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에 묻힌 광주 옛 망월동 묘지
  • 광주 · 나권일 주재기자 ()
  • 승인 2000.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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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구 망월동 묘지, 관리 소홀로 황폐 ··· 유가족 등 통합묘역 조성 움직임
망월동 묘지라고도 불리는 광주시 북구 운정동 광주시립공원묘지 제3묘원은 1980년대 민주화 투쟁을 했던 사람들이 묻힌 곳이다. 광주시가 5·18 민중항쟁 사적 제24호로 지정해 지금은 5·18구묘지로 불리는 이곳에는 5·18민중항쟁과 직접 관련된 희생자들은 안정되어 있지 않다. 5·18광주 관련 사망자 유해는 이미 1997년 5·18신묘지로 이장을 마쳤고, 현재는 가묘 형태의 묘비와 봉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망월동 묘지에는 지금도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른바 민주 열사로 불렸던 시국 사건 관련 사망자들의 유해가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영정 색 바래고 기념물함 파손

현재 망월동 묘지에는 1987년 7월 처음 안장한 이한열씨를 시작으로 1996년 3월 경찰의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망한 노수석씨에 이르기까지 모두 37기의 민주열사 묘가 조성되어 있다. 광주 시민은 당시 이한열 ·조성만 ·강경대 ·박승희 ·노수석씨의 '장례 투쟁'을 통해 이들을 '민주 성지' 광주에 잠들게 하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최근에는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법과 의문사 진상 규명법이 제정되어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인 민주열사들에 대한 토론회가 열리고 기념 사업이 추진되는 등 이들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민주열사들이 묻혀 있는 망월동 묘역은 현재 대책 없이 방치되어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푸대접을 받고 있다. 이내창씨의 영정은 빗물에 훼손되어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묘비에 적힌 이름 역시 비바람에 씻겨 가까이 다가가 보지 않으면 누구인지 확인하기 힘들다. 유리로 만들어진 고인의 기념물함을 파손된 부분만 접착제로 엉성하게 붙여 놓은 상태이다. 최근까지도 이내창 ·이철규 씨 봉분은 잡초에 묻혀 있다.

1991년 전남대 학생들이 노태우 정권 퇴진 결의대회를 할 때 분신한 박승희씨 무덤의 기념물함 역시 유리가 깨진 채 거미줄에 뒤덮여 있다. 1991년 망월동 묘지에 묻힌 강경대씨의 기념물함에 보관되어 있는 명예학사 학위증서는 흘러든 빗물에 젖어 훼손되어 있다. 파손된 기념물함 뚜껑도 접착제로 살짝 붙여 놓았다. 아예 봉분이 잡초에 뒤덮이고 영정이 심하게 변색된 무덤도 허다하다.망월 묘역을 찾은 한 참배객은 "새로 만든 5·18묘지보다 더 역사성이 깊은 곳인데 제대로 관리하지 않고 방치한 것 같다"라며 아쉬워했다.
묘비와 봉분만이 있는 일반인 묘와 달리 이들 민주열사의 묘지 옆에는 대부분 고인의 학교 선후배나 참배객이 만든 기념물함이 놓여 있다. 고인의 일기장이나 졸업 증서, 넋을 기리기 위한 종이학과 문예지는 물론 참배객을 위한 방명록도 보관되어 있다. 그러나 가끔씩 다녀가는 유가족과 선후배만이 묘역을 손질하고 기념물함을 단장할 뿐 행정기관의 손길은 닿지 않고 있다. 묘지 관리와 환경정비, 벌초, 기념물함 관리를 할 만한 인력과 기구가 없는 탓이다.

광주시 5·18 묘지 관리사무소는 새로 조성한 5·18 묘지 관리와 보수에만 힘쓸 뿐 다른 민주화 투쟁 희생자가 묻혀 있는 5·18 구묘지는 돌보지 않는다. 광주시립공원묘지 관리를 담당하는 용역 업체 또한 관리비를 내지 않으면 벌초해 주는 법이 없다. 사실상 망월 묘지는 1997년 이후 묘역을 찾는 참배객들의 순수한 노력과 자원봉사, 유족의 관심으로만 유지되어온 셈이다. 현재 망월동 묘지 외에 민주화 희생자들의 묘는 전태일 ·박종철 씨 등 67명이 묻혀있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과 8명이 묻혀 있는 부산 양산 솥발산 두 곳이다. 그외 민주열사 ·애국열사 ·노동열사 ·통일열사 등으로 불렸지만 제대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전국에 흩어져 있는 희생자의 묘는 3백여 기에 이르는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민주열사 기리는 민주 ·인권 공원 추진

이에 따라 최근 민주화운동보상법 제정 이후 뒤늦게나마 민주열사들의 묘를 한 군데로 이장해 기념 공원과 역사 교육 공간을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전국 민주 유가족 협의회'(유가협 ·회장 박정기)등 유가족을 중심으로 일고 있다. 광주시 북구청(청장 김재균) 역시 5·18 묘지 인근인 광주 장동 ·운정동 주변 10만여 평에 민주열사 묘지와 민주화운동 기념관 등을 갖춘 '민주 ·인권 공원'을 조성할 방침이라며 사업 추진 동의서를 최근 유가협에 제안했다.

그러나 민주화 희생자 기념 묘지 ·공원 조성문제는 5·18 관련 단체와 유가협 사이의 불화로 장소 선정 등을 놓고 난항에 예상된다. 1997년 5·18 신묘지가 조성될 때 민주화 희생자를 5·18 묘지에 함께 모시자고 요구했던 유가협의 제안을 5·18 민중항쟁 유족회가 거절한 데 대한 서운함이 민주화 희생자 유족들에게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당시 5·18 유족회는 5·18 묘지가 국립 묘지로 승격하는 데 대비해 공식으로 보상받은 자에게만 이장을 허용한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유가협에 민주열사 묘지를 별도로 조성하자고 제안했었다.

또 광주시가 5·18 신묘지가 조성된 뒤 망월묘지를 사실상 방치해 왔다는 점도 유가협이 광주시의 민주열사 기념 공원 유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 성지'를 주장하는 광주가 그만큼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못했다는 비판인 셈이다. 정작 당사자들의 묘역은 허물어져 가고 있는 상황에서 기념 공원과 교육 시설을 건설하자는 얘기가 진지하게 들릴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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