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안 이방인들의 이색 서울살이
  • 成耆英 기자 ()
  • 승인 1997.06.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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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활동하는 외국인 10만명 넘어…어학 강사·배낭족 등 몰려 이국적 풍경 연출
다섯 살 때 부모를 만나러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3년 전 한국에 온 재미 교포 존 설리번(28)씨는 몇 주 전 토요일, 서울 홍익대 앞 외국인 클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경험을 했다.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있는데, 밤 11시가 되자 경찰이 들이닥치더니 “여기서 춤추는 것은 불법이니 모두 나가라”며 클럽에서 사람들을 몰아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클럽 주인이 경찰관의 손목을 붙잡고 잠시 나갔다 오자 음악은 계속되었고 분위기는 곧 되살아났다. 주인과 경찰 사이에 문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이같은 광경은 최근 외국인이 많이 드나드는 이 지역 클럽들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식의 카페에서 춤을 추는 것은 불법이다. 나이트클럽을 제외하고는 유흥 음식점에서 춤을 추는 행위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클럽들은 서울에 사는 외국인들이 마음 놓고 즐길 수 있는 몇 안되는 장소이다. 2년 전부터 서울에 외국인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이런 클럽들이 줄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현재 서울에 사는 외국인은 줄잡아 10만명이 넘는다. 서울 인구 전체의 1%에 육박하는 숫자다. 서울에 주민등록이 되어 있는‘서울 시민’만도 5만명이 훨씬 넘는다. 매년 15% 이상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최근 5년째 서울시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것에 비하면 비약적인 증가이다.
5대 그룹의 외국인 직원 8백명에 육박

외국인들이 모여서 생활하는 지역도 다양해지고 있다. 한남동이나 용산, 아니면 대사관저가 모여 있는 성북동 정도를 외국인촌으로 생각하던 시절은 이미 지나갔다. 최근 2∼3년 사이 영어 학습 수요가 급증하면서 오히려 외국어 학원이 밀집한 종로·신촌·강남역 주변에 외국인들이 몰리고 있다.

1년짜리 비자로 서울에 체류하는 어학 강사들뿐만이 아니라 서울에 상주하는 상사원도 급증하고 있다. LG그룹처럼 아예 회장이 직접 나서서 전체 임원 중 절반을 외국인으로 채용하겠다고 공언하는 기업도 생겨날 정도이다. 현재 삼성·현대 등 5대 그룹에 근무하는 외국인 직원은 줄잡아 8백명 가까이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근 들어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한국을 찾는 배낭족이 늘고 있다는 사실이다. 1∼2년 전만 해도 서울의 외국인 중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는 사람은 어학 강사였다. 그러나 무자격 영어 강사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고 이들 중 상당수가 본국으로 돌아가자, 서울에서 제일 많이 눈에 띄게 된 외국인이 지하철 안내도를 들고 서울을 누비는 배낭족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들어가는 골목길 어귀에 있는 대원여관의 간판은 한글을 포함해 3개 국어로 쓰여 있다. 외국인들은 이곳을‘인대원’이라고 부른다. 얼핏 들으면‘이태원’을 잘못 발음한 것이 아닌가 착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외국인들에게는‘Inn(여인숙) Daewon’이라는 뜻이니 정확한 표현이다. 이곳은 서울에서 꽤 오래된 외국인 전용 여관 중 하나이다. 독방은 1만2천원, 2층 침대 3∼4개가 들어찬 방을 함께 사용할 경우 7천원이면 하룻밤을 때울 수 있으니 주머니가 넉넉할 리 없는 젊은 여행객들에게는 최상의 숙소이다.

물론 독방이라고 해야 한 사람밖에 잘 수 없는 쪽방이고 환경도 좋은 편이 아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아무렇게나 걸어놓은 빨래들이며 고장난 구형 선풍기 따위가 자아내는 풍경은 지방 대학가 앞의 하숙촌보다도 못한 실정이다. 그러나 여행 경비마저 현지에서 조달하는 ‘짠돌이’외국인들은 별로 불편을 못느낀다는 표정이다. 2주 전 한국에 왔다는 캐나다인 니나 앰바(25)씨는 서해안을 돌아보았을 때 오염된 바닷물과 쓰레기 등 더러운 주변 환경에 불쾌했었다고 연신 투덜대면서도 컴컴한 재래식 부엌에서 맛있게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다.

서울 사람들에 대한 그의 인상은 한마디로 딱딱함이다. 그는 “서울 사람들은 표정부터 하는 행동까지 왜 그렇게 심각하고 무거운지 모르겠다”라며 고개를 흔든다. 대원여관 벽에는 재미있는 안내문이 하나 적혀 있다. ‘소주를 조심하라. 결코 깨끗한 술이 아니다. 게다가 맥주와 섞어 마시면 치명적일 수 있다.’

현재 서울에는 성도·문화·용진 여관 등 외국인을 주 고객으로 삼는 전용 숙소 7∼8군데가 광화문·종로·안국동 등을 중심으로 하여 성업 중이다. 이 중에는 한옥을 개조해 만든 곳도 있다. 많을 때는 각국 사람이 20명 넘게 북적댄다.
낮에는 인터넷 카페, 밤에는 클럽으로

최근에는 다소 지저분한 이런 여관을 피하려는 사람을 위해 새로운 형태의 숙소가 생겨나기도 했다. 충정로 1가 골목길에 있는, 일반 주택 2·3층을 개조해 만든 트렉코리아 게스트 하우스가 대표적이다. 4백여 회원을 가진 트레킹 동호인 모임인‘트렉코리아’가 중심이 되어 만든 이 게스트 하우스에는 항상 10명 안팎의 사람이 들어오고 떠난다. 만원 정도면 하루를 묵을 수 있는 데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다가 한국에 들른 낯선 여행객끼리 저녁마다 맥주잔을 부딪칠 수 있는 정취가 있어 많은 외국인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다.

게스트 하우스 3층 다락방에는 신혼 부부 한 쌍이 장기 투숙하는 신방이 있다. 수단 출신인 엘타이브 탈하(30)씨와 영국인 케이트 앳킴슨(24)씨는 커다란 다락방 한쪽을 커튼으로 막아 만든 신방에 머무르면서 한 달째 한국에서 신혼 여행을 즐기는 중이다. 이들은 제주도나 경주·설악산 등 틀에 박힌 코스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첫날부터 강원도 일대로 트레킹을 나섰다. 신부 앳킴슨은 신방을 구경하고 싶다는 말에 “메시, 메시”(지저분하다)를 연발하면서도 행복에 겨운 표정이다.

대부분 주머니가 가벼운 이들 여행객이 찾는 곳은 정해져 있다. 낮에는 인터넷 카페에 들러 세계 각국의 여행 정보를 수집하고 고향의 친구나 가족과 전자 우편을 주고 받는다. 종로·신촌 등 주로 대학가나 학원가를 중심으로 생겨난 인터넷 카페의 손님 중 80%는 외국인이다. 또 인터넷 카페는 서울을 찾는 외국인들에게는‘정보 복덕방’이나 다름없다. 벽마다‘영어 강사 구함’‘중고품 판매’‘여행 파트너 구함’이라는 영어 광고가 빈틈 없이 붙어 있다. 그만큼 인터넷 카페는 아직까지는 한국인보다 외국인에게 친숙한 공간이다. 영어를 가르치러 한국에 왔다는 캐나다인 노라 맥니콜(29)씨는 “한국이 일본보다 컴퓨터 보급 대수가 많다고 들었는데 왜 인터넷 카페에 가면 한국 사람이 없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저녁마다 외국인들이 북적대는 곳은 따로 있다. 바로 홍익대 앞 클럽들. 홍익대와 극동방송 주변에 7∼8군데 있는 이 클럽들은 한국인에게는 이국적 풍경이 물씬한‘서울 안의 미국’이다. 이곳의 주제는 술보다는 음악과 춤이다. 술은 맥주 한 병이면 족하다. 강렬한 음악에 몸을 흔들며 밤을 지새기 일쑤이다. 이런 클럽에서 외국인들은 한국이 아니라 자기 나라의 어느 도시에 와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마음껏 스트레스를 푼다. 이곳의 문화는 외국인에게 낯선 서울의 주류 문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희한한 일도 자주 일어난다.

백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 춤을 추는 좁은 무대 한가운데서 외국인 남성과 한국 여성이 진한 키스를 나누는 광경도 가끔 볼 수 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나 심야 영업을 하는 주말이면 가끔씩 거리에서 스트리킹에 가까운‘돌발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한국인과의 충돌도 자주 일어난다. 그래서 최근 들어서는 아예 외국인을 받지 않는 클럽도 생겨나고 있다. 한 달 전부터 외국인을 받지 않는다는 클럽‘조커스’의 주인은 “외국인들이 지나치게 자유분방한 의사 표현으로 한국인의 정서를 건드리다 보니 오히려 영업에 방해가 된다”라고 말한다. 이 업소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2백명 가까운 외국인이 드나들어 3백만∼4백만원씩 수입을 올리던 곳이다.

최근에는 다소 퇴폐적으로 비치는 이런 분위기를 털어낸 새로운 형태의 클럽들이 생겨나고 있다. 홍대입구 전철역 부근 한적한 주택가에 자리잡은 ‘마콘도’는 남미 계통 음악만을 틀어주는 술집이다. 마콘도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소설 <백년 동안의 고독> 에 나오는 시골 마을 이름이다. 이곳에는 브라질·콜롬비아 등 남미 국가의 대사관 직원에서부터 페루나 칠레의 일용 노동자까지 무척 다양한 외국인이 드나든다. 주말이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이다. 물론 한국인도 적지 않다. 여기서는 틈틈이 영화도 상영하고 댄스 페스티벌도 연다. 얼마 전에는 남미 춤이라고 하면 탱고나 야한 춤의 대명사로 알려진 람바다밖에 모르는 한국인들에게 살사·레멩게 같은 남미의 정통 춤을 선보여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기도 했다.
친절·서비스는 세계 최하위 수준

지난 2월 남미음악 동호회를 모태로 해 이 클럽 문을 연 이재경씨는 “무조건 흥청망청하는 우리 음주 문화가 술을 적당히 마시면서 함께 즐기는 문화로 바뀌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라고 말한다.

외국인의 숫자만큼이나 외국인이 모여드는 공간이 늘어나고 있지만, 서울이 그들에게 여행하기 좋은 도시는 결코 아니다. 세계적인 여행 전문지인 월간 <비즈니스 트래블러> 가 세계 46개 도시의 96년 여행 여건을 비교해 낸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은 36위를 차지했다. 그나마 친절도 42위, 택시 잡기 43위처럼 서비스 부분에서는 절망적이었다. 다섯번째 서울을 방문한다는 일본인 세키 미유키(26)씨는 “시장에 가면 일본인인 것을 알고 바가지를 씌우기 일쑤이다”라고 불평한다. 시사영어사 이희자 과장도 “한국에 사는 영어권 강사들은 아직도 길거리에서 부딪치고 지나가면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할 줄 모르는 서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외국인이 서울 곳곳에 터를 잡고 들어앉는 것은 서울의 국제화 지수가 높아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진정한 국제화 지수는 외국인 숫자만이 아니라 시민들의 국제 감각이 그 잣대가 된다. 그런 점에서 아직 서울의 국제화 지수는 바닥권에 머물러 있다. 피부나 머리 색깔에 관계 없이 한 도시에서 어깨동무하고 살기 위해 서울시민들은 이 문제부터 풀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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