를 한꺼번에 받는 삼성의료원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삼성측은 오는 98년 개교를 목표로 의학과·한의학과·간호학과로 구성된 가칭 ‘삼성의과대학’ 설립을 추진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현재 ‘절대 부족’으로 판명난 삼성의료원 운영 인력을 자체 충당하고, 장차 병원산업에 본격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려 한다는 것이다.
바깥 사람들의 이같은 관측에 아랑곳없이 삼성측 관계자들은 이 문제에 관한 한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삼성의료원 홍보실의 한 관계자는“현재로서는 어떤 사항에 대해서도 밝힐 수도, 확인해줄 수도 없다. 밝힐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일단 의대를 만든다면 국내 최고의 질을 유지할 자신이 있다는 점이다”라고 말한다. 삼성의료원측은 그 근거로 의대생들에게 교육의 장으로 손색 없는 삼성의료원의 시설, 언제라도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면 돈을 쏟아부을 수 있는 자금력, 교수 요원으로 즉각 전환할 수 있는 현 의료진의 수준 따위를 들고 있다.

이같은 일부 대학·대기업의 의대 신·증설 움직임에 가장 심한 거부 반응을 보이는 쪽은 의사들이다. 이들이 이 문제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면서 내세우는 논리는 간단하다. 제대로 된 교육 여건은 생각지도 않고, 먼저 의사 수부터 늘리고 보자는 발상은 의학 교육 면에서나 국민 건강 증진 면에서나 득될 것이 없다는 얘기이다. 이들은 지난 10년 동안 의대가 우후죽순처럼 신설됐으나 의대 교육 수준만 떨어뜨렸을 뿐 아니라, 저질 의사를 양산하는 등 교육이 파행을 거듭했다고 주장한다. 현재 전국의 의대 수는 36개로, 매년 3천명씩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이 가운데 문을 연 지 20년 이상인 대학은 14개에 불과하다.

의사들은 의대 교육이 파행하는 근거를, 신설 의대의 △기초의학 분야 전임 교원 부족 △실습이 배제된 강의 중심 교육 △부속 병원의 기본 병상 확보 부족에서 찾고 있다. 한국의학교육학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설립된 지 20년이 넘는 의대에서는 기초의학 분야 전임 교원을 1개 대학당 33.6명 확보하고 있는 반면, 개설 10년 미만 대학에서는 고작 14.6명을 두고 있을 뿐이다. 또 신설 의대는 교수 부족을 이유로 경비가 많이 드는 실험·실습 대신 연속된 대형 강의로 교육 과정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병원 시설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의대를 설립함으로써 의대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임상 교육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 실태는 더 심각하다. 역시 한국의학교육학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학생들의 연 평균 병원 실습 시간은 기존 의대가 50.7주인 반면, 신설 의대는 42.7주였다. 심지어 일부 신설 대학에서는 부속 병원이 없어 학생들이 졸업할 때까지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최소한의 임상 실습만 형식적으로 마친 경우도 있다.

지난 8월 초순 한국의학교육학회는 성명서를 내고 ‘의과대학 신·증설 인가는 내년부터 실시하는 의대 학과 평가가 이뤄진 뒤에 검토되어야 한다’면서 의대 신·증설 계획을 유보하라고 주장했다. 이보다 앞서 지난 7월말 대한의사협회·대한치과의사회·대한한의사협회도 비슷한 취지의 성명을 공동으로 발표했다. ‘의학 관련 대학 신·증설과 관련해 우리의 충정이 계속 묵살될 경우 전국 회원 이름으로 강력하게 대응해 나갈 것이며, 이에 따른 모든 책임은 당국에 있다’고 밝힌 것이다.
이처럼 의사 단체들의 한결같은 반발에도 불구하고 의대를 신설하려는 측과, 이 문제에 관한 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교육부의 입장은 사뭇 다르다. 의료 인력 절대 부족·의료 서비스의 지역 불균형 따위를 고려해 볼 때, 의대를 늘리는 작업은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부 대학행정실의 한 담당관은 “의사협회 주장에는 수긍하지 못할 점이 있다. 예컨대, 그들은 의대가 늘어나면 저질 의사가 양산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의사 자격 시험이라는 장치를 통해 적절히 통제하면 의사의 질은 얼마든지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더 많은 사람이 경쟁을 하게 되면 의사의 질은 높아지게 되고, 그 효과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의대 신·증설을 둘러싼 논란은 궁극적으로 의료계 개혁과 직결된다. 한쪽은 의대와 의사를 계속 늘림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 반면, 다른 한쪽은 그같은 정책이 또 다른 의료계 파행을 낳을 것이라며 반대한다. 양쪽은 모두 나름의 편리한 잣대를 내세운다. 의대 신설을 주장하는 쪽은 그 근거로 아직도 ‘절대 부족’ 수준인 의사 수를 강조한다. 95년 현재 한국의 의사 1인당 인구는 8백57명(한의사를 포함하면 6백98명)으로 미국의 4백20명, 영국의 6백11명 수준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이기주의와 맹목주의의 대결?

반면 의대 신설을 반대하는 쪽은 현재의 추세로 가다가는 머지 않아 ‘의사 과잉 시대’가 도래하며, 그 결과는 국민의 의료비 부담 증가로 나타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나친 경쟁 속에서 적정 수입을 유지하기 위해 의사들이 저마다 ‘과잉 진료’를 하거나, 각종 의료 보험료가 인상되어 의료비 증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조사·발표한 바에 따르면, 2010년 한국의 의사 1인당 인구는 5백44명(한의사 포함 4백33명)이 되어 현재의 미국 수준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또 의대당 인구는 현재 세계에서 제일 적은 수이다(38쪽 도표 참조). 미국은 의료 인력의 과잉 공급에 따른 의료비 증대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현재 의사 수를 줄이는 정책을 실시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의대 신설 문제가 논란을 되풀이한 정작 중요한 까닭은 논쟁에 관련된 집단 모두가 ‘이익’의 관점으로만 문제를 보아온 탓도 있다. 예컨대 의대 설립을 추진하는 쪽은 반대자를 ‘전문성을 내세워 기득권만 옹호하려는 이기주의자 집단’이라고 매도한다. 반대로 의대 설립 반대자들은 상대편을 ‘지역민의 숙원임을 내세워 무조건 의대를 따내고 보자는 맹목주의자’라는 식으로 몰아붙인다. 때때로 지역 유권자들의 표를 의식한 정치인들의 또 다른 이해가 가세하기도 한다. 이 사이 의대 신·증설 문제와 관련해 가장 중요한 ‘적정 의료 인력 규모의 산출과 배치’문제는 논쟁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국민은 이같은 악순환에 탐탁치 않은 눈길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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