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그 날의 님은 갔습니다
  • 광주·羅權一 주재기자 ()
  • 승인 1998.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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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의 ‘마지막 시민군’ 김영철씨, 18년 투병 죽음으로 마감
‘한손에 투사회보/ 한손에 총… 무너진 도시/ 캄캄한 절망을 안고/ 18년을 싸우면서/ 18년을 앓아 온 기나긴 죽음.’ 문병란 시인이 지난 8월16일 사망한 ‘마지막 시민군’ 고 김영철씨(50) 영전에 바친 ‘오월의 죽음’이라는 조시(弔時)의 일부다.

항쟁이 끝난 지 18년이나 지났지만 ‘달라진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김영철씨가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에 흩어진 과거의 ‘투사’들이 광주로 모여들었다. 장례 기간에 5백여 명이 훨씬 넘는 재야 인사와 지역민이 빈소가 마련된 조선대병원 영안실을 찾아 고인을 추모했다.

가해자는 사면되고 피해자는 저 세상으로…

김영철씨의 넋을 위로하는 19일 도청앞 노제에는 고재유 광주시장과 허경만 전남도지사를 비롯해 조아라·명노근·강신석·이기흥·김태홍·김준태 등 광주 지역 대표적 인사들과 정수만 5·18 유족회장 등 5·18 관련 단체 회원들이 참석해 망자의 한을 위로했다. 광주 시민들은 ‘5월 시민군 고 김영철 민주시민장 장례위원회’(위원장 송기숙)를 구성해 김씨의 유해를 새롭게 단장된 망월동 5·18 묘지 제4 묘원에 2백60번째로 묻었다.

‘들불 야학’을 함께 했던 임낙평씨(광주·전남 환경운동연합 사무국장)는 “8·15 특사로 5·18 가해자들이 모두 사면된 다음날 김영철씨가 세상을 떠났다. 가해자는 죄값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떵떵거리고 사는데 피해자는 저 세상으로 가야 하는 오늘의 상황이 개탄스럽다”라고 말했다.

전남 순천 출신인 김영철씨는 광주서중·광주일고를 졸업하고 광주 YWCA 신협이사로 활동하면서 광천동 빈민촌의 주민 공동체 운동을 주도하고, 들불 야학 교장을 맡아 노동자를 가르치던 사회운동가였다. 김씨는 80년 항쟁 당시 윤상원·박효선 씨 등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해 5월 항쟁을 알렸던 ‘들불 야학’ 팀의 핵심 멤버였고, 도청 사수를 결의한 ‘시민·학생 투쟁위원회’(위원장 김종배) 기획실장으로 활동하며 마지막까지 항쟁을 이끌었다.

5월27일 계엄군 도청 진입 때 체포된 김씨는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합동수사부의 모진 고문에 못이겨 상무대 영창에서 콘크리트 벽 모서리에 세 차례나 머리를 부딪쳐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해 그 충격으로 극심한 정신 질환에 시달렸고, 국립 나주 정신병원과 영광 기독신화병원을 오가며 사망 직전까지 투병 생활을 했다.

특히 그는 이미 사망한 동지 윤상원·박관현의 이름을 부르는 등 심한 환각과 환청에 시달렸고, 자기만 살아 남았다는 죄의식 때문에 정신적으로 18년 동안 80년 당시의 참혹한 상황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5·18 항쟁 관련자들이 김영철씨를 안타깝게 ‘마지막 시민군’이라고 부른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미망인 김순자씨(44)는 “남편은 자식들에게도 나는 다 용서했다며 전두환·노태우를 너무 미워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기독교 신자로서 죽는 날까지 화해와 평화를 원했던 착한 사람이었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남편과 자신의 일기장, 항쟁 당시 기록을 모은 자료를 종합해 추모집을 펴낼 예정이다.

김씨 사망을 계기로 5·18 당시의 부상과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5·18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도 높아가고 있다. 5·18 항쟁과 관련해 지금까지 부상자로 판정받아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은 사람은 무려 2천8백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신체적 고통 외에도 성격 장애, 기억 장애, 우울증 따위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때문에 김영철씨같이 일찍 사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5·18 장애자’들을 전문적으로 치료할 의료 센터를 하루빨리 건립하고, 피해자들을 국가 유공자로 지정해 정부가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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