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역 특례 근로자 “차라리 군대 가겠다”
  • 朴晟濬 기자 ()
  • 승인 1995.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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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노동·부당 해고 등 인권 침해에 신음…‘해고=입대’로 옴쭉달싹 못해
서울 강남에 있는 ㅎ컴퓨터 회사에서 일하는 ㅂ씨(27)는 지난해 10월 처음 이 회사에 발을 들여놓을 때만 해도 자기가 ‘국가로부터 선택 받은 존재’라고 자부했다. 대한민국 국민, 그 중에서도 남자라면 누구나 치러야 할 병역 의무를 적법한 절차를 통해 면제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ㅂ씨는 국가가 공인한 1급 정보처리 기사이다. 산업 기능 요원으로 선정된 그는 정부가 지정한 산업체에서 3년 일하면 병역을 마친 것으로 인정되는 특혜를 받았다. 이른바 ‘산업 기능 요원에 대한 병역 특례’ 혜택을 보게 된 것이다.

업주 부당 행위에 정부는 ‘나 몰라라’

하지만 ㅂ씨는 현재 자기를 선택 받은 존재라기보다는 ‘버림 받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 지난해 10월 입사한 이후 회사측으로부터 말못할 ‘부당 대우’를 받아왔는데도 이를 합법적으로 막을 길이 없는 데다가, 자기를 병역 특례자(특례 보충역)로 선정한 당국마저 그저 ‘나 몰라라’ 하는 태도로 일관해 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가 열거하는 부당 행위로는, 사장을 비롯한 직장 상사들의 폭언, 퇴근 시간이 따로 없는 중노동 강요, 산정 근거가 불확실하고 지급 시기도 일정치 않은 쥐꼬리만한 급여, 걸핏하면 들이대는 해고 위협 등이 있다. 노동력을 공급하고 그 대가를 정당하게 받아야 할 근로자인 ㅂ씨에게 회사가 이같은 부당 행위를 일삼는 근거는 오직 하나였다. 그는 해고되면 즉시 군대로 끌려갈 ‘병역 특례자’인 것이다.

ㅂ씨의 사례는 군 인력 자원 가운데 일정 자격이 있는 사람을 뽑아 국가 기간산업체나 특수 연구기관, 방위산업체에 투입하는 병역 특례 제도가, 원래 취지와 달리 근로자의 정당한 권리 행사를 가로막거나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제기하고 있다. 이들을 고용한 기업주가 ‘군인도 아니고 근로자도 아닌’ 산업 기능 요원의 불안정한 지위를 악용해 일반 근로자보다 낮은 임금을 지불하거나 강제 잔업을 시키는 등 불합리하게 처우하는데도 이를 통제할 장치가 없어 해당 근로자들이 해를 입는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이다.

억울한 처지를 호소하는 사람들은 ㅂ씨말고도 많다. 마산·창원 지역의 한 제조업체에서 근무했던 ㄱ씨도 그 중 한 사람이다. ㄱ씨는 최근 회사측이 병역 특례 관련 법규를 어기고 자기네 필요에 따라 그를 국가가 지정한 작업 부서와는 다른 곳에 일방적으로 배치한 데 대해 항의했다가 ‘회사 지시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전격 해고됐다. 병역법 관련 규정에 따르면, 특례자를 받아들이는 업체는 그 근로자를 원래 특례 신청했던 분야에만 배치해 일을 시키도록 되어 있다. 만약 다른 분야의 일을 시켰다가 적발되면 회사는 벌금을 물게 되고 해당 근로자는 특례 조처가 자동 취소되어 군대를 가게 된다. 결국 그는 회사측의 불법 행위에 정당하게 이의를 제기했다가 뜻밖의 불이익을 당한 셈이다. ㄱ씨는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 해고 구제 신청’을 제기해 놓았으나 현재 계류되어 있다.

병역 특례 문제가 노동 일반의 문제로 비화한 것은, 91년 정부가 병역 특례 지정 분야를 방위산업, 전문 연구 활동, 공중보건 등 극히 제한된 분야에서 공업·광업·건설·에너지·수산·해운 등 거의 모든 산업 분야로 확대하면서부터이다. 정부가 새로 바뀐 병역특례제를 시행하면서 내세운 취지는, 더럽고 위험하고 힘든 ‘3D 업종’산업체가 겪는 인력난을 군대내 잉여 인력을 투입해 해소한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를 위해 과거 5년이던 병역 특례자의 의무 복무 기간을 3년으로 줄이는 조처도 단행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제도 시행 첫해인 92년에만 2만7천7백90명을 기록한 산업 기능 요원 수는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 올해에는 총 3만8천3백3명을 헤아린다.
물론 산업 기능 요원만이 병역 특례 대상인 것은 아니다. 자연계·이공계를 막론하고 석사 이상 학위를 가진 사람으로서 국가가 인정하는 연구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은 특례 대상에 포함된다. 또 국제 기능대회에서 3위 이상 입상한 사람은 기능 특기자로 분류돼 특례 대상이 된다. 보건소에서 근무하는 공중보건의나, 각 관청에서 필요하다고 요청한 공익 근무 요원에게도 병역 특례를 신청할 자격이 주어진다. 병역 특례 대상자에 대한 심사와 선정 작업은 해당 기관의 신청 또는 추천을 받아 병무청에 설치된 특례심사위원회가 엄격하게 시행한다.

병역 특례 빌미로 직업 이전의 자유 박탈

사정이 이러한데도 유독 산업 기능 요원이 문제 되는 까닭은, 이들이 전체 병역 특례 대상자 가운데 압도적 다수를 차지함에도, 대부분 근로 조건이 열악하거나 노무 관리를 주먹구구 식으로 하는 중소 기업체 사업장에 배치되어 업주측으로부터 상식 이하의 대접을 받는 사례가 잇따르기 때문이다.

대전 지역 노동단체 가운데 하나인 ‘늘푸른노동자학교’가 최근 이 지역 산업체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특례 근로자의 상당수가 업주측으로부터 입사 때 초임을 산정하는 과정에서 일반 근로자와 차등 대우를 받든지, 자격증 수당을 아예 받지 못하든지, 심지어 일정 기간 ‘의무 노동’을 강요당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사업주가 병역특례 업체임을 내세워 근로자를 모집·고용한 뒤 해당 근로자에 대한 특례 신청 작업을 1년 이상 늦춰 근로 기간을 연장하는 사례도 있다. 늘푸른노동자학교 오윤근씨는 “생일이 늦은 사람은 2년 정도 기다려야 병역 특례자로 등록되는 경우도 있다. 최소한 그 기간만큼 업주는 힘 들이지 않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같은 행위는 병역 특례를 빌미로 직업 이전의 자유마저 박탈하는 횡포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한다.

병역 특례 근로자들의 최대 약점은, 복무 기간을 마칠 때까지 마음대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길 수 없다는 점이다. 병역법 시행령 제85조는 전문 연구요원 및 산업기능 요원은 △종사하는 지정 업체가 폐업하거나 지정 업체 선정이 취소된 때 △종사하는 지정 업체가 6개월 이상 휴업하거나 영업정지 처분을 받은 때 등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편입 당시의 지정 업체에서 종사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그밖의 다른 경우에는 ‘병역 특례 혜택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떤 이유로든 회사를 떠나거나 옮길 수 없게끔 되어 있다.

물론 특례 근로자의 지위를 보장해줄 법적 장치는 있다. 노동조합법 관련 조항은 그 중 대표적이다. 이 법 제3조 4항은 ‘해고된 근로자도 해고의 효력을 다투고 있는 동안에는 근로자로 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동부도 91년 ‘병역 특례를 받는 징집 대상자들도 일반 근로자와 마찬가지로 노조 가입 등 노동 3권을 가진다’고 유권 해석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법이 공평하게 적용되지 않는 듯하다. 전국해고노동자투쟁위원회 소속 병역 특례 근로자 12명도 이 경우에 속한다. 대우정밀·(주)풍산 등 방위산업체에서 근무하다가 노조 활동과 관련해 해고된 이들은, 현재 ‘본의 아니게’ 병역 기피자가 되어 사법 당국의 수배 대상이 되어 있다. 해고의 적법성을 가리기 위한 소송, 즉 노동법에 보장된 권리에 따라 ‘해고무효확인 소송’을 내기 위해 입영 연기를 요청했다가 당국으로부터 퇴짜를 맞은 것이다. 그 뒤 이들 대부분은 회사측과 합의하여 복직이 결정됐으나, 소 계류 기간의 병역 기피 혐의가 풀리지 않아 복직이 되더라도 사법 처리를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국가의 필요에 따라 특례를 받은 사람들이 권리를 침해 받고 있다는 데 대해 일부 시민단체는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현행 병역 특례 제도에 인권 침해 소지가 있다고 보고 정확한 실태 조사 작업을 벌이는 참여민주사회시민연대(참여연대)도 그 중 하나다. 이 단체 이정운 간사는 “특례 제도를 악용하는 일부 악덕 업주에게 문제가 있지만 정부도 책임져야 할 부분이 있다. 제도를 시행하는 데에만 급급해 ‘독소 조항’을 없애거나 인권 보장 원칙과 상충하는 요소를 손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한다.

참여연대측은 실태 조사를 마무리하는 대로 악덕 사업주를 관계 당국에 고발 조처하고, 병역 관련 법 개정 작업도 벌일 예정이다. 국방과 산업 양쪽에서 획기적 제도라고 호평 받았던 산업 기능 요원에 대한 병역 특례 제도가 시행된 지 3년 만에 당사자와 일부 시민단체로부터 공격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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