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독극물 방류' 캐낸 4인의 여전사
  • 고제규 기자(unjusa@e-sisa.co.kr) ()
  • 승인 2000.08.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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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에서 간사로 활약 ··· 용산기지내 후원자로부터 최초 제보 입수
"주한민군이 포름알데히드를 한강에 무단 방류했다." 지난 7월13일 녹색 연합은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들이대며 이같은 사실을 폭로했다. 그 결과 주한미군은 주둔이래 처음으로 형식적이나마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증거를 확보해 주한미군에게 사과를 받아낸 녹색연합은 당연히 언론의 눈길을 모았다. 하지만 이번 폭로는 녹색연합의 작품이 아니다. 녹색연합은 조연이고 주인공은 따로 있다.

기자회견장에서 한켠을 차지했던 '주한미군 범죄 근절 운동본부'(운동본부)가 그 주인공이다. 애초 제보는 운동본부로 접수되었다. 녹색연합의 관계자는 "제보는 우리가 아닌 운동본부에 접수되었다. 운동본부가 환경 문제이니 연대해서 일을 처리하자고 제안했다"라고 말했다.

7년 넘게 이끌어온 금요 집회

이처럼 결정적인 제보가 운동본부에 접수된 것은 7년 동안 공을 들인 덕분이었다. 운동본부는 1992년 윤금이씨가 케네스 마클 이병에게 잔혹하게 살해된 것이 계기가 되어 출범했다. 재야 ·시민 단체가 '윤금이씨 살해사건 공동대책위원회'를 꾸렸는데, 이것이 1993년 10월 26일 운동본부로 발전했다. 운동본부는 그동안 외면해온 기지촌 여성 등 미군 피해자의 인권 문제에 주목했다. 운동본부는 1993년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인권상을 받으며 미군 범죄와 관련된 일을 도맡아 처리하기 시작했다.

민주화실천가족협의회가 목요일마다 여는 '목요 집회'로 유명하다면, 이 단체는 '금요 집회'로 유명하다. 1994년 12월28일부터 한 주도 거르지 않고 금요일 정오 12시면 용산 미군기지 정문 앞에서 집회를 열었다. 7년 동안 많게는 50~60명이, 적을 때는 5명이 모여 금요 집회를 이어 왔다.
주한미군 3만7천명과 맞서 싸우는 운동본부는 단지 4명의 간사가 운영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모두 여성이다. 이소희 ·오진아 ·고유경 간사와 일본인 미야우치 아키오는 주한미군 범죄와 관련된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현재는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이들보다 먼저 운동본부를 이끌었던 정유진 ·김동심 간사가 운동본부가 자리를 잡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소희 간사(28)는 주로 미군기지 안의 한국인 노동자 문제를 맡고 있다. 이씨는 부당 해고나 산업 재해를 맡아 처리한다. 그녀는 요즘 지난 2월 부산의 속칭 하야리아 부대에서 근무하다 부당하게 해고된 김미정씨 사건을 맡고 있다. 김씨는 미군의 성회롱에 항의하다 보복 조처로 해고되었다며 운동본부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소희 간사가 '민원 부서'라면 오진아 간사(25)는 '강력반'이다. 오간사는 주로 살인 사건이나 폭행을 맡아 처리한다. 지난 2월19일 미8군47기갑대대 소속 크리스토퍼 매카시(22) 상병에게 살해된 김 아무개씨(32)사건도 오간사가 맡았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그녀는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다.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운동본부 간사들은 카메라를 들고 경찰과 똑같이 현장을 채증한다. 왜냐하면 초동 수사가 미흡해 미제(未濟) 사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번에는 메카시 상병이 검거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다. 범인도 붙잡히고 피해자의 장례식도 치러 모든 일이 끝난 것 같지만, 오진아 간사에게는 아직도 할 일이 남아 있다. 미군 범죄 피해자 가족은 2중3중의 고통을 받기 마련이다. 남은 가족의 얘기를 들어주며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그녀가 할 일이다.

그녀는 7월27일 이태원 살인사건 피해자 아버지 김 아무개씨(61)를 만났다. 김씨는 "너무나 고맙다. 어디다 하소연할 데도 없고 뭘 알아야지"라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녀는 웃음을 잃지 않고 며느리처럼 김씨의 건강 문제까지 꼼꼼히 챙겼다. 하지만 오간사는 김씨와 헤어진 뒤 피해자 가족과 만날때가 가장 힘들다고 털어놓았다. 가족의 고통과 슬픔이 바로 자신에게 전해지기 때문이다.

고유경(28) ·미야우치 아키오(25) 간사는 상근하지는 않는다. 고씨는 오전에는 직장에 다니다 오후에 운동본부에서 일을 돕는다. 너무 일손이 달려 9월부터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운동본부에 뛰어들 작정이다. 미야우치 아키오 씨는 학생이어서 일이 있는 오후에만 사무실을 지킨다.

간사들은 월 20만~40만원 급여를 받는다. 그나마 제때 받는 경우는 드물다. 초기에는 후원단체가 있어 듬직했지만, 후원인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제정이 어려워졌다. 그래도 지하철 노동자에서부터 교수들까지 적은 돈이지만 꾸준히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 덕분에 운동본부는 유지되고 있다.
재정 형편 열악해도 열정 식을 줄 몰라

그 중에서도 미군부대 노무자들이 후원이 큰 도움이 된다. 누구보다 운동본부를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미군부대에서 일하는 ㄱ씨는 "금요일마다 집회를 하기에 몇 번 하고 그칠줄 알았다. 하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집회를 계속해 믿음감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미군 독극물 방류 사실을 귀뜸한 것도 바로 미군부대 내의 '후원자'들이었다.

7월28일 278차 금요 집회를 위해 이소희 ·오진아 간사는 아침부터 구슬땀을 흘렸다. 선풍기 한대 없이 무더위를 견뎌내며 금요 집회를 준비했지만 정작 용산 미군기지 앞에는 대학생 10여명만 있을 뿐이다. 이번 금요 집회는 방학 때여서인지 대학생들의 참여도 저조했다. 그래도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스피커를 설치한 뒤 늘상 하던 대로 집회를 진행했다.

집회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두사람의 어깨가 홀가분해 보였다. 금요 집회가 끝나면 1주일이 끝난 것처럼 마음이 가볍다고 한다. 월급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무더위에 지쳐 힘들지만 그래도 즐거운 사람들. 어찌 보면 우직해 보이지만 이런 우직함이 결국 미군이 사과를 끌어내는 '대형 사고'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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