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살인자냐” 의료계, 이유 있는 항변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8.06.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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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자 요구 중환자 퇴원에 유죄 판결…병원측 퇴원 기피 현상 등 후유증

환자 보호자의 요구로 중환자를 퇴원시켰던 의사 2명에게 살인죄를 적용해 각각 징역 2년 6월과 집행 유예 3년을 선고한 법정 판결에 대해 의사 사회 전체가 조직적으로 반발하고 나서는 등 파문이 확산되고 있다. 의사가 병원에서의 진료 행위, 특히 환자 퇴원을 허락했다는 이유로 과실 치사나 살인 방조가 아닌, 살인죄라는 죄목으로 처벌을 받기는 의료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5월15일 서울지법 남부지원 형사합의1부(재판장 권진웅 판사) 판결로 살인죄의 굴레를 쓴 의사들은 서울 보라매병원 신경외과 의사 양희진씨와, 서울대병원 레지던트로 사건 발생 당시 그 병원에 파견되어 근무하던 김명수씨다. 의사들말고 살인죄가 적용된 사건 당사자 또 한 사람은 환자의 부인이자 보호자인 이후영씨. 사건의 발단은 지난해 12월로 거슬러올라간다.

97년 12월4일 오후 2시30분께 머리를 크게 다친 중년 남자가 119 구급차로 서울 보라매병원 응급실에 실려 왔다. 환자의 이름은 김수광씨(사망). 김씨는 그날 세들어 살던 서울 금천구 독산본동 집에서 술에 취한 채 화장실에 가다가 중심을 잃는 바람에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넘어졌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김씨를 발견해 병원에 옮긴 사람은 집주인. 환자 상태를 살핀 보라매병원측은 응급 수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수술 동의서를 받기 위해 가족을 수소문하다가 환자 가족을 빨리 만날 수 없는 상황임이 밝혀지자 동의서 없이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김씨에 대한 응급 수술은 오후 6시께 시작되어 이튿날 오전 3시까지 이어진 대수술이었다. 다행히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 환자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응급 수술이 진행되는 동안 환자 가족이 병원에 도착하자 병원측은 수술 동의서 없이 수술을 진행한 경위 등을 설명했다.

김씨가 중환자실로 옮겨진 날 오후부터 환자의 보호자인 이씨는 병원측에 남편의 퇴원을 조르기 시작했다. 경제 형편이 어려워 병원 치료비를 댈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병원측은 처음에는 김씨가 퇴원할 경우 사망할 수도 있다며 이씨의 요구를 거절했으나, 이씨가 강력히 항의하며 막무가내로 퇴원을 요구하자 12월6일 결국 ‘귀가 서약서(환자 또는 환자 가족이 의료진의 의사에 반하여 퇴원할 경우, 이후 사태에 대해 환자 또는 가족이 책임지겠다는 내용)’를 받고 김씨를 퇴원시켰다.

김씨의 퇴원은 뜻밖의 계기로 사건화했다. 집으로 귀가한 김씨는 곧 사망했다. 동네 사람들은 평소 어렵게 살아온 이씨의 딱한 사정을 생각해, 이씨에게 남편의 사망을 변사 사건으로 경찰에 신고하라고 일러 주었다. 극빈자의 경우, 변사 사건 때 일정액을 장례비로 보조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씨는 이미 남편의 응급 수술비로 전셋방 보증금까지 쓸어넣어 당장 살 길이 막막한 상태였다.

이씨는 남편의 사망을 변사 사건으로 경찰에 신고했고, 경찰은 당연히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이씨 집을 찾았다. 경찰은 초상도 제대로 치르지 않고 김씨의 시신이 화장터에 가 있는 등 앞뒤가 맞지 않는 이씨네 정황에 수상쩍은 낌새를 느꼈다. 이후 경찰의 변사 사건 조사는 살인 사건 수사로 방향이 바뀌어 김씨를 수술한 의사들은 뜻밖에 경찰의 방문을 맞았다.

이같은 사건 전개 과정을 거쳐 김명수씨 등 의사들이 검찰에 의해 정식 기소된 때는 1월10일께. 검찰의 기소 이유는 의사들이 기관내 삽관을 제거하면 환자가 사망할 것을 알면서도 이를 제거했으며, 이는 형법상 살인죄에 해당한다는 것이었다. 5월15일에 끝난 이 사건 1심 판결에서 재판부는 검찰의 손을 들어 주었다. 결국 김씨 사망의 책임을 의사가 지게 된 것이다.
“의사와 환자의 권리 침해한 판결”

사건 발생 초기 여론은 ‘누구보다 환자의 생명을 중히 여겨야 할 의료계의 생명 경시 풍조에 쐐기를 박은 판결’이라며 대체로 판결 내용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 판결의 파장은 부정적으로 확산되며 또 다른 문제를 낳고 있다. 판결 내용이 알려진 이후 대형 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일부 환자에 대해 퇴원 기피 풍조가 번지는 등 의료계 일선에서 이 판결의 후유증이 만만치 않게 나타나고 있다. 환자의 생명만 존중하고, 퇴원 결정권이나 진료권(치료 중단 관련) 따위 의사의 권리(또는 환자의 권리)는 묵살해도 되느냐 하는 의사들의 반발도 잇따른다.

일부 소생 가능성이 희박한 중환자나, 치료비를 부담하기 어려운 환자들에 대해 일선 병원에서는 퇴원을 허락하는 것을 관행으로 삼아 왔다. 이러한 퇴원을 전문 용어로는 ‘가망 없는 퇴원’과 ‘의학적 충고에 반한 퇴원’이라고 일컫는다. 가망 없는 퇴원은, 병원에 있어도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 힘들거나, 회복 가능성이 없이 생명만 유지하는 일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해 퇴원시키는 경우다. 반면 의학적 충고에 반한 퇴원은, 환자측이 의사의 설명과 충고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의사(또는 병원)를 신뢰하지 않을 때의 퇴원을 말한다. 국내에서는 어느 쪽에 대해서도 아직 확실한 판단 기준이 정해지지 않은 채 이같은 퇴원이 관행으로 이루어져 왔다. 그런데 최근 일선 병원에서 이같은 퇴원에 제동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대형 병원의 신경외과·소아과 신생아실 등에서 특히 그런 일이 많이 발생한다. 대형 병원 신경외과에는 단기간에 회복할 것인가 사망할 것인가를 판가름하기 어려운 뇌사 상태 환자, 증세가 심한 중풍 환자, 뇌종양 환자가 많다. 또 신생아실에는, 미숙아 상태로 출생해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들이 들어오기 일쑤다. 대개 이같은 경우, 일부 환자 가족은 담당 의사에게 요청해 환자를 퇴원시킨 뒤 죽기를 기다리게 되는데, 이번 판결이 있고부터는 의사가 퇴원 허락을 꺼리는 바람에 환자 보호자측과 언쟁을 벌이는 일까지 벌어진다는 것이다.

일부 병원에서는 이같은 ‘난감한 상황’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일부 환자에 대해 환자 주거지내 작은 병원으로 이송하는 것을 전제로 퇴원시켜 주는 ‘편법 아닌 편법’도 등장하고 있다. 서울대병원 전공의협의회 윤지성 회장(산부인과)은 “사실 퇴원 문제에 대해 의사들로서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퇴원 한번 잘못시켰다가 살인죄를 뒤집어쓰는 마당에 누가 자기 목숨 내놓으면서까지 환자 보호자의 딱한 사정을 들어 주겠는가. 웬만한 규모의 대형 병원에서는 이 때문에 퇴원 기피 풍조가 나타나고 있다”라고 상황을 전한다.
법원의 ‘의사 살인죄’ 판결이 지금껏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의사와 환자(가족)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회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환자의 삶을 종료시키는 것과 관련된 의사 결정은 의사와 환자 보호자 합의에 맡긴 것이 지금까지의 관행이었으며, 의사들 처지에서는 이 부분까지를 의료 행위의 재량권으로 받아들여 왔다. 그런데 법원의 판결은 김수광씨의 퇴원을 재량권을 넘어선 위법이라고 결론지음으로써 이같은 재량권을 부정했다.

일선 의료인들은 특히 이 점에 강한 불만을 표시한다. ‘법원의 판결 논리를 그대로 따른다면, 앞으로 환자 보호자가 환자의 퇴원을 요구해 퇴원한 뒤에라도 의사가 치료 행위를 중단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이 나온다’고 의사들은 입을 모은다. 의사의 의료 행위는 환자측과의 계약을 통한 행위인데, 계약 관계가 사라졌는데도 의사에게 법적 책임을 묻는 일은 상식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의료계는 이번 판결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식 밖의 판결’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대응책을 모색하고 있다. 사건 판결에 대한 문제 제기를 주도하고 있는 대한전공의협의회는 이미 지난 5월말 비상총회를 열어 한 차례 항의 집회를 가진 외에, 오는 6월말께 의사 단체·시민 단체가 참가하는 대규모 공청회를 계획해 놓고 있다. 또 이 단체는 법정 싸움을 위해 대대적인 모금운동에도 나서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협회 차원에서 이 사건과 관련해 소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사건 초기 미온적으로 대응한다는 이유로 일부 병원의 회비 납부 거부에 직면하기도 했다.

“우리가 꼭 의사들의 권리만 지키기 위해 이렇게 문제 제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이번 판결이 현실을 개선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되는, 대안 없는 판결이라는 데 있다. 치료비가 없어 퇴원하겠다는 사람을 붙잡으면, 치료비는 병원이 물어야 하나, 국가가 물어야 하나”라고 서울대병원 전공의협의회 윤지성 회장은 되묻는다. 당사자 이해에 사회적 명분까지 걸려 ‘의사 살인죄 적용’을 둘러싼 법정 공방은 곧 있을 항소심 공판에서 한층 더 불꽃을 튀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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