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만 군인 표가 대선 결과 좌우한다
  • 김 당 기자 ()
  • 승인 1997.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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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만 군인 표, 승부 좌우할 변수…한나라당, 파격적 공약 발표
일찍이 모택동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97년 12월 새로 창출되는 한국의 대권 또한 ‘총구’에서 나오게 생겼다. 물론 총구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전자가 무력을 뜻한다면 후자는 군심(軍心), 즉 군인 표를 뜻한다. 즉 이번 대선에서는 군심이 대권 향방을 좌우하는 핵심 변수라는 것이다.

이런 가설이 성립하려면 몇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대선 후보 간에 박빙의 경쟁 구도가 유지되어야 한다. 그래야 군인 표가 이른바 캐스팅 보트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또 군심의 응집력이 있어야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지극히 상식적 논리이지만, 대권 경쟁에 나선 이른바 빅3 후보에게 군인 표가 분산된다면 캐스팅 보트라는 의미가 없다. 즉 특정 후보에게 몰표가 쏠리거나, 특정 후보에게 비토권을 행사하는 현상이 생겨야 캐스팅 보트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표본 특성상 군심은 각종 여론 조사에서 한 번도 포착되지 않은 ‘숨은 표’이다.

이런 전제 조건을 충족하는 가설이나 상황 변수는 적지 않다. 우선 현재의 경쟁 체제가 빅3 구도라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여론 조사 기관에 따라 1강2중 또는 2강1중 또는 3강이라고 표현하지만, 여론 조사 결과를 공개할 수 있는 최종 시한인 11월25일까지 유지된 지지도 순위(김대중·이회창·이인제 후보 순)는 현재까지 변동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 여론 조사 기관들은 ‘초원 복국집’ 사건 같은 돌발 변수가 없는 한 대체로 이같은 순위에 변동이 없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여론 조사 전문가들은 현재의 순위가 유지되더라도 1·2위 후보 간의 표 차이는 백만 표 안팎이 되리라고 본다.

문제는 군심의 응집력이다. 이번 대선에서 부재자 투표인은 총 유권자 3천2백32만3천2백69명의 2.5%인 80만1천1백30명으로 집계되었다. 이 중 77.4%인 62만여 명이 현역 군인이다. 나머지는 교도소 수용자·해외 주재원 등이다. 선관위에 따르면, 92년 대선 때 부재자 투표율은 95.7%였고, 96년 총선 때는 94.6%였다. 이번 선거에서도 일반 유권자들의 투표율을 훨씬 웃도는 95%(76만명) 정도가, 대통령 선거일에 앞서 실시하는 부재자 투표에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군인 77%가 대학 이상 학력

전체 부재자의 77%가 넘는 군인 표의 대부분은 사실상 20∼40대 젊은 남성 사병과 장교 들이다. 여성 비율은 말할 것도 없고 별(장성) 표도 5백명이 안된다. 또 과거와 달리 이들 중 대학·대학원 졸업·재학자가 무려 77%나 된다. 즉 일반 유권자들보다 훨씬 더 ‘젊은 남성 고학력자’가 표본의 특성이다. 이들에 대한 여론 조사가 없었기 때문에 군심의 향방을 단언할 수 없지만 일반 유권자들의 성별·연령별 지지 성향에 비추어 유추할 수 있다. 여론 조사에서 드러난 일반 유권자들의 김대중·이인제 후보 지지 성향은 성별로는 남고여저(男高女低), 연령으로는 20∼30대에서 지지율이 높다. 반면에 이회창 후보는 남성보다는 여성, 20∼30대보다는 40∼50대 이상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다.

현역 군인의 정치 성향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준거 집단은 대학생 표본이다. 전국대학신문기자연합이 전국 60개 대학 1천4백95명을 대상으로 대선 후보 지지도를 조사한 결과(조사 시기 10월21∼25일, 표본 오차는 95% 신뢰 수준에서 ±2.5%)에 따르면, 지지도는 김대중(28.7%) 이인제(13.1%) 권영길(9.4%) 순이었다. 권영길 후보가 이회창 후보(3.7%)보다 더 높게 나온 이같은 결과는,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에 비추어 ‘매우 엉뚱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지지도는 같은 조사에서 ‘이번 대선이 갖는 정치적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여야간 정권 교체(31.6%) △세대 교체(24.5%) △진보·민주 진영의 정치세력화(21.9%) △정권 재창출(14.6%) 순으로 응답한 것에 비추어 ‘전혀 엉뚱하지 않은’ 결과이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 최대 쟁점 가운데 하나로 떠오른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에 대한 병역 기피 의혹에다 현역 대대장이 이후보를 비토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는 사건까지 겹쳐 어쩌면 이번 부재자 투표 결과가 ‘최악의 여당표 부재 현상’으로 나타날지도 모른다. 실제로 지난 9월 병역 기피 의혹 시비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점에 치러졌던 보궐 선거(경기 안양 만안구)에서 부재자의 90%에 가까운 몰표가 국민회의·자민련 단일 후보인 김일주 후보에게 쏟아졌다는 것이 당시 개표 과정을 참관한 선거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국민회의 “부재자표 합치면 단연 1위” 주장

후보 등록 직전에 조사된 1·2위 간의 살얼음 경쟁 구도에도 불구하고 국민회의측이 여론 조사에 잡히지 않은 숨은 표(부재자표)를 들어 1위를 주장하고, 이인제 후보가 12월4일 논산 신병훈련소 앞에서 입소자들을 격려하고 기념 촬영을 한 것도 군심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세에 불안을 느낀 듯 이회창 후보는 군심 회복을 위한 ‘군 복지 향상’ 15개 공약을 내놓았다. 사병 복무 기간 24개월로 단축, 장기 복무 전역 군인 우선 고용, 군인 주택 100% 확충 등 특단의 복지 선물로 맞서고 있으나 얼마나 약효를 발휘할지는 알 수 없다.

이른바 전통적인 안정 희구 세력인 군인 표의 십중팔구가 여당 표라는 등식은 이미 깨진 지 오래이다. 군은 5·16 쿠데타 이후 총구에서 나온 권력을 수십 년 동안 지탱해온 핵심 집단이었다. 김영삼 정부 출범 이후 군은 과거의 잘못 때문에 가혹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군에는 문민 대통령이 군을 매도했다는 피해 의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문민 정부 5년이 지난 이제는 거꾸로 군심이 대권을 창출하는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거 막바지의 경제난 쟁점과 텔레비전 합동 토론회라는 변수를 제외하면, 그 어느 때보다도 부재자 투표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군인 표가 선거를 좌우하는 중요한 변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권 경쟁의 승부는 12월18일 이전에 이미 결정날는지도 모른다. 선거 관리의 특성상 부재자 투표는 선거일보다 앞서 12월11~13일 실시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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