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질환에 시달리는 5 · 18 부상자들
  • 나권일 광주 주재기자 ()
  • 승인 1996.06.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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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 92% 16년째 각종 질환에 시달려… 파편 제거 못한 총상자는 ‘납중독’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어도 ‘광주’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관념적인 수사(修辭)가 아니다.

광주시 방림동에 사는 박상철씨(28)는 80년 중학교 1학년이었다. 그는 5월21일 오후 거리를 지나다가 척추에 관통상을 입은 뒤 하반신 마비로 16년째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 왔다. 통증이 심해 하루에도 몇 차례씩 진통제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도 박씨는 휴학과 전학을 거듭하면서 얼마전 광주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하는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의지로 고통을 참아낼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고통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5·18 피해자 고통 규명한 최초의 학술 논문

박씨처럼 거의 모든 5·18 피해자들은 계엄군이 쏜 총탄의 파편이 몸에 박힌 채 지금도 진통제에 의지하며 신경통과 우울증 등 갖가지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피해자들의 주장이 그렇다는 것이 아니다. 5·18 피해자들이 신체 및 정신 질환 등으로 정상적인 삶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변주나 교수(41·전북대 의대·간호학)는 지난 5월25일 ‘5·18 광주 민중항쟁 16주년 행사위원회’가 주최한 논문 발표회에서 ‘5·18 피해자 16년 후 후유증에 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 날 변교수는 총상을 입은 부상자 가운데 일부가 신체에 박힌 총탄을 제거하지 못해 악성 빈혈증 등 납중독 증세를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 논문은 과학적 자료를 근거로 5·18 피해자들의 고통을 규명한 최초의 학술 논문이다. 변교수는 이 연구 내용을 6월1일 전북대에서 열린 한국문화인류학회 학술 발표회에서 보고한 데 이어, 12월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미국인류학회 심포지엄에서도 발표할 예정이다.
이 연구 조사는 94년 3월~95년 7월 5·18 피해자 1백34명(부상자 70명, 유가족 및 행방 불명자 가족 34명, 교도소 생존자 30명)과 광주 시민(비피해자) 50명을 대상으로 두 차례 실시되었다. 1차 연구에서는 피해자들의 후유증이 조사되었으며, 그 다음 단계로 총상 피해자 42명을 대상으로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에 의한 사격이었다’는 주장의 타당성 여부와 납 파편에 의한 납중독 여부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1차 연구에서 5·18 피해자들은 그동안 입원·사망·이혼·별거·실직·이주 등 극심한 생활 변화를 겪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 빈도는 정상인에 비해 7.1배나 높았다. 5·18로 인한 정신 피해가 일상 생활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5·18 피해자들은 정상인보다 6배나 높은 정서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우울증도 정상인의 3배에 달했다.

5·18 피해자들의 심리적 충격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타액내 신경 호르몬인 ‘코티졸’ 수치와 ‘면역 글로부린A’(S-IgA) 수치를 미국 플로리다 대학 생명공학연구실에 보내 분석한 결과, 피해자들의 코티졸 수치는 정상인보다 6.6배나 높은 반면, 면역 글로부린A 수치는 3.9배 가량 낮게 나타났다. 이는 5·18 피해자들이 정상인보다 신경이 예민하고 면역성이 약하다는 사실을 의학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다.

피해자의 42%는 신체 질환을, 19%는 정신 질환을, 31%는 정신 및 신체 질환을 동시에 앓고 있었다. 특히 신체 질환의 경우, 신경통 및 디스크가 34%, 반신 불수 17%, 뇌증후군 23%, 당뇨·고혈압·위궤양 등 스트레스성 성인병이 10%를 차지했다. 정신 질환은 정신 분열증 56%, 성격 장애 18%, 기억력 장애 7%, 외상성 신경증 7%, 우울증 12%로 집계되었다.

총상 피해자 42명의 납중독 여부를 가리기 위해 실시한 2차 조사 결과에서는 15년이 지난 95년 현재까지 체내에 탄알이 박혀 있는 피해자가 11.7%를 차지했고, 파편과 탄알이 동시에 박혀 있는 총상 피해자도 23.6%나 되었다.

총상 피해자들은 다리(21.3%), 팔(19.1%), 머리와 목(14.7%), 가슴(10.6%) 등과 둔부(14.9%) 등 신체의 모든 부위에 총격을 당해 5·18 당시 계엄군이 무차별 난사했음을 말해 주었다. 또 80년 당시 진단서를 토대로 사격 방향을 분석한 결과 피해자의 32.4%가 뒤에서 앞으로, 26.5%가 옆에서 옆으로 상처를 입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자위권 발동에 의한 사격” 허구 드러나

충격적인 것은 총상 피해자의 53%가 시위대가 카빈 소총으로 무장하기 전인 5월21일 오후 1시30분 이전에 총상을 당했으며, 1~10세 젖먹이와 어린이가 16%, 여성이 38%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이번 논문을 발표하면서 변교수는 80년 5월21일 ‘자위권 발동에 의한 사격이었다’는 계엄군측 주장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증거로 총상 피해자인 남현애씨(여·39)의 부상 당시 진단서를 공개했다. 이 진단서는 80년 광주 서석병원에서 발급한 것인데, 5월20일에 이미 총상을 치료한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따라서 5월21일 이전에 계엄군이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했음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이다.

총상 피해자의 납중독이 밝혀졌다는 것도 이번 연구가 거둔 중요한 실증적 성과의 하나이다. 지난해 7월 납 파편 보유자의 납중독 여부를 가리기 위해 피해자들의 혈액과 소변 검사를 광주 산업보건협회에 의뢰했는데, 그 결과 피해자 가운데 박영순(43), 홍 란(47) 최복순(55) 씨 등 3명이 납중독으로 인한 후유증의 주된 증상인 빈혈증을 보였다.

박영순씨(43·광주시 봉선동)는 80년 5월21일 도청 앞 시위에 참여했다가 오른쪽 발목에 총상을 입었는데, 그의 발목 주위에는 아직도 납탄이 퍼져 있다. 그는 “M16 탄두의 겉은 구리와 아연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뒷 부분에는 탄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납을 넣은 것으로 알고 있다. 납중독 때문에 만성 피로와 빈혈로 고생하고 있다”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최복순씨(광주시 방림동)는 박씨보다 증상이 훨씬 심한 납중독 환자로 판명되었다. 최씨는 5·18 당시 방안에 있다가 날아온 총탄에 오른쪽 어깨를 다쳤는데, 관절 부위와 골수 부분에 납탄이 수없이 퍼져 있으나 아직 파편 제거 수술을 받지 못했다.

산업보건협회가 분석한 결과를 미국과 영국의 산업보건학회가 설정한 혈중 납 생체 허락 기준치와 비교하면 5명이 기준치인 80UG/100㎖를 넘어섰고, 박영순씨와 최복순씨 등 3명은 위험 수위인 120UG/ 100㎖를 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변교수는 정확한 조사를 위해 파편 보유자 26명의 머리카락과 파편 비보유자 10명의 머리카락을 미국산업보건협회에 분석을 의뢰했는데, 결과가 나오면 5·18 총상 피해자들의 납중독 유무를 최종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변교수는 “납 파편 보유 환자들은 빈혈과 복통 등 납중독 환자의 일반적 증세에 그치지 않고 증상이 신장 및 중추신경 이상과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조속한 치료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부상자 방치한 한국 정부에 분노”

지난 1월 총상 피해자인 박상철·김유성·손제선 씨 3 명은 납중독 정밀 진단과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유성씨(20·대전시 유성구)는 80년 5월21일 오후 4시께 오른쪽 손목 성장판에 관통상을 입어 손목의 성장이 정지되었다. 김씨는 총상 환자 전문 치료기관인 로스앤젤레스 국립 원호병원에서 수술을 마쳤다.

역시 총상 환자인 김씨의 어머니 손제선씨(46)는 방안에 있다가 날아온 총알에 왼쪽 턱과 목 부분에 관통상을 입었다. 손씨는 목 주위에 납탄이 퍼져 그 통증으로 밤마다 가위눌림에 시달려 왔다. 이들 세 사람에 대한 치료는 변주나 교수의 주선과 전북대 의대 학생들의 모금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특히 박상철씨의 경우 국제의사인권재단이 수술비의 75%까지 지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5일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미국에서 치료받는 이 세 사람을 특집 기사로 소개하면서 이들의 치료를 맡은 한국계 미국인 의사 존스 한의 말을 인용해 ‘아무런 치료도 하지 않고 이들을 방치해 온 한국 정부 당국에 분노를 느낀다’라고 보도했다.

변교수의 연구 결과가 발표된 이후 5·18 관련 단체들을 중심으로 총상 환자 상담 및 치료를 담당할 전문 치료기관 설립 등 국가적 차원의 실질적 대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5·18 16주기 행사위원회 위원장 강신석 목사는 “외국에서는 2차대전 중 유태인 대학살이나 월남전, 로스앤젤레스 폭동 등 사회적 대재난에 대한 학술적 조명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역사의 산 교훈으로 삼고 있다. ‘5·18의 세계화’를 위해서라도 계속적인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정부와 학술 재단이 지원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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