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직자들의 ‘부정 부패 일기장’
  • 羅權一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1998.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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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직자 ‘양심 고백’ 담은 책 잇달아 나와 지역사회 충격

“자기 스스로 저지른 도둑질을 자기가 속한 소집단 내에서 과감히 고백해 자기를 맑게 하는 ‘사회적 고백운동’의 물결을 일으켜야 한다.” 김지하 시인이 밑으로부터의 개혁을 촉구하며 <생명과 자치>에서 강조한 말이다.

31년간 광주 지역 일선 학교와 교육청에서 근무한 정경범씨(54·광주시 치평동)는 자신이 체험한 구체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교육계 부정 부패 실상을 낱낱이 고발한 <나의 31년 공직 생활, 부끄러운 부정 부패 일기장>이라는 책을 얼마 전에 출간해 자신이 저지른 ‘도둑질’을 참회했다.

이에 앞서 지난 1월에는 전북 진안 정천중학교 행정실장 이용호씨(39)가 교육계를 비롯한 관료 사회의 부패 실상을 담은 <너는 그렇게 나는 이렇게 부정 부패의 장본인이었다>를 펴내 지역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마치 김지하씨의 주장에 화답하듯 자신이 겪은 공직 사회의 비리를 폭로하며 개혁을 촉구하는 ‘내부 고발자’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광주 백일초등학교 행정실장(지방교육행정주사 6급)을 끝으로 지난 4월 의원 면직된 정경범씨가 지난 5월15일 스승의 날에 펴낸 <나의…부패 일기장>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정씨가 일선 학교의 비자금 조성 방법과 교육청 상납 관행, 각종 공사와 학교 급식을 둘러싼 업자와의 검은돈 거래 등 교육계의 부조리를 관련 서류까지 첨부해 구체적으로 제시하자 시민단체들이 적극 나서 ‘현장 조사’를 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광주 B초등학교 근무 당시 학교 급식비 관련 예산을 부풀려 교장에게 백만원을 주고 내가 백만원을 챙기고, 나머지는 서무실 직원들 명절 떡값과 학교 잡비로 사용했다. 잔반처리기 시설과 관련해 업자에게 백만원을 받아 교장과 나누어 썼다.’ 정씨가 자신의 책에서 밝힌 비리 가담 내용이다.

정씨는 또 ‘해마다 두 차례 명절 때 난방 연료·학습 자료 구입비 명목으로 가짜 서류를 작성해 비자금을 백만∼3백만원 조성했다. 이 돈은 교육감 20만∼30만 원, 국장급 10만∼20만 원 등 총 50만∼70만 원을 시교육청에 ‘인사’비용으로 지출했고, 나머지는 관할 교육청 교육장·국장·과장과 교장·교감·서무실 직원에게 골고루 지출했다’며 비자금 조성 사실을 고백했다(29쪽 아래 사진 참조). 정씨는 이밖에 ‘교육청이 일선 학교를 종합 감사할 때는 접대비에다 교통비 명목으로 백만원 상당의 학교 비자금이 사용되고, 하다못해 장학지도 나온 장학사에게도 1인당 5만원씩 돈봉투가 제공된다’고 폭로했다.

교육계 비리를 폭로한 이용호씨 역시 <너는 그렇게…장본인이었다>는 책에서 ‘○○ 초등학교 근무 당시 백만원짜리 학습 자료를 구입한 뒤 업자로부터 10만원을 받았다. 지금도 학교 시설 공사비의 10∼20%는 관행으로 부정 부패 공무원에게 흘러간다’고 밝혔다.
부패 공무원 ‘밥’이 되어버린 교단 선진화 사업

이처럼 교육계 비리는 특히 시설 공사와 학습 기자재 구입 때 극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정경범씨는 자신의 책에서 ‘교육청이 실시하는 교단 선진화 사업은 일선 학교에 예산이 배정되기도 전에 업자들이 먼저 알고 찾아와 해당 교장에게 커미션을 제공한다. B 학교 재직시 어학 반복 학습기 구매와 관련해 65만원이 교장에게 갔고, 내가 40만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정씨에 따르면, 교단 선진화에 얽힌 각종 기자재를 구매할 때 국고금에서 10% 이상이 담당 공무원의 수고비로 누수되고 있다는 것이다.

교단 선진화 사업이 이렇듯 부패 공무원들의 ‘수입원’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광주시 교육청은 초등학교 학부모·교사·학생의 95% 이상이 교단 선진화 사업을 성공적이라고 평가한다는 식으로 오는 10월 교육감 선거를 앞둔 안 준 교육감의 ‘업적’ 홍보에만 열을 올리는 양상이다. 광주시 교육청 안 준 교육감은 특히 정경범씨 책자 발간 파문과 관련해 광주지검 유재성 검사장 등 검찰 간부들에게 지난달 25일 수백만원 상당의 향응을 제공해 지역민들의 ‘입도마’에 올랐다.

광주시 교육청은 두 책이 발간된 이후 광주백운·백일 초등학교와 광주 서부교육청에 대해 5월 말부터 특별 감사를 벌인 끝에 최근 교육 공무원 13명을 징계위원회에 회부키로 했다. 시교육청에 따르면, 광주 ○○ 초등학교 기복호 교장 등 교장 3명과 광주 서부교육청 류장지 관리국장 등 4명이 ‘징계’, 감사 업무를 소홀히 한 서부교육청 안경순 관리과장 등 3명이 ‘경고’, 품위를 손상한 이청우 서부교육청 교육장 등 6·7급 공무원 6명이 ‘주의’ 조처될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서부교육청 안경순 관리과장은 “교육청의 징계 조처를 받아들이겠다”는 말로 책에 거론된 일부 사실을 시인했다. 그러나 B 초등학교 교장을 지낸 정 아무개 교장은 “교장으로서 법적·도덕적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책에 거론된 내용이 사실과 다른 것이 많다”라며, 정씨가 책을 펴낸 의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정경범씨는 “비리에 연루된 상급 기관이 제대로 감사할 리 만무하다. 책을 출간할 때만 해도 교육청 간부들이 찾아와 갖은 회유와 협박을 했다”라며, 사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을 경우 부정 부패 일기장 제 2권을 펴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비리 고발 책 발간 파문과 관련해 광주지검 특수부(부장검사 강영권)는 내사를 시작해 책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수사를 맡은 김재옥 검사는 “책 내용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증거가 있어야 한다.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는 대로 정경범씨를 참고인으로 소환 조사해 본격적인 수사에 착수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시민단체 ‘현장 조사’ 발벗고 나서

정경범씨에 앞서 교육 비리를 담은 책을 출간한 이용호씨는 6월17일 전북도 교육청의 징계위원회 심사를 앞두고 있다. 전북도 교육청(교육감 문용주)은 이씨가 구체적 증거 없이 추상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의견을 기록해 교육 공무원의 명예를 실추했다는 이유로 이씨를 징계위원회에 회부한 상태여서, 파면이나 해임 같은 중징계가 예상된다. 그러나 이씨는 “교육계의 고질적인 비리를 고발하는 ‘양심 선언’을 했는데, 도리어 교육청은 개인 비리를 들추며 회유와 협박을 일삼았다. 현 직급으로 정년 퇴직할 각오가 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정경범씨와 이용호씨의 ‘양심 고백’을 계기로 이 지역에서는 공직 사회의 부조리를 뿌리 뽑기 위한 시민 운동과 ‘내부 고발자 보호법’ 제정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교육계 비리 폭로가 잇따르자 광주 지역에서는 ‘교육 부패 추방과 개혁을 위한 시민의 모임’(시민모임, 공동대표 나간채·김성희)이 결성되는 등 시민단체의 교육 비리 근절 요구가 거세지고 있다. 시민모임은 지난 11일 기자회견을 갖고 “교육계 비리 척결은 물론 교육 내용이나 수업 일정 및 교육 전반에 관해 광범위하게 개혁을 촉구하겠다. 시민모임이 해당 학교를 방문해 조사할 경우 광주시교육청의 적극 협조를 요구한다”라고 밝혔다.

시민모임은 앞으로 정경범씨의 책에 거론된 학교들을 직접 찾아가 조사하고, 교육청과 학교에 관련 자료 제출을 요구하는 한편, 관련자들을 검찰에 고발할 계획이다. 시민모임은 특히 △컴퓨터·어학 반복 학습기 등 업자와 학교측과의 뒷거래에 따른 국고 낭비 △학교 숙원 사업 해결을 빌미로 한 예산 부풀리기 △명절 떡값 상납 △급식 납품업자 선정 비리 등에 대해 검찰의 엄정한 수사를 촉구할 예정이다.

현재 시민모임에는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광주·전남지회’와 ‘녹색소비자문제연구원’ 등이 참여하고 있으며, 정경범씨와 이용호씨도 이 모임에 자료를 제공하고 자문에 응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용호씨는 “공무원의 부정 부패는 조직의 속성상 혼자 저지를 수 없는 것으로 마치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있다. 내부 고발자가 많아지고 그들이 우대받게 된다면 공직 사회가 한층 더 맑아질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시민모임 김성희 공동대표(녹색소비자문제연구원장)는 “시민모임은 광주에 본부를 둔 전국 모임으로 활동할 것이다. 교육계 비리를 현장 조사하면서 각종 자료를 행정정보공개법에 의거해 정식으로 청구할 예정이다”라고 밝혀 교육 비리 근절에 강한 의지를 내비쳤다. ‘민주화의 성지’인 빛고을이 교육 부패 추방과 개혁을 위한 발원지가 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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