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술’ 달인 이원조의 두 얼굴
  • 張榮熙·蘇成玟 기자 ()
  • 승인 1995.12.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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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조씨는 검은돈은 은밀하게, 공적 업무는 깨끗하게 처리했다.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온 것이다. 그래서 이씨의 공개적 행적에 대한 금융계의 평가는 부정적이지 않다.
이원조 전 의원(62)은 11월23일 6년 전과 같은 바바리 코트 차림으로 대검찰청에 출두했다. 시종 무표정한 것도 89년 1월 처음 소환됐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5·6공화국의 비자금 관리인으로 알려진 이 ‘바바리 코트 사나이’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노씨 비자금 사건을 처음 폭로한 민주당 박계동 의원은 “이씨가 열쇠를 쥐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검찰은 이‘열쇠’를 가지고도 노씨 비자금의 금고문을 따는 데는 일단 실패했다. 이씨를 소환하기 전 대검 고위 관계자는 이렇게 실토했다. “언론은 이씨가 대단한 인물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굳이 걸자면 공동 정범이 될 수 있겠지만 법률적으로 쉽지 않다. 공동 정범이란 모의를 같이 한 것 외에 이익을 나눠 가져야 한다. 가령 두 사람이 도박을 하기로 모의했다가 그 중 한 사람이 도박판에서 빠졌다고 하자. 모의를 했다는 것만 보면 공동 정범이지만, 판에서 빠진 사람은 아무런 실익이 없기 때문에 공동 정범이 안된다는 것이 다수의 견해다.” 대검의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이씨를 소환해서) 언론이 제기하는 의혹에 대해서는 다 물어볼 것이다. 그러나 본인이 입을 안 열면 어떻게 하겠느냐”라고 조사의 한계를 털어놓았다. 검찰은 일단 ‘특별한 것이 없다’며 11월25일 이씨를 귀가시켰다.

검찰의 이같은 조처에 대해 의도적으로 불성실하게 수사했다고 의심하는 사람이 많지만, 검찰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만큼 이씨가 어지간해서는 꼬리를 잡히지 않으리만큼 철두철미하게 비자금을 관리해 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원조씨의 업무 처리 행태나 인맥 관리 기술 등 그동안 그가 보여준 행적이 그같은 추론을 뒷받침한다.

먼저 그의 업무 스타일을 보자. 그는 한마디로 완벽주의자다. 그를 접해 본 금융계 인사들은 대부분 그의 치밀하고 빈틈없는 일처리에 혀를 내둘렀다. 은행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기업체 여신 현황 요약 자료만 보고도 부실 여지가 있는 대출인지 아닌지를 그 자리에서 찍어냈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한번 본 서류나 지시 사항은 반드시 확인을 했다. 은행감독원장 시절(1986~1988) 이씨는 담당 국장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열흘 전에 본 계수도 기억해 그 국장을 무안하게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감독원의 중요 업무인 검사를 수박 겉핥기 식으로 하면 금세 그에게 들통이 나 혼쭐이 났다고 한 검사국 국장은 말했다.

“꼼꼼하면서도 대범했다”

치밀하면서도 통이 크고 시원시원했다고 말하는 이도 꽤 많다. 가령 언론 관계에서도 부정적인 보도가 나가면 해당 직원을 다그치는 기관장이 많은데 그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이씨의 비서 역이었던 한국은행의 한 임원은 “언론에 과민 반응을 보이지 말고 자기 일만 열심히 하라”며 북돋우는 대범함이 있었다고 기억했다.

인사 문제도 잡음이 없게 처리하는 편이었다. 석유개발공사 창설 직원인 한 간부는 이원조씨의 인간적 면모에 대해 “인정 많고 공과 사가 분명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다른 간부는 “내 기억에 (이씨가) 외부에서 특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오해 받기 싫어서 그랬던 것 같다. 초창기에는 외부 인사 영입이 필요한 면도 있었는데 (이씨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또 인사 업무를 밑(부하 직원)에다 맡기다 보니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도 많았다”는 말로 이씨의 지나친 조심성이 ‘부작용’을 낳기도 했음을 시사했다.

이씨는 인맥 관리에 철저했다. 은행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하다 못해 거래처에 선물을 보낼 때도 아랫사람에게 그 일을 시키지 않았다. 직접 물건을 고르고, 파손 여부를 확인한 뒤 다시 정성스럽게 포장하고 덕담을 써서 보냈다. 직원들의 경조사도 잘 챙겼다. 말단 행원의 상가에도 꼭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대출 커미션을 받는 경우가 드물었다고 알려져 있다. 70년대는 여신 담당자들이 서랍을 열어놓고 일할 정도로 대출 커미션을 주고받는 것이 공공연한 관행이었다. 이씨는 기업인들로부터 커미션을 받지 않는 대신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른 뒤 그 대출 고객에게 ‘군에 있는 친구들을 도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주로 소를 한 마리 잡아 주라거나, 텔레비전을 보내 주라는 것이었는데, 이런 방식으로 그는 고객에게 인심을 잃지 않고 군 친구들로부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자기 사람 만들기’ 집요

제일은행에서 오랫동안 그를 가까이서 보아온 한 임원은 “그는 사람의 마음에 대해 연구를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자기 사람을 만들기 위해 그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가 수신고 1위 지점을 꾸릴 수 있었던 것과 군 인맥을 잘 유지한 것은 그의 이런 정성스럽고 치밀한 인맥 관리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은행감독원의 한 임원도 “이씨가 부친을 통해 군인들과 쉽게 인연을 맺을 수 있었지만(이씨의 부친 이보경씨는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의 스승이었다), 그가 이 인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 헌신한 결과라고 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73년 ‘윤필용 사건’이 터져 군 수사 당국에 불려갔을 때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이것은 군 친구들이 그를 깊이 신뢰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같은 이씨의 철저한 인맥 관리에 대해 “그가 뭔가 야심이 없었다면 이런 고달픈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이씨는 80년 초까지는 잘 나가는 은행원일 뿐이었다. 이 때 이씨는 제일은행에서 능력을 인정 받아 상무로 갓 승진한 참이었다. 그런데 80년 5·17 쿠데타로 그의 절친한 ‘군 친구들’이 정권을 잡으면서 그의 인생 행로는 확 달라졌다. 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국보위에 금융계 인사로 참여했으며, 5공이 출범한 80년 10월 대통령 경제담당 비서관(1급 상당)에 발탁되었다. 한 달 뒤에는 한국석유개발공사 사장이 됐으며, 86년 1월에는 은행감독원장에 취임해 금융계로 금의 환향했다. 누가 보아도 파격적인 출세였다.

이씨는 ‘금융계의 황제’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막강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표나게 행사하지 않았다. 그가 은행감독원장으로 있을 때 결재를 받으러 원장실에 갔다 온 국장들은 “도대체 영감의 어디를 보고 실세라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원조씨 눈치 본 재무부장관

공직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힘은 긍정적인 측면으로 발휘되는 경향이 컸다. 금융계 인사들은 이씨를 상당히 괜찮은 인물로 평가한다. 소신 있고 유능한 금융인으로 그를 기억하는 이가 많다. 한국은행 출신인 한 금융단체장은 한마디로 이씨가 은행감독원장으로 있을 때 일하기 좋았다고 회고했다. 그는 “감독 업무의 독립성이 보장되어 소신껏 일할 수 있는 풍토였다. 멋있게 일했다”며 업무와 관련해서는 그만한 원장이 없었다고 말했다. 은행감독원의 몇몇 전·현직 임원은 은행감독원의 위상을 드높인 원장으로 그를 기억했다.

한 예로 은행의 주식 배당 사례를 들 수 있다. 주식 배당률을 정할 때 은행감독원은 은행과 재무부 중간에 끼여 위상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은행들은 배당률을 높이려고 재무부 윗선이나 정치권에 로비해 은행감독원에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이씨는 감독원장으로서 건전한 경영을 유도하기 위한 적정선의 배당률을 소신껏 정해 각 은행에 통고했다. 그 전에는 재무부장관이 은행감독원장의 결정을 일방적으로 뒤엎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당시 정인용 재무부장관은 아예 개입하려 들지 않았다. 이원장 시절에는 거꾸로 재무부가 눈치를 보았다는 얘기도 있었다.

이씨는 역대 원장들이 엄두조차 못내거나, 하려고 애썼어도 실패했던 어려운 일을 해냈다. 당시 고질적인 악습이었던 ‘선수표’와 ‘선네고’를 하루아침에 없앴다. 선수표는 증권·단자 회사 등 제2 금융권이 은행에 당좌 대월 한도를 웃도는 수표를 발행해 주도록 요구하는 변칙 행위이다. 선네고는 수출 업체들이 증빙 서류를 완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네고를 얻어내 미리 돈을 끌어 쓰는 것이다. 그러나 은행들은 고객을 놓칠 것을 염려해 이같은 잘못된 관행을 뿌리치지 못했다.

하루아침에 이를 뿌리뽑은 이씨에게는 ‘역시 센 사람’이라는 평판이 깊이 박혔다. 은행감독원의 한 관계자는 “최고 권력자와 특수한 관계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원장은 자기의 힘을 금융계 발전을 위해 쓰겠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쓸 곳에 힘을 제대로 쓴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감독원장으로서 부실 여신 예방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은행장 회의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신 심사를 엄격하게 할 것을 당부하며, 정치권 등에서 부당 대출 압력이 오면 ‘내 이름 대고 못해 준다고 말하라’고 일렀다. 그가 외풍 막기에 적극 나선 것은 권력층의 부당한 압력 때문에 부실 여신이 주로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돈을 떼일 위험이 커 정상적으로는 대출을 해줄 수 없지만 은행장이 정치권의 요구를 묵살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당시 상업은행장이던 ㅂ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 ‘높은 곳’에서 오는 압력성 대출 요구를 거절하는 것이 행장으로서는 가장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였다. 이원장은 ‘큰 금액은 은행감독원장 허가를 받아야 한다’고 핑계를 대라고 말했다. 그는 큰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두 번이나 그의 덕을 봤다.”

금융계 사람들은 그가 은행 이익 보호에 기여한 부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인사 개입 부문에는 견해가 엇갈린다. ㅅ은행의 ㄱ전무는 “은행 인사에서 그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가 ‘부적격’이라고 판정한 사람은 행장은 물론 임원이 되기도 어려웠다. 이씨의 훈수는 막강한 힘을 갖는 추천서였다. 그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사람은 당연히 불만을 가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은행감독원의 한 임원도 “그도 사람인 이상 친소 관계가 작용했을 것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일이 있었을 터이고, 상대적인 불이익을 받는 사람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이원조 사단’이 그의 친위 부대였다면 어떤 형태로든 소외된 그룹으로부터 매직을 일삼았다는 음해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은행감독원의 한 임원은 “함량 미달인 사람에게 임원 자리를 몇 억원에 팔아 넘겼다는 소문은 그를 아는 사람으로서 믿기 어렵다”고 옹호했다. 그는 “금융계의 황제라는 소문이 날수록 그에게 어떻게든 줄을 대려는 과열 현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씨는 소문과 달리 노골적으로 ‘엽관 운동’을 벌이는 사람에게는 경고 조처를 내리는 등 인사철의 문란한 질서를 시정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이씨의 은행 인사 개입과 관련해 전직 은행장 ㄱ씨는 “이씨를 금융계 황제다 뭐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과대 평가되어 있다”고 밝혔다. ㄱ씨는 은행장으로 있는 동안 이씨의 입김을 느껴 본 적이 없었고, 다른 은행장들로부터도 그같은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금융계에서는 이런 현실론도 고개를 든다. “이씨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금융계를 주물렀을 것이다. 예컨대 ‘3허씨’나 전경환씨 같은 인물이 금융권 인사에 개입한 것보다는 금융 메커니즘을 잘 아는 이씨가 황제 노릇을 한 것이 나았다”는 주장이다.

부실 기업 정리는 금융계 바깥에서 이씨가 권력을 남용했다고 공격 당하는 대표적 사건이다. 실세였던 이씨의 뜻대로 부실 대상자 선정과 인수 조건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누가 했어도 빼앗긴 측으로부터 비난이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부실 기업 정리 자체가 특혜 의혹을 많이 낳았다는 점에서 부실 기업 정리는 부정적 평판을 생산했다.

이씨에 대한 금융계의 평가는 언론의 보도나 일반인의 생각처럼 부정적이지 않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수면 위 행적에 국한한다. 대부분의 금융인들은 그의 물밑 행적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를 꺼리고, 실제로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이씨가 은행감독원장 당시 그의 수행 비서였던 ㄱ씨는 “공적 업무 외의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출퇴근 수행을 하지 않았고 사적인 접촉도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항간의 소문처럼 군 인사나 정치인들이 찾아오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고 그는 말했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그를 그늘에서 힘을 쓰는 ‘음지형 인물’이라고 말한다. 금융계에서 이씨가 밝고 건강한 행보를 보여온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씨는 그와는 또 다른 음습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씨는 88년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의 지명을 받아 전국구 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92년 14대 총선에서도 민자당의 지명을 받아 역시 전국구 의원이 되었다가 93년 동화은행 비자금 사건에 연루돼 의원 직을 자진 사퇴했다.

국회의원이나 보좌관·출입기자 등 주변 사람들은 이씨가 ‘매우 조용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국회에서도 평소 모습을 자주 보기 힘들었고, 상임위원회나 예결위원회 등 주요 의정 활동에서도 질의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야권의 한 중진 의원은 “의원들도 그를 의식은 했지만 그는 공개석상에서 발언권을 얻으려 했다거나 특별한 활동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림자 같은’ 인물이었다”고 말했다. 국회 92년 국정감사 자료를 보면, 그는 감사 첫날인 10월15일 재무부 감사장에 결석한 예를 빼놓고는 감사장에 줄곧 참석했다. 그러나 질의한 예는 별로 없다.

남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뒤에서 은밀하게 일을 처리하는 이씨가 공직 생활을 해오는 동안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해왔다는 것은 정설에 가깝다. 그러나 의혹은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장세동씨한테 뺨 맞아가며 6공 도왔다”

이씨가 사장으로 재직할 때 석유개발공사 본사는 서울 중구 무교동 코오롱빌딩의 두 층을 임대해 쓰고 있었다. 당시 사장실 앞에는 시중 은행장들이 아침마다 도열해 있었으며, 이씨는 그들을 한 사람씩 호명해 자기 방으로 불러들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5조원이나 되는 기금을 유치하기 위해 은행장들이 문이 닳도록 찾아간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석유개발공사 간부들은 “예치하는 대가로 ‘사례’는 할 수 있었겠지만, 그것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도리가 없다”고 여운을 남겼다.

은행에 있을 때 커미션을 거의 안 받을 정도로 돈에 대해 철저했다지만 그가 석유개발공사 사장으로 있을 당시 중간 결재 경로를 생략한 채 직접 자금 담당자의 서류를 결재한 예가 종종 드러나 구설에 오르기도 했다.

좀처럼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이씨지만 89년 5공 청산 정국이 계속될 때 놀랄 만한 발언을 했다. 자신이 ‘5공 핵심’으로 몰려 쫓겨날 위기에 처하자 그 심정을 기자들에게 털어놓았던 것이다. “내가 지금은 말을 않겠지만 나라고 해서 늙은 토끼처럼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는 없다. 내가 6공을 위해 얼마나 희생한 사람인데, 장세동·안현태 씨한테 뺨까지 맞아가며 전대통령을 백담사에 보낸 것이 난데, 그렇게 부려먹고 이럴 수 있는가.”

여기서 6공 정권이 과연 그를 어떻게 부려먹었으며, 그는 또 무엇을 어떻게 희생했는가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노씨의 비자금과 연결지어 생각한다. 금융인으로서의 타고난 능력과 부실 기업 정리 등을 통해 이씨가 비자금을 조성하고 관리했을 것이라는 의혹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다. 여러 차례 고비를 맞을 때마다 용의 주도하게 빠져나온 그의 탁월한 수완은 이번에도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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