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반공 투사 출신 탈북자의 황장엽씨 공개비판
  • 정희상 기자 (hschung@sisapress.com)
  • 승인 2000.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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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엽씨와 김덕홍씨가 북한 민주화 투쟁을 위한 자유로운 활동을 침해받았다고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한 뒤 <시사저널> 편집국에는 또 다른 탈북 망명객 한 사람이 찾아왔다. 그들보다 2년 앞서 1995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통해 망명한 그는 함경북도 부령 출신 홍철혁씨(65)이다. 소년 시절인 1950년부터 최근까지 북한·중국·러시아를 오가며 40여 년간 ‘반북 반공 지하활동’을 해온 홍씨는 말 그대로 북한내 반공 투쟁 역사의 산 증인이다. 국정원·통일부를 통해 확인한 결과 그의 망명 배경과 반공 투쟁 이력은 사실이었다.

홍씨가 기자를 찾은 이유는, 얼핏 황장엽씨가 가진 대정부 불만과 맥이 통하는 것처럼 보였다. 현정부가 탈북 망명객들을 지나치게 냉대하고 있다는 불만이다. 그러나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그의 불만은 황장엽씨와 확연히 달랐다. 나아가 북한 민주화운동을 명분으로 내건 황장엽씨와 김덕홍씨의 활동에 대해서는 평생에 걸쳐 북한 안팎에서 반공 투쟁을 해온 ‘동지’들의 이름을 걸고 거침없는 비판의 화살을 날렸다.

황장엽씨가 일부 탈북자들과 함께 북한 민주화운동을 하도록 보장해 달라고 주장하는데….

북한에서 일관되게 한평생 지하 반북 활동을 한 처지에서 그들과 손잡을 수 없다. 그들은 고급 당원으로 호의호식하면서 한평생 우리 반공 투사들을 박해하다가 변절했다. 정세가 바뀌면 그들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자고로 사상과 이념을 떠나 배신자는 애국과 민족을 말할 자격이 없다.
과거야 어쨌든 지금부터는 당신과 같은 입장에 서겠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진정으로 통일을 위해 앞장설 사람들이 이들 가운데 몇이나 되겠는가. 대다수 탈북자는 북한의 자유민주주의 통일을 위해 망명한 것이 아니라 더 잘살아 보겠다는 경제적 욕구, 실수로 인한 당의 신임 상실 때문에 남쪽행을 택했다. 황씨 등 고위층 출신 탈북자들은 지난 한평생 북한에서 우리 동지들에게 저지른 가혹한 탄압에 대해 한마디 사과도 하지 않았다. 한때 황장엽씨가 이끄는 탈북자동지회를 찾아가 손을 잡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이유로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40여 년에 걸친 홍씨 집안의 반공 투쟁 역사는 일제 시기로 거슬러올라간다. 홍범도 장군이 이끈 전투로 유명한 봉오동 지구에서 태어난 홍씨는 이 무렵 조부와 부친이 벌였던 민족주의(자본주의) 계열 항일 활동을 보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창기 김일성 주석의 북한 정권 수립에 맞서 지하 투쟁을 하던 홍씨의 부친은 한국전쟁 시기에 미국 CIA 첩보부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각지에서 무장 투쟁을 벌였다고 한다.

19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기 직전 정세가 불리함을 알아챈 북한 각지의 반공 유격대는 백두산 아래 관모봉에 입산해 미국 CIA가 파견한 요원 2명으로부터 장기 첩보 교육과 도움을 받아 정전후 노동당에 침투했다. 전쟁이 끝난 후 제대병 행세를 하며 평양으로 들어간 홍씨의 부친은 살아 남은 유격대 간부들과 함께 1954년 3월5일 ‘반구사’라는 전국 단위 지하 반공 조직을 결성했다. 홍씨는 10대 중반부터 전국을 돌며 지하 조직 복구를 위한 연락원으로 활동했다.

반구사의 초기 활동은 주로 평양을 비롯한 북한 대도시의 전후 복구 건설 현장에 대원들을 잠입시켜 노동당으로부터 인정받는 대원으로 침투하는 것이었다. 주로 지주와 자본가 집안 자녀들이었던 반구사 요원들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각지의 노동당 주요 간부로 쉽게 침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내 사상 검증 투쟁 때 정체가 들통난 대원들은 1954년 말부터 백두산 바로 밑 포태산에 입산했다. 북한 각지에서 이렇게 포태산으로 피신한 반구사 대원은 100여명. 전쟁후 북한 내 반공 유격대원들이 포태산으로 모인 까닭은 첩첩 산악인 그곳에 국영 5호 농장이 있으므로 식량을 약탈하기가 쉬워 장기 유격 거점으로 삼기 적합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약 3년 동안 이곳에서 유격 활동을 하던 반구사 대원들은 1957년 북한 정권으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간부 6명만 포태산 거점에 남긴 채 두만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나 홍씨의 부친은 포태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처형된 부친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한 홍씨는 평양에서 다시 반김일성 삐라를 돌리는 등 지하 활동을 하다가 1959년 체포되어 평안남도에 있는 성흥광산에서 2년형을 살았다. 만기 출소한 후 평생 성흥광산 광부로 강제 노역에 종사하던 홍씨는 1962년 감시 소홀을 틈타 중국으로 탈출했다. 1960년대 말 문화혁명 시기에 반구사 요원들은 대거 체포되어 북한에 넘겨졌다. 이 무렵 홍씨도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반혁명 혐의로 감옥살이를 세 차례나 했다. 중국 정부의 탄압으로 인해 한·만 국경을 무대로 활동하던 반구사 대원들은 압록강과 두만강 연안에 무기들을 묻어두고 내몽골 대흥안령 산악으로 들어가 훗날을 기약했다. 내몽골로 들어가 무장 투쟁이 불가능해진 이들은 이때부터 이른바 북한을 상대로 한 ‘서한투쟁’(각급 노동당 간부에게 반김일성 편지 보내기)을 계속했다.

1980년대 이후 북한에서는 홍씨가 망명시킨 인민군 김호일 대좌를 체포하기 위해 중국을 샅샅이 뒤졌다고 한다. 이 일로 활동에 제약을 느낀 홍씨는 피신을 거듭하다가 1993년 러시아로 잠입했다. 때마침 한·소 수교후 블라디보스토크에 한국영사관이 들어서자 홍씨는 대북 투쟁 지원을 요청하고 탈북 벌목공을 상대로 귀국후 반공 활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들에게 절망감을 느꼈다고 한다. 탈북 벌목공들이 다시는 북에 들어가지 않겠다며 오로지 한국으로 귀순하겠다고 나왔기 때문이다. 벌목공을 상대로 새로운 반북 조직 결성을 서두르던 1994년 무렵 홍씨에게 또다른 위협이 닥쳤다. 결국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영사관으로 피신한 홍씨는 1995년 5월27일 한국 정부의 도움으로 귀국해 당시 안기부의 조사를 받고 신변 보호 상태에 들어갔다.

정부, 홍씨 경력 인정하고도 공식 지원 안해

그러나 정부는 조사후 홍씨의 경력을 인정하면서도 공식 지원은 하지 않았다. 과거 귀순용사 특별보상법이 없어지고 탈북자 정착 지원에 관한 법률이 신설되면서, 러시아에서 망명한 홍씨와 같은 경우 예우 조항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홍씨의 인생 역정에 대해 “정전협정 후 북한 내부 반공 투쟁의 역사 박물관이다”라고 말했다. 통일부 인도지원국 관계자는 “10년 전에만 들어왔어도 정부가 훈장을 주렁주렁 달아 우대했을 분이지만 법률이 개정되어 그 사각지대에 있는 희생양이 된 감이 있다”라고 말했다.

호적마저도 망명후 4년 만에야 등재한 홍씨는 그동안 지하철 공사장을 전전하며 살아왔다. 그나마 최근 통일부가 비공식으로 12평짜리 아파트와 영세민 수준의 생활보호 자금을 지원해 홍씨는 비로소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북한 내 반공 투쟁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북한 내 반공 투쟁에 대한 정부의 홀대에 실망한 홍씨이지만 남북 양쪽에서 호의호식해온 황장엽·김덕홍 씨에 대해서는 단호한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평생 반김일성 투쟁을 해온 나 같은 사람은 고마운 마음으로 이 나라 현실을 바라본다. 고위직 출신 탈북자들은 이 나라에 와서 반성도 고마움도 모르는 것 같다. 고국에 들어와 보니 우리 동지들이 북한에서 만주에서 맞아죽고 얼어죽고 처형되면서 아무 지원도 없이 40여 년간 반북·반공 투쟁의 외길을 걸어온 시기에, 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이 공사장에서 죽고 땀을 흘렸다. 아직도 집 없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미안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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